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이백 서른 네번째 - 충주

세종해피뉴스 2026. 5. 21. 23:01

충주로 목적지를 잡는다.  충주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으나, 이번 여행은 이곳에 자리한 여러 철불을 찾아보려 하게 때문이다. 충주를 들어서며 먼저 단호사를 찾는다.

 

 [단호사 대웅전]

 

단호사는 창건연대를 알 수 없으나 조선 숙종 때 중건하여 약사(藥寺)라 하였고, 1954년에 단호사로 이름을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절 마당에 자리한 수령 약 500~600년의  조선시대에 심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보호수로, 과거 한 선비가 꿈에서 고향 집 마당에 가꾼 나무를 한양에 옮겨 심으라는 계시를 받았으나,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어, 이에 선비가 단호사에 불공을 드리며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소나무를 심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거대한 노송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땅에 닿을 듯 하며, 용이 승천하는 역동적인 곡선의 모양으로,  대웅전을 향해  마치 분재처럼 서있다. 나무의 높이는 약 8.5m, 둘레는 약 2.1m에 달하며, 이 소나무 옆에 자리한 단호사 삼층석탑은 고려 시대의 양식적 특징을 가지며, 원래의 5층으로 추정되고, 처음 세워졌던 원래의 터에 자리한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으로 유형문화재로 보호 된다고 한다. 철불을 친견하기 위해 대웅전을 찾는다. 

 

 [대웅전 내의 삼존불]

 

대웅전을 찾으며 머리 속이 복잡하여 진다. 모셔진 불상이 이전에 보아 온 철불이 아닌 금동불로 교체되어 있어 처음에는 도금을 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기억속의 불상이 아니라 매우 당황하며, 절 주위를 맴돌아 본다.  의혹이 풀린다. 이전에 이 곳에 있었던 철불은 최근 소유권 이전으로 인해 충주 석종사에 모셔져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이방문을 통해 변화를 알게 된 것이, 모름과 알게 됨을 동시에 경험한, 허탈하면서도 뿌듯하기도 묘한 감정을 갖게 한다.

 

[ 보물제 512호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

 

석종사 방문을 위한 방문을 뒤로 미루고 이전의 철불상의 모습을 찾아 비교하여 본다. 고려 중기 제조  철불좌상으로 추정되며, 철 생산의 중심지였던 충주 지역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라 한다.  결가부좌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높이는 약 1.3m로 비교적 소형이지만, 철로 가득 차 있어 무게가 약 700kg에 달할 만큼 육중하다고 한다. 

 

[ 보물제 512호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 

 

이 철불은 육계가 큼직하며, 머리 가운데에는 고려시대 불상에서 자주 보이는 반달 모양이 표현되어 있고, 긴 타원형의 얼굴에 두 귀는 길게 표현되고, 목에는 3개의 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양 어깨에 걸친 옷은 두꺼운 편이고, 옷주름은 간략한 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슴의 띠매듭은 고려말 조선초부터 나타나는 수평적인 처리이며, 전체적으로 상체는 4각형의 각진 모습이다. 하체는 양 발을 무릎 위에 얹어 발바닥이 하늘을 향하고 있는 모습으로, 원래 이 불상은 충주 단호사 노천에 방치되었던 것을, 대웅전을 새롭게 건립한 후 이안하여 봉안하였었다고 한다. 이 불상은 바로 인근 대원사에 소장되어 있는 충주 철조여래좌상과 같은 작가나 공방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보이며, 지리적으로 인접한 원주지역에서 출토된 철불과도 유사한 양식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다시금 철불을 이곳에서 볼 수 없음을 아쉬워 하며 대원사로 찾아간다. 

 

 

언덕길에 자리한 대원사는 이전에는 동네 담 벼락에 차를 대었으나 지금은 주차장 시설을 만들어 방문자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대원사 전경]

 

1919년 우암 승현 대선사 김추월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국락전, 무량수전과 요사채가 자리한다.

