문화

如一同行 마흔 네번째 - 함양, 남원

세종해피뉴스 2021. 10. 26. 00:04

벽송사 전경

마천면으로 향하는 길에서 칠선 계곡쪽으로 향하면 조선 중종 15년(1520)에 벽송(碧松)이 창건한 사찰 벽송사가 자리한다. 이사찰의 가장 높은 곳에는 보물인 함양 벽송사 삼층석탑이 있다. 많은 분이 벽송사를 찾아도 뒷산 커다란 소나무아래에 존재하는 이 석탑의 존재는 모르는 듯하다.

 

벽송사 삼층석탑

석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보이고 있다. 벽송사의 창건연대가 1520년인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신라양식 탑이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는 작품이다.

 

2단으로 구성된 기단은 아래층 기단에 가운데돌의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얕게 조각하였는데, 특이한 점은 바닥돌과 아래층 기단의 사이에 높직하게 딴 돌을 끼워놓은 것이다. 위층 기단의 맨윗돌은 한 장의 널돌로 이루어졌으며 밑에는 수평으로 얇은 단을 새겼다.

 

탑신부의 몸돌은 각 층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추녀가 얇고 반듯하며 마무리 부분에서 치켜오른 정도가 완만하다. 하지만 지붕돌 윗부분은 경사가 급하고 치켜올림의 정도도 심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1·2층이 2단, 3층이 3단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 남아있다.

 

이 석탑은 조형예술이 발달한 신라석탑의 기본양식을 충실히 이어받고 있으며 짜임새 또한 정돈되어 있는 작품으로, 조선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일반적으로 법당 앞에 탑을 두는 것과 달리 탑을 절 뒤쪽의 언덕 위에 세우고 있어 주목할 만한 점이라 할 수 있다.

 

벽송사 목장승

이사찰에 특이한 것은 벽송사로 들어가는 길가의 양쪽에 마주보고 서 있는 한 쌍의 목장승이다.

 

잡귀의 출입을 금하는 기능과 함께 불법을 지키는 신장상(神將像)으로서의 구실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2기 모두 몸통이 절반 가량 땅 속에 묻혀 있어, 드러난 높이가 2m 내외이고, 그나마 한쪽 장승은 윗부분이 불에 타 파손이 심하다. 대체로 잘 남아 있는 오른쪽 장승은 대머리에 크고 둥근 눈이 돌출되었다. 코 주위에 깊은 선을 둘러 뭉툭한 코가 더 두드러져 보이며, 꽉 다문 입 주위와 턱 아래에는 톱니 모양의 수염을 묘사해 놓았다. 몸통에는 ‘호법대신(護法大神:불법을 지키는 신)’이라는 이름을 새겨 놓았다. 머리의 일부가 불에 타버린 왼쪽 장승은 눈 한쪽과 코의 가운데 부분이 파손되었다. 남아 있는 눈은 크고 둥글며, 입은 다물고 있으며, 그 아래에 짧은 수염을 표현하였다. 몸통에는 ‘금호장군(禁護將軍:경내에 잡귀의 출입을 통제하는 장군)’이라는 글귀를 새겨 놓았다.

 

구전에 의하면 약 70년 전에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목장승으로서는 시대가 오래되어 보기드문 모습이다. 비록 눈·코·입이 과장되게 표현되긴 하였으나 순박한 인상을 주고, 무서운 듯 하면서도 친근함을 느끼게 하여 질박한 조각수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덕전리 마애여래 입상

칠선계곡 입구로 돌아나와 마천면에서 마천 중학교 쪽으로 향하면 덕전리 마애여래 입상을 맞게 된다.

 

커다란 바위의 한 면을 깎아 불상을 조각한 높이 5.8m의 거대한 마애불로 몸체와 대좌(臺座), 그리고 몸체 뒤의 광배(光背)를 모두 나타내고 있다.

