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마흔 번째 - 순창, 곡성

세종해피뉴스 2021. 9. 16. 00:10

곡성으로 길을 나선다. 곡성의 도림사는 가본 일이 있으니 곡성의 그간 접하지 못한 보물을 보러 가는 이번 방문길인 태안사이다.

태안사로 향하는 길목에 순천을 지나는데 문득 근래에 각광을 받는 관광지  산행길인  하늘길이 떠오른다. 목적지의 도시로 향할시 인근 도시는 왠만하면 지나는데, 순창을 여러번 방문 또는 지나쳐도 이곳에는 찾아볼 만한 보물이나 관광지가 없었는데,  용궐산에  50도 경사의 절벽 같은 암벽에 하늘길이라는 데크를 따라 걸으며 섬진강의 풍격을 볼 수 있는 곳을 만들어 핫이슈로 떠오르고 있다는 소문에, 길을 비껴나 이곳으로 향한다.

 

섬진강을  따라 우리를 맞이한 길은 원래 있던 강을 따라 있던 소로이어서  대형 버스는 진입이 어려워, 큰길 주차장으로 부터 대형 버스를 이용한 사람은 먼길을 강을 따라 걸어 올라가야 한다. 이날은 단체 관광객들 사이로 차를 몰고 산밑의 주차장으로 향한다. 강가를 따라 걷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점심시간 언저리 인데도 많은 사람들의 방문으로 주차장은 만차이다.

 

바라본 하늘 길

하늘 길 까지는 나름 가파른 길을 올라야 한다. 계단과 길옆은 로프로 된 난간이 있어 힘들게 올라가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된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른 길 중간 중간 난간을 붙들고, 다른 이를 앞서 보내면서 땅만 보며 걷는다.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경치도 곁눈질로 보며 그저 오르다 보니 데크가 나왔다.  이곳에 오르니 섬진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시원한 강바람으로 그간의 피로가 가시는 듯하다.

그다지 운동을 못한 내 걸음이 남보다 느리고, 올라온 가파른 경사를 다시 내려 가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아래서 기다리는 가족 생각에 중도에서 하산을 택한다.  그저 준비 없이 무언가를 즉흥적으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든 것은 하산길 의 신발과 목마름 때문일 것이다. 

 

아쉬움 반성속에 하산을 하고 오강 바위로 향한다. 이곳의 이름이 알려지며 많은 탐방객으로 인해 사진도 온전히 촬영하지 못한다.

강을 따라 산을 한바퀴 도는 길로 돌아 나와  곡성의 태안사로 향한다.

 

 

태안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이름 모를 스님 세 분이 세웠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는 광자대사가 크게 늘려 지었는데 이 때 절의 규모는 총 40여 동에 110칸이었고, 법당에는 높이 1.4m되는 약사여래철불좌상을 모셨던 듯하다. 고려 고종 10년(1223)에는 당시 집권자인 최우가 고쳐 지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숙종 10년(1684)에 주지 각현이 창고를 새로 지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특히 조선초에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이 이곳에 머물렀던 인연이 있는 곳이다. 한국전쟁때 많은 피해를 입어서 지금 있는 건물은 대부분이 복원된 것이다.
경내에는 혜철선사의 부도인 적인선사조륜청정탑(보물 제273호), 윤다의 부도인 광자대사탑(보물 제274호), 광자대사비(보물 제275호), 승무를 출 때 사용하던 태안사대바라(보물 제956호), 태안사동종(보물 1349호), 태안사일주문(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 태안사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170호) 등이 있다. 

 

적인 선사탑

이 탑은 승려 적인선사 혜철의 탑으로, 혜철 스님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태안사는 신라시대 선(禪)을 가르치는 유명한 종파인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로 이름이 높으며, 적인선사 혜철(惠哲)은 태안사가 속한 동이산파를 연 스님이다.  이 탑은 전체적인 형태가 모두 8각형으로 이루어져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3단의 기단(基壇) 위로 탑신(塔身)과 머리장식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아래·가운데·윗받침돌로 나뉘어지는데, 아래받침돌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으며 면마다 사자상을 조각해 놓았다. 가운데받침돌은 그 높이가 매우 낮고, 면마다 가늘고 길게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윗받침돌은 옆면에 솟은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몸돌은 낮은 편이지만 온화한 기품을 지니고 있으며, 앞·뒷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다. 그 옆면에 다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넓은 편으로 밑면에는 서까래를, 윗면에는 기왓골과 막새기와까지 표현하여 목조건축의 지붕양식을 사실적으로 나타냈다. 추녀의 곡선은 완만하며, 각 귀퉁이는 급하게 치켜올려진 상태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 등이 차례로 잘 남아있다. 이러한 머리장식들은 기단과 탑신의 화려한 조각들과 어울려 탑을 전체적으로 장엄하게 보이도록 한다. 탑의 전체적인 형태는 무겁지만 너그러운 품위를 지녔고, 각 부분의 조각은 매우 자세하게 새겨져있어 사실적인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이르러 양식상 석탑을 비롯해 돌로 만든 조형물들이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것이 하나의 경향인데, 이 탑은 매우 뛰어난 조형성을 갖추고 있다. 탑 옆의 비문을 보면, 적인선사는 신라 원성왕 1년(785)에 태어나 경문왕 1년(861)에 입적하였다. 따라서, 이 탑도 적인선사가 돌아가신 86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광자 대사탑