 

 [철불이 자리한 극락전]

 

이곳 극락전에 모셔진 철불상은 높이 98㎝로 충주공업고등학교 근처에 있던 것을 1922년 충주군청으로 이전, 1937년에 다시 마하사로 이전되어 보관되어 오다가, 1959년 현재 소장처인 대원사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이런 까닭으로 이 불상은 광배와 대좌, 두 손이 결실되고 불신만 남았는데, 1982년에 새로 세운 전각에 봉안되면서 두 손은 나무로 만들어 넣었다고 한다.

 

 [보물 제 98호 충주 대원사 철조여래좌상] 

 

통일신라 후기부터 고려 초기에 걸쳐 유행하던 철로 만들어진 불상 가운데 하나로,  높이 0.98m로,  육계는 머리와 구별이 불분명하며 높직하며, 나발들은 성기면서 뾰족하게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우며, 길게 쭉 찢어지게 표현한 두 눈이 무섭게 일그러진 표정이며, 강인하면서도 무서운 인상이다. 신체와 옷자락 무늬의 엄격한 좌우대칭적 표현이 불상의 특징을 더욱 극명하게 나타내며, 목의 삼도는 목을 접합시킨 것처럼 처리되어 있다고 한다. 어깨는 널찍하고  둥근 어깨선 좌우로 팔이 대칭적으로 놓여 있으며, 다리는 넓게 벌려 결가부좌한 모양이다. 

조금 떨어진  백운암의 철조좌상을 찾아 길을 나선다. 이전의 방문에 산속에 자리한 법당은, 어수룩 해질 무렵에 당도 하여 보았던 사찰의 분위기에서 환하고 갈끔하게 정비된 모습으로 변하여 반겨준다

 

 [ 충주 백운암]

 

백운암은 1886년 무당의 신분으로 진령군이라는 작호를 받아 여자 대감이 된 윤씨에 의하여 창건된 사찰로 전해진다. 이 사찰의 주불전인 대웅전에는 나말여초에 조성된 철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원래 이 불상은 인근 대규모 사찰이었던 억정사지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충주는 철의 산지로 백운암의 철조여래좌상 이외에도 대원사의 충주철불좌상(보물)과 단호사의 철불좌상(보물)과 함께 충주 지방의 3대 철불로 알려져 있다.

 

 

백운암 철조 여래 좌상이 보존처리 과정에서 철불 임이 확인 된 것을 이전에는 없던 안내판이 설명하여 주고 있다.

 

 
충주는 철의 산지로 이 철불과 함께 대원사 소장 충주 철조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 및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보물, 1969년 지정)이 전하며, 이 들을 일컬어 충주지방의 3대 철불이라고 한다. 이불상은 여러 조각을 나누어 주조하여 이어 붙인 흔적이 표면에서 확인되며, 2006년 수리·보수를 실시하여 개금과 녹을 걷어내고, 결손 된 부분을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 보물제 1527호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

 
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철불로, 통일신라시대 석굴암 본존상의 전통을 이어받은 편단우견(왼쪽 어깨를 드러냄)의 법의와 항마촉지인(왼손을 무릎에 두고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킴)의 손 모양을 하고 있다. 작은 얼굴에 비해 몸체가 당당하며,  2006년 수리·보수 당시 개금과 녹을 걷어내고 결손된 부분을 보수하였다고 한다.  높이 87㎝정도의 크지 않은 상으로, 얼굴은 몸에 비해 작은 편이나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근엄한 표정이다. 목에는 삼도가 보이고 어깨가 넓으며 가슴이 융기되었고, 결가부좌한 다리의 폭이 넓은 당당한 자세로 보인다. 대의 자락에서 부분적으로 번파식 옷주름을 볼 수 있어서 이 불상이 통일신라 8세기 양식을 반영하고 있는 상임이라고 한다. 그러나 양감이 8세기 불상보다 풍부하지 않고, 항마촉지인의 수인도 전형적인 형식이 아니어서 8세기보다는 시대가 내려가는 것으로 보여.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정도로 추정되며, 비교적 통일신라 불상 양식의 특징을 많이 간직하고 있어 충주 지역 철불 중에서는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상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도금과 철불을 비교하여 본다. 많은 부처님이 도금되는 것을 보아 온 것에 대하여 재질 본연의 모습대로 보존되 철불을 접하는 것도 신선하고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 배운암을 인근에는 경종의 태실과 보물인 대지 국사 탑비가 자리한다.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조선후기 제20대 경종 태실.]

