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마흔 다섯번째 - 충주

세종해피뉴스 2021. 10. 29. 23:45

충주로 길을 나선다.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사이 남한강 유역에 자리하여, 고구려때는 국원성, 신라시대는 중원경으로 마한, 백제 고구려 신라를 잇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고장이다.

동으로 제천, 서로는 음성, 남쪽으로는 괴산. 문경 그리고 북으로는 원주, 여주와 경계를 이루는 내륙 분지 이다.

 

 

오늘은 중앙탑이라 불리는 국보 충주 탑평리 7층 석탑과 국보 고구려비 그리고 청룡사지를 찾아보려 한다. 먼저 탑을 이웃하여 자리한 국립 충주 박물관을 찾는다. 많은 역사와 유물을 보관할 듯 한 이곳은 의외로 아담하고, 충주의 역사변화와 주변 유적지에서 발굴된 문화재의 전시, 그리고 근대사의 유물등 충주 지방의 옛날 과 근대에 사용된 물건의 전시가 독특하다.

 

 

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7층 석탑으로 향한다. 높이 대를 쌓아 그 위에 장엄하게 자리한 석탑은 7층이라는 위용이 충주시가 국토의 중앙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충분했다. 통일신라 원성왕 때 신라의 중앙을 표시하기위해 같은 보폭을 가진 건각자( 걸음을 잘 걷는 사람)를 남과 북에서 동시에 출발시키면 반드시 이 곳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지리적으로 나라의 한 가운데 되는 지점에 세워진 탑이라 하여 중앙탑이라 불려왔다고 합니다.  중앙탑의 ‘중앙’은 통일신라 영토의 중앙이라고 해야될 듯 하다.  현존하는 신라 석탑 중 가장 큰 규모인데, 충주 지방이 새로운 왕이 출현할기운이 왕성하여, 이를 누르기 위해 사찰을 건립하고 탑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주변에 기와 조각이 산재하고 연화 문양의 석등 받침돌이 남아 있다.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7층 탑신과 탑머리를 얹은 형식이다. 높이(14.5m)에 비해 폭이 넓지 않아 날렵한 모양새다. 깊은 산중 고찰에 있을 법한 탑이 사방이 트인 강변에 선 모습이 이색적이면서도 편안하다.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며,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치켜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활기를 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탑 정상의 머리장식은 보통 하나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이 얹어지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이중으로 포개어진 똑같은 모양의 받침돌이 머리장식을 받쳐주고 있다.

 

기단에서의 기둥조각 배치,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의 짜임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 후반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2차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너비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듯 하여 안정감은 덜하며, 세부수법이 약화되고 있어, 일제당시 보수하면서 일부 변형되었다는 논란이 있다.

 

 

 

멀지 않은 곳의 고구려 비를 찾아본다. 1972년 이전에는 대장간 자리에 건물기둥으로 쓰이고 대장간 내부쪽의 비면을 농기구등으로 쪼아 훼손이 심했다 한다. 비석이 발견된 1979년 당시에도 마모가 심하게 진행되어 많은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형태는 넓적한 돌기둥처럼 보이며 화강암 자연석을 그대로 비석으로 활용하고, 사면에 예서체 글씨가 1행 23자꼴로 528자 새겨져 있다. 마모가 심해 비문의 내용은 알아 볼 수 없지만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표현을 통해 충주 고구려비를 만들 당시 고구려군이 신라에 주둔했으며 고구려가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2015년 고구려비가 있던 자리에 전시관이 설립되면서 원본도 전시관 내로 옮겨졌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발견 당시 비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었다. 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처음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제위(諸位)’·‘사자(使者)’ 등 고구려 관직 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古牟婁城)’등의 글자가 보이고, ‘모인삼백(募人三百)’·‘신라토내(新羅土內)’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어 고구려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2019년 충주 고구려비가 장수왕시기에 건립된 것이 아니라 광개토태왕이 건립했다는 가설이 나왔다. 새로 판독한 문자에 의하면 '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라고 써있었으며 영락(永樂)은 광개토태왕이 즉위하고 붕어하기 까지의 연호이다. 

충주는 백제 고구려 신라로 삼국 모두에 속했던 아직도 규명 되지 않은 많은 이야기가 있었던 지방이라 여겨진다. 저마다 자기의 영토임을 알리는 탑과 비로 표지석을 남기던 옛사람들의 심리가 무엇이었을까 짐작해 본다.

 

 

이웃한 이천 원주에도  유명한 사지가 있으나 이곳도 두군데의 큰사지가 있다. 하나는 청룡사지 이고 다른 하나는 승선사지이다.  원주 부론 방향으로 향하면 청룡사지가 있다. 부론쪽으로 재를 넘으면, 소태면 오량리, 오량 마을이 있고, 지금은  마을 알림돌 맞은 편 카페에 많은 차들로 붐비는 모습이 보이고, 이곳에는 느티나무 보호수가 있다. 이곳서 안으로 들어서면 청룡사지가 나온다. 잘 정비된 주차장에서 100여 미터 오르면  그곳에서 정렬하여 있는 보물들을 접할 수 있다. 여느 사지 처럼 넓은 절터는 보이지 않고 옆으로 청계산 등산로만 존재하는 것이 의아하다.