태안사 입구에 있는 고려시대의 탑으로, 광자대사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광자대사는 태안사의 2대 조사(祖師)로, 경문왕 4년(864)에 출생하여 혜종 2년(945) 82세로 입적하였다. 자는 법신(法身)이고 법명은 윤다(允多)이다. 탑의 형태는 바닥돌부터 꼭대기까지 8각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기단부(基壇部) 위에 탑신(塔身)을 차례로 놓은 전형적인 모습이다. 덩굴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진 아래받침돌 위에 유난히 낮은 가운데받침이 올려져 있다. 윗받침에는 16잎씩의 연꽃을 두 줄로 조각하여 우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탑몸돌은 앞뒷면 모두 탁자에 놓여 있는 향로모양을 새겨두었고, 그 옆으로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높은 편이나 추녀에 이르러 얇아지고 있어 중후한 감을 덜어주고 있다. 꼭대기에는 흔하지 않게 머리장식부분이 완전하게 남아 있다. 이 탑은 전체적인 모습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어 완벽한 형태미를 보여주며, 각 부의 구성과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조화롭다.

 

광자대사 탑비

테안사에 있는 탑비로, 고려시대 승려 광자대사 윤다(允多)의 탑비이다. 광자대사는 태안사를 두 번째로 크게 번성케 한 스님으로, 경문왕 4년(864)에 태어나, 8세에 출가하였다. 사방을 다니다가 동리산에서 수도를 하였고, 그 뒤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계(戒)를 받아, 다시 동리산으로 돌아와서 승려가 되었다. 혜종 2년(945)에 82세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광자’라 내리었다. 비는 비문이 새겨진 몸돌이 파괴되어 일부 조각만이 남아 있으며, 거북받침 위에 머릿돌만 얹혀져 있는 상태이다. 거북은 목이 짧아보이기는 하지만, 머리의 표현이나 몸 앞쪽의 조각이 사실적이고 화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등 위로는 비를 얹기 위한 받침대가 새겨져 있는데, 옆면에 보이는 무늬가 어떤 것을 표현한 것인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머릿돌에는 네 귀퉁이마다 이무기의 머리조각이 돌출되어 있고, 앞면에는 극락조로 보이는 새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이러한 새 종류의 조각은 구례 연곡사 동 승탑(국보)나, 구례 연곡사 북 승탑(국보호)에서 잘 나타나 있다. 비몸돌의 파손으로 비문은 거의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지만 다행히 『조선금석총람』에 일부 글자가 빠진 채로 그 전문이 실려있어, 광자대사가 출가하여 법을 받고 전하는 과정, 공양왕의 옆에서 불심에 대한 문답을 한 일, 고려 태조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일 등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의 글씨는 줄을 친 후 새겨 놓았는데, 전체적으로 건강한 힘이 느껴지고 은은한 기운이 감돌고 있어 통일신라에 비하여 서예가 훨씬 발전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곳곳의 여러 조각들을 통해 다양한 장식을 표현하려 했던 참신한 의도가 엿보이는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지 5년 후인 광종 1년(950)에 세운 작품이다.

 

태안사 동종

 태안사에 소장된 조선 16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종이다.