 
이 곳 태봉마을의 서쪽  산봉우리에 태항아리를 석함에 넣어 장태한 뒤 봉토한 곳으로, 왕으로 즉위한 경종은 관례에 따라 그의 태실을 석물로 가봉하여야 하나 재위 4년 중에 이를 이루지 못하고 승하하여, 다음의 왕 영조 2년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석물로 장식된 태실로서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1831년(순조 31)에 주민 김군첨 등이 태실직이에게 화를 입히려고 태실의 석물 일부를 훼손하는 변작사건이 일어나 다음해에 보수한 일이 있으며, 1928년에도 태항아리를 꺼내 가면서 파헤쳐져 ,석물이 엄정면사무소까지 옮겨져 있던 것을 1976년에 원위치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돌방 안에 있던 태항아리는 일제강점기 때 창경궁으로 옮겨가고, 이 곳에는 석조물과 태실비만 남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인근에 자리한 억정대사비를 찾는다. '억정대사'는 고려 말의 승려인 대지국사(大智國師)(1328~1390)를 지칭하며, 그에 대한 정보를 담은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가 보물로 지정되어 전각에 보존되고 있다. 대지국사는 1328년(충숙왕 15) ~ 1390년(공양왕 2)의 고려 말의 승려로, 여러 절의 주지를 거친 후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 양가도승록대사(兩街都僧錄大師)가 되며, 1390년에 억정사에서 입적하여 억정사지에 그의 탑비가 건립되어 있다고 한다.  직사각형 비받침 위에 비문을 새긴 몸돌이 올려져 있는 단순한 형태이다.
 

 [보물 제 16호 억정사지 대지국사 탑비]

 

조선전기에 건립된, 비신 높이 267㎝, 너비 130㎝, 두께 24㎝. 화강암 석재로서 개석은 없고 비신의 상부를 좌우로 귀접이 하고, 비문은 박의중이 짓고 승려인 선진이 쓰고 또 전액도 하였으며, 국사의 문인인 중윤이 1393년(태조 2)에 세우고 혜공이 각자하였다고 한다. 비문에 국사의 이름은 찬영, 자는 고저, 호는 목암, 속성은 한씨, 양주 사람이고, 또 지감국사와 탑명인 혜월원명은 시호임을 밝히고 있다. 이밖에도 1328년(충숙왕 15)에 출생하여 14세에 수법하고 공민왕의 명으로 내원에 들어가 왕을 보살피고 우왕·창왕에게도 충성을 다하였으며, 1390년(공양왕 2) 63세로 입적할 때까지의 경력과 국사의 천부적 자질과 인품·학력 등을 기리는 내용이 실려 있다고 한다. 또한 음기( 비 뒤에 새긴 글)에는 국사의 문도들과 속인 문도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다시금 둘러 본 충주의 철불들은 이전되어 옮겨진 것도 있지만 대부분 보다 낳은 문화재 보호 환경 속에서 관리되는 것을 알게 된 하루이며, 정보를 얻지 못하면 또 다른 발품 팔이도 필요하고,  찾아보지 못한 아쉬움도 남는 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직도 처음 접하지 못한 많은 보물들이 있는데,  이렇듯 이전하고 환경이 바뀐다면 짧은 인생 속에 어찌 다 볼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귀가 길을 택한다. 

 

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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