청룡사의 현존하는 기록은 없고, 고려시대의 창건설화가 전해진다. 설화에 의하면 어느 화창한 봄날 한 '법력 높은 스님'(道僧)이 청계산 근처를 지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스님이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으니, 하늘에서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갖고 놀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용 한 마리가 여의주를 향해 내려오다가 청계산 위로 올라갔고, 여의주는 큰 빛을 내다가 사라지고 용도 사라지면서 비도 멎었다. 유심히 이를 지켜보던 스님은 갑자기 청계산을 돌아보았다. 스님이 용이 사라진 그 곳이 바로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길지임을 깨달았다. 용의 힘이 꼬리에 있음을 상기한 스님은 용의 꼬리부분에 암자를 짓고 청룡사라 했다고 한다. 설화처럼 시작된 청룡사의 역사는 고려 말 일대 전기를 맞게 된다. 고려 말의 국사였던 환암혼수(幻庵混修. 1320∼1392)가 말년을 이곳에서 보내다. 조선 태조 1년(1392)에 입적했기 때문이다. 태조는 혼수에게 보각(普覺)이라는 시호를 사찰을 크게 중수했다. 청룡사는 이후 여주 고달사, 원주 거돈사·법천사·흥법사 등 남한강 줄기를 따라 자리잡은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대찰(大刹)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1665년(현종 6)에 중수가 이뤄졌지만, 조선말에 폐사(廢寺)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폐사되는 과정이 정말 나를 절망스럽게 만들었다. 설화에 따르면 조선 말기에 판서를 지낸 민태룡이 소실의 묘를 이곳에 쓰려고, 스님들에게 돈을 줘 사찰을 불태우게 했다고 하는데, 믿기 힘든 전설이다. 아마도 다른 폐사들 처럼, 유생들이 강제로 산문을 닫게 만든 후, 지어 퍼뜨린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절을 불태우고 달아나든 스님이 벼락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의 뒷부분에서 이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어찌됐던, 한 사찰의 운명도 시대와 자연 그리고 인간의 노력에 의해 운이 다시 열리게 된다는 것을 청룡사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조선말에 폐사됐던 이 곳에 1921년 혜종(惠宗)스님이 전각을 짓고 법등을 이었기 때문이다. 1959년 다시 중수됐고, 1996년에는 현 주지 현우스님이 대지 640평에 59평의 요사를 다시 건립하게 된다. 다포식 한식 건물의 법당도 어엿하게 자리잡았다. 조계종이 아닌 한국불교 법화종 사찰로 등록도 돼 있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보각국사 탑으로 향하다 보면 먼저 청룡사 위전비를 만나게 된다. 청룡사의 창건, 경영 등과 관련된 경비 충당을 위하여 신도들로부터 기증받은 전답 등의 내역이 기록되어 있는 비석으로 조선 숙종 18년(1692년)에 제작되었다. 귀부에 비신을 세우고 가첨석을 올려놓은 모습으로 가첨석의 일부가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비문에는 사찰의 경영을 위하여 신도들이 출원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음기에 시주한 불자들의 이름과 출원품의 양이 명시되어 있고 이 비를 세운 대표자는 통정대부 숭휘(崇徽)로 되어 있다. 사원경제 분야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크기 : 비신높이 140cm, 너비 69cm, 두께 23cm 정사각형의 지대석위에 각형 괴임대가 새겨진 하댓거을 놓고 호감암의 석종형탑신을 올렸다. 탑신 윗부분은 복발모양으로 조각하여 정상부에 3단의 돌출부부을 조식하였고 탑신부 가운데에 부도의 주인공을 새겨놓았는데 '적운당사리탑'(寂雲堂舍利塔)으로 보여진다.

 

 

청계산 중턱의 청룡사에 자리한 탑으로, 보각국사의 사리를 모셔놓았다. 보각국사(1320∼1392)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12세에 어머니의 권유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이후 불교의 경전을 두루 연구하여 높은 명성을 떨쳤다. 특히 계율을 굳게 지키고 도를 지킴에 조심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 73세의 나이로 목숨을 다하자, 왕은 '보각' 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정혜원륭’이라 내리어 탑을 세우도록 하였다.