맨 위에는 대롱 형태로 솟은 음통과 종의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가 두 다리로 천판을 누르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었다. 그리고 어깨위를 돌아가며 입화장식과 그 아래로 연꽃무늬가 돌려 있고, 그 밑에 넓은 띠에는 방형 속에 연꽃무늬를, 아래에는 작은 원 속에 범자를 새겨 넣었다. 넓은 몸체에는 네군데에 사각형의 연곽이 있는데 그 주위는 당초문으로 장식을 하고 그 안에 9개의 연뢰를 나즈막하게 돌출표현하였다. 몸체의 하대는 종구에서 조금 올라와 배치되었는데, 상대와 마찬가지로 연꽃무늬와 당초문을 새겨 넣었다. 종 몸체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조선 세조 3년(1457)에 이 종을 처음 주조했으나 파손되어 선조 14년(1581)에 다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전기에 만들어진 대형의 왕실 발원의 범종에서 사찰 중심의 범종으로 바뀌어 가는 과도기적 시기의 작품으로, 전통양식의 계승과 새로운 양식의 접목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제작과 관련된 명문이 뚜렷하게 양각되어 있으며, 주조기술도 비교적 우수한 16세기 사찰 범종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태안사 능파각

태안사 능파각은 태안사의 금강문으로 누각을 겸한 일종의 다리건물이다. 계곡의 물과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의미하는 ‘능파(凌波)’라 이름하였다. 이 다리를 건너면 세속의 번뇌를 던져버리고 부처님의 세계로 진입함을 상징한다. 통일신라 문성왕 12년(850)에 혜철선사가 처음 지었고, 고려 태조 24년(941) 광자대사가 수리하였다고 한다. 그 뒤 파손되었던 것을 조선 영조 43년(1767)에 다시 지었다. 다리를 건너는 쪽에서 보았을 때 앞면 1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간결한 맞배지붕이다. 계곡의 양쪽에 바위를 이용하여 돌축대를 쌓고 그 위에 두 개의 큰 통나무를 받쳐 건물을 세웠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배치하는 주심포 양식이며,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민흘림 기둥을 사용하였다. 여러 가지 동물상을 조각한 목재를 사용하였으며, 다리와 문·누각의 역할을 함께 하도록 지은 특이한 건물이다.

 

태안사 일주문

태안사 입구에 있는 일주문(속세와 불계의 경계 역할을 하는 의식적인 상징물)으로, 능파각에서 약 200m쯤 지나 높직한 돌계단에 올라서 있다. 조선 숙종 9년(1683) 각현선사가 다시 지은 후, 1917년과 1980년에 보수하였다.  태안사 일주문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두 개의 굵은 기둥 위에 앞면 1칸의 규모로 세웠으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단순한 맞배지붕이다. 기둥에는 양쪽 모두 앞뒤로 보조기둥을 세웠다.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있는 다포식이다. 앞·뒷면의 기둥 사이에는 3구씩, 옆면에는 1구씩 공포를 배치하여 전후좌우가 포로 꽉찬 느낌이 들며, 매우 화려하다.
일주문 내부의 천장 아래에는 용의 머리를 조각하여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앞면에는 ‘동리산태안사 (桐裏山泰安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태안사 삼층석탑

사찰의 입구에는 연못과 연못 중앙에 탑이 있다 연못가에서 다리를 통하여 탑을 가까이서 볼수 있다.

태안사 내 연못 중앙에 마련된 작은 터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절 내의 광자대사 부도 앞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원래는 기단(基壇)의 한쪽 면과 탑신(塔身)의 1층 지붕돌, 2·3층 몸돌이 없어진 상태였는데, 이곳으로 옮기면서 새로이 보충하여,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갖추고 있다. 기단 아래로는 탑을 옮길 때 마련해 둔 3단의 받침이 놓여 있어 전체적으로 높다란 풍채를 보인다. 기단은 각 층마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으며, 윗면에 3단의 얕은 층을 내어 윗돌을 괴고 있다. 탑신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 놓인 머리장식은 낮은 장식받침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이 만들어 올려놓은 것들이다. 비록 일부가 없어져 훗날 보충해 놓은 것이긴 하나 전체적으로 고른 균형과 안정감이 느껴진다. 기단과 지붕돌의 조각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기에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참조)

 

순창의 용궐산 하늘길에서 기력을 다 소진 하여 태안사의 경내를 둘러 보는데 여독이 가시질 않는다. 볼거리가 많은 태안사를 뒤로 하며 도림사는 다음 일정으로 물리게 된다.  가곡리의 오층석탑을 마저 보고 귀가하려고 하다 이내 맘을 돌린다. 나른한 몸과 먼 귀가 길을 생각하니 다음 여정은 무리라는 생각이다. 간만에 산행아닌 잠시나마의 등산으로 피곤하고 나른 하지만, 왠지 건강에는 도움이 될 것 같아 마음이 푸근해 진다. 안전한 여행과  볼거리를 위해서는 건강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 하루 이다. 잘 만들어진 고승의 탑과 탑비를 본것으로 피곤을 날리고 먼 귀가길을 나선다.

 

如一 유광하

[관련기사] 如一同行 마흔 번째 - 순창, 곡성 > 뉴스 | 세종해피뉴스 (xn--vg1b03zi5a71m9wruj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