 

거구의 불상답게 얼굴도 큼직하고 넓적하며 강건한 힘을 느끼게 한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오고 목은 비교적 짧고 목 주위에 3줄의 삼도(三道)가 보인다. 직사각형의 거대한 체구와 여기에 걸맞는 큼직한 발 등은 거대한 불상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상체에 비하여 하체가 너무 길며, 손은 신체의 다른 부분, 특히 발에 비하여 매우 작은 편이어서 몸의 균형이 고르지 못하다. 목 중간에서 뒤집어진 스카프형 옷깃과 배와 두 다리로 규칙적으로 접어내린 U자형의 옷주름이 보인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 초기 불상들에서 많이 나타나는 특징적인 모습이다. 광배에 나타나는 구슬을 꿴 모양의 연주문(連珠紋)과 불꽃무늬, 탑 기단부 모양의 대좌에 새겨진 기둥모양 등 또한 고려 초기 불상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 마애불을 모시는 옆의 적은 암자인 고담사와 주변 환경도 많이 단장된 모습으로 변했다. 이 부근을 오며 가며 보는 마애불은 그대로 인데 주변의 환경은 변하는 것이 여러생각을 같게 한다.

 

부연정

귀가길을 인월에서 고속도로로 올라가길 원하여 길을 잡는다. 이곳을 지나면서 보았지만 그정자의 이름과 유래를 알 수 없었던 정자에 눈이 간다. 이번에는 저 정자의 이름을 알아보리라 맘먹고 길을 제촉한다.

이곳 함양의 나머지 보물로 지정된 것은 승안자시 삼층 석탑과 교산리 석조 여래좌상이다. 이번여행에서는 계획에 없어서 다음으로 미룬다. 이 누정은 함양의 부연정 (釜淵亭)으로 한명회의 후손으로 순조시대에 무주에서 이사 온 춘정 한일택(韓日宅)과 한유택(韓有宅)형제가 수양하던 곳으로 한일택의 증손자 한진석이 1955년에 세우고 김종가(金種嘉)가 기문을 지었다. 부연이란 말은 속전에 두류산 맥이 동으로 현해탄을 건너 일본땅에 들어간다고 하기에 관아에서 큰 가마솥을 던져 넣어 그 기세를 누르려고 한 것에서 유래한다. 

 

남원 땅으로 들어서다 잠시 망설이다 실상사를 지나친다. 실상사는 날을 따로 받아 찾아야 할 곳이란 생각과 둘러보기는 시간이 허락되지 않은 장소로 여겨졌다. 아쉬움에 실상사의 암자인 백장암으로 오른다. 이곳에는 국보10호의 석탑과 보물인 석등이 존재한다 . 이 사찰 또한 지금은 많은 변화속에 번창한 것을 느낀 곳이다.

 

백장암 전경

실상사는 지리산 천왕봉 서편에 위치한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창건하였다. 이 곳에서 북쪽으로 얼마쯤 가다보면 백장암이 나타나는데, 예전에는 실상사에 딸린 소박한 암자로, 그 아래 경작지에 이 탑이 세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대웅전과 요사체를 가진 소박한 절로 탑은 대웅전 앞에 자리한다. 

 

국보 백장암 삼층석탑

낮은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각 부의 구조와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다. 즉, 일반적인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데 비해 이 탑은 너비가 거의 일정하며, 2층과 3층은 높이도 비슷하다.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한 단으로 표현된 지붕돌의 받침도 당시의 수법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탑 전체에 조각이 가득하여 기단은 물론 탑신에서 지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각이 나타난다. 기단과 탑신괴임에는 난간모양을 새겨 멋을 내었고, 탑신의 1층에는 보살상(菩薩像)과 신장상(神將像)을, 2층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상(天人像)을, 3층에는 천인좌상(天人坐像)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3층만은 삼존상(三尊像)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갖가지 모습들의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등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구조가 돋보이고 있어, 당시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석탑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보물 백장암 석등

대웅전과 석탑사이에 자리한 석등은 일반적으로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는데, 이 석등은 받침의 밑부분이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이다. 받침은 가운데에 8각의 기둥을 두고, 아래와 윗받침돌에는 한 겹으로 된 8장의 연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 역시 8각형으로 네 면에 창을 뚫어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간결하게 처리하였고, 그 위의 머리장식으로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큼지막하게 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인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석등의 기본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각 부분에 새긴 세부적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백장암의 명물 소나무를 보고 길을 돌아 나선다. 새로이 익히 알려지지 않았던 지방문화재들이 보물로 지정되면서 주변 사찰과 지역이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많은 좋은 지방문화재들이 지금은 잘 알려지지 않았어도 역사적 배경과 예술성이 뛰어나다 보면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어 보전될수 있으니 잘 보전되고 연구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진다.

오늘도 귀가길은 남모르게 뿌듯함을 느껴본다.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참조]

 

如一 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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