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이백 서른 세번째 - 부여

세종해피뉴스 2026. 5. 13. 00:28

부여를 들어서며 세탑리 오층석탑을 찾아 길을 나선다. 한적한 길을 한참을 찾아 들어야 나오는 오층석탑을 마주한다.

 

[충남 유형문화유산 부여 세탑리 오층석탑]

 

찾아온 세탑리 민가 앞에 자리한 탑은,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기단부가 땅에 묻혀 있고, 지붕돌이 두껍고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게 조성되어 있다. 지붕돌의 폭이 큰 변화없이 좁고 긴 일직선 모양을 하고 있다. 

주변에는 청량사라는 절이 있었다 하며, 주변 곳곳에 사찰에 쓰였던 돌과 고려시대 기와의 특징인 어골무늬를 가진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어, 사찰의 흔적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아울러 조선시대의 연호인 순치(順治)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도 발견되어, 조선시대까지 절이 존재 한 것으로 본다고 한다.

 

[충남 유형문화유산 부여 세탑리 오층석탑]

기단부는 거의 보이지 않는, 맨윗돌만 드러난 5층 석탑으로, 탑신의 각 층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기고, 2층 이상은 1층에 비해 급격히 낮아진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3단씩이고, 네 귀퉁이는 약간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노반과 복발만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는데, 이는 후대에 만들어 보충한 것이라 한다.  민가옆에 덩그란이 자리한 탑이 다소 안스럽다는 느낌을 가지며, 길을 나서서 부여 송곡리 유적문화관을 찾아 본다 

 

[부여 송곡리 유적문화관]

 

부여 송국리에 있는 청동기시대 집터 유적에 자리한 부여송곡리 유적지는 하천과 평지에 인접한 낮은 구릉과 대지 위에 100여 기 이상의 집터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라 한다. 송국리 집터는 유물을 토대로 기원전 7∼6세기 전에 농경과 수렵에 기반을 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곳의 입구에 자리한 유적문화관에는 이곳서 발견된 토기와 석기들이 전시되고, 이곳 주민들이 문화해설사로 유적지에 대한 설명을 하여 주고 있다. 나이 지긋하신 분이 해설사로 열정으로 소개 하여 주어 지식없이 찾아 온 내게 많은 정보를 일러 주어 이곳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문화재를 볼 수 있게 됨을 감사하며 관람한다.

 

[ 전시물 : 비파형 동검외 다수]

 

이 곳에서  발견된 집터 안에서는 토기와 석기가 많이 출토되었으며, 토기는 무문토기와 붉은 토기(홍도), 검은 간토기(흑도)인데, 특히 무문토기는 납작한 밑, 긴 달걀형의 몸체, 목이 없이 아가리가 밖으로 약간 꺾인 모습을 하여 이전의 무문토기와 달라 송국리식토기라 불린다고 한다. 돌칼, 돌화살촉, 방추차, 돌도끼를 비롯하여 다양한 석기들도 출토되고, 그 밖에 많은 양의 불탄쌀과 벽체에 세웠던 판자가 불탄채로 나오기도 하고, 출토 된 청동도끼 거푸집은 부채날형 청동도끼의 틀로서 요령지역의 것과 닮은 다고 하며,  집터 서쪽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무문토기 가마터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 당시 의 토기를 재현한 학생작품]

 

유적 문화관을 나서며 길 건너 자리한 고인돌을 먼저 찾아본다.

 

[충남 기념물 부여 산직리 지석묘]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에 있는 청동기시대 남방식 고인돌 지석묘는 1991년과 1992년까지 2차례에 걸쳐 현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에 의해 발굴 조사된, 축조시기는 청동기시대로 현재 2기의 고인돌이 남아 있다. 이 고인돌의 전면 남측으로는 금강 줄기인 석성천이 흐른다. 고인돌은 대형의 덮개돌을 가지며 2기가 동서로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충남 기념물 부여 산직리 지석묘]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진,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되는데, 부여군 산직리의 ‘바우재’또는 ‘쇠울’이라 불리우는 구릉에 동서로 2기의 고인돌이 나란히 있다.

  

[충남 기념물 부여 산직리 지석묘]

 

동쪽 고인돌의 발굴 전 상태는 표토 위로 3개의 굄돌과 덮개돌이 드러나 있고 고인돌 아래의 무덤방은 깊게 패여 있었으며, 발굴조사 결과, 4개의 굄돌을 갖춘 바둑판식 고인돌로 밝혀졌다고 한다.