고려말 청계산 중턱에 작은 암자가 있던 것을 이태조의 사부 보각국사가 은거하므로, 태조가 대사찰을 세우도록 했다 한다. 지금은 폐허가 되고 부근에는 보각국사의 부도탑인 정혜원융탑과 석등, 정혜원융탑비 등이 남아 있다. 정혜원융탑은 보각국사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으로 국사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가 왕명으로 탑을 짓게 하여 권근이 비문을 짓고 탑명을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 하였다.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조성되었는데, 바닥돌 위에 아래·가운데·윗받침돌을 얹어 기단(基壇)을 마련하고 그 위로 탑몸돌과 지붕돌을 올려 탑신(塔身)을 완성하였다. 기단은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한 8각으로,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를 새겼다. 가운데돌에는 사자상과 구름에 휩싸인 용의 모습을 교대로 새겼다. 탑신의 몸돌은 각 면마다 무기를 들고 서 있는 신장상(神將像)을 정교하게 새겨 놓았으며, 그 사이마다 새겨진 기둥에는 위로 날아오르는 이무기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하였다.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에서 높이 들려있는데 마치 목조건축의 아름다운 지붕 곡선이 살아난 듯하다.

태조 3년(1394)에 완성을 보게 된 이 탑은 양식상 종모양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 8각의 평면을 이루는 형식으로 건립된 몇 안되는 탑 가운데 하나로, 조선시대 전기 조형미술의 표본이 되는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탑 가득히 새겨진 조각과 둥글게 부풀린 외형이 어우러져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탑신의 기둥과 지붕의 곡선, 그리고 지붕 귀퉁이의 용머리조각 등에서 목조건축의 양식을 엿볼 수 있어 당시의 건축과 비교하여 감상할 만하다.

 

 

청룡사 옛터에 남아 있는 비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약한 승려인 보각국사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보각국사 혼수(1320∼1392)는 도를 지킴에 조심하고, 특히 계율을 따를 것을 강조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12세에 출가하여 22세 때에는 승과에 급제하였으며, 29세 때에는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가 이후 청룡사로 옮겨가 머물렀다. 여러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도하다가 조선 태조 1년(1392) 청룡사로 돌아와 73세에 입적하니, 태조는 시호를 내려 ‘보각국사’라 하고, 탑이름을 ‘정혜원융’이라 하였으며, 청룡사에 대사찰을 조성하도록 하였다.

 

비는 1장의 돌로 된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돌이 서 있는데, 위로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몸돌 양 귀퉁이를 접듯이 깎아 마무리해 놓았다.

 

조선 태조 3년(1394) 문인선사 희달(希達)이 왕의 명을 받아 세운 것으로, 권근이 비문을 짓고,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다. 글씨에서는 힘이 느껴지고, 예스러운 순박함과 신비스러움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중국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품격을 지니고 있다. 이는 이후 조선시대를 통하여 이에 대적할 만한 것이 없을 만큼 돋보이는 면이라 할 수 있다. 

 

 

옛터에는 석등과 함께 보각국사의 사리탑과 탑비만이 서 있을 뿐이며, 현재의 청룡사는 옛터의 북쪽에 자리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석등은 보각국사의 명복을 빌어 주기 위해 그의 사리탑 앞에 세워진 것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3단의 받침 가운데 아래받침돌은 앞을 향해 엎드려 있는 사자를 조각하였는데, 이 때문에 사자석등이라 부른다. 사자의 등에 얹어진 가운데받침은 기둥모양으로 4각의 낮은 돌을 두었다. 화사석은 4각으로, 네 모서리를 둥근기둥처럼 조각하였고, 앞뒤로 2개의 창을 내었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마다 자그마한 꽃을 돌출되게 조각해 놓았으며,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고 네 모서리선이 두터워 고려시대의 지붕돌 양식을 잘 보여준다.

 

절터에서 석등을 사리탑, 탑비와 나란히 세운 것은 조선시대의 배치방식이다. 탑비에 새겨진 기록으로 미루어 이 석등은 조선 전기인 태조 1년(1392)부터 그 이듬해인 1393년에 걸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정사각형의 지대석위에 각형 괴임대가 새겨진 하댓거을 놓고 호감암의 석종형탑신을 올렸다.

 

탑신 윗부분은 복발모양으로 조각하여 정상부에 3단의 돌출부부을 조식하였고 탑신부 가운데에 부도의 주인공을 새겨놓았는데 '적운당사리탑'(寂雲堂舍利塔)으로 보여진다

 

 

청룡사지를 내려오며 귀중한 문화재가 이토록 많은 이곳이 절터는 아니라 생각해본다. 그간의 경험에 비추면 이러한 사리탑과 탑비는 사찰의 뒷편언덕에 자리한 것이 많다고 보면 아마도 절터는 산입구의 넓은 분지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돌아 나오는길 주변을 관심을 가지고 보게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무엇인가가 이주변에 묻혀 있으며 우리의 노력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자는 생각을 가져본다

다음에는 복원이 한창이었던 승선사지와 이곳의 남은 문화재를 찾아보리라 맘 먹으며 충주를 벗어난다.

 

如一 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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