덮개돌은 크기가 길이 580㎝, 너비 370㎝, 두께 130㎝이며, 평면모양은 끝이 둥근 삼각형이다. 덮개돌의 장축은 남북방향이다. 덮개돌 위의 열지어 있는 작은 굼은 후대에 덮개돌을 파괴하여 사용하기 위한 절석굼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이런 인위적 파괴행위로 인해 덮개돌은 원상을 잃고 서쪽 굄돌에 기대어 있는 상태이다.  하부구조는 모두 파헤쳐져 알 수 없으나 바둑판식으로 추정되며, 현재 동쪽과 북쪽 받침돌이 노출되어 있으며, 일부는 파괴되어 다른 곳으로 운반된 듯하다. 

 

 

서쪽 고인돌의 받침돌은 보이지 않으며, 덮개돌이 수평을 유지하고, 하부에 매장구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제사를 드리는 제단(祭壇)의 기능을 가졌던 고인돌로 추정 된다고 본다. 

유적 문화관으로 되 돌아 와 반대길로 향하면 유적지로 가는 길이 열린다.

 

[묘지터]

 

1974년 발견 된 이곳에서는 당시 지배층과 일반인의 묘제가 공존하는 모습으로, 판석(납작한 돌)을 세워 상자 모양의 널을 만든 형태의 돌널무덤 (석관묘)과 대형 토기(송국리형 토기)를 널로 사용한 독무덤 (옹관묘)들이 있다.  석관묘에서는 비파형 동검, 동착, 관옥 등 권위를 상징하는 유물들이 함께 발견되고, 독무덤은 토기를 수직으로 세우거나 약간 기울여 묻고 돌판으로 뚜껑을 덮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발굴 된 자리에 그림으로 무덤터가 있었음 을 나타내고 있으나 현실감이 없어 보인다.   

 

 

이곳은 청동기시대에  대지조성을 위해 대략 1,000㎡에 걸쳐 성토하였다고 한다. 성토층에서는 지점에 따라 다양한 재질의 흙이 사용되고, 평탄하게 하기 위해 경사면 위쪽의 풍화암반층을 깎아내고 그 깎아낸 흙은 경사면에 쌓아 면적을 넓힌 것으로 본다. 하천과 평지에 인접한 낮은 구릉과 대지 위에 100여 기 이상의 집터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집타]

 
송국리 집터는 유물을 토대로 기원전 9∼6세기 전에 농경과 수렵에 기반을 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5기의 집터가 있다. 집터는 평면 형태에 따라 둥근 것과 긴 네모꼴로, 둥근 집터는 30∼150cm 깊이로 땅을 파서(수혈식주거지) 만들고, 한쪽 벽을 얕게 파서 문을 만든 듯하며, 화덕자리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다수의 저장용 구덩이가 발견되고, 바닥 중앙에 1m 내외의 긴 타원형 구덩이를 파고 그 구덩이 안에 몇 개의 둥근 구덩이를 만들었다고 한다. 네모꼴 집터는 30㎝ 미만으로 땅을 판 반움집이나 지상식에 가까운 것으로 기둥구멍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주춧돌이 있는 발달된 집 형태를 하고 있다고 한다. 역시 집터자리에 움집형태로 복원하였으나 풍화로 복원한 형태가 살아져 다시금 잘 복원이 이루어 지길 바란다. 부여에서 만나지 못했던 금성산 석불좌상을 찾아본다. 이 불상이 자리한 곳은 부여박물관 담을 끼고 산으로 오르는 길에 자리한 조왕사 사찰이다.
 

[조왕사]

 
조왕사(朝王寺)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며, 유물로는 석불좌상과 석탑이 전한다. 금성산의 서쪽 자락인 국립부여박물관 뒤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곳이 사찰 터로 발견된 것은 1913년 이곳서 석불좌상을 발굴하면서 이라 한다. 그리고 1919년법당을 지어 발굴된 석불좌상을 봉안하고, 그 뒤 승려 정두영이 건물을 중수하고 사찰 이름을 ‘조왕사’라고 하였다 한다.
 

[충남 유형문화재 금성산 석불좌상]

 

사찰에 자리한 석불비로자나불상은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높이 1.27m, 대좌 높이 0.96m이라 한다. 1913년 절 뒤편 금성산 남쪽 기슭의 폐사지에 매몰되어 있던 것으로, 불상의 얼굴은 둥근 방형에 살이 많이 오른 상호이다. 두부의 검게 칠을 입힌 육계와 나발은 근래에 다시 보수한 것이라 한다. 눈의 눈두덩의 경계가 분명하며, 코는 길게 내리뻗고, 인중은 아래위를 살짝 눌러 우묵하다.  늘어진 귀에  삼도는 생략되고, 체구는 얼굴에 비해 다소 작은 편으로, 결가부좌한 다리와 어깨 너비가 거의 같아 보인다. 수인은 지권인에, 성글게 새겨 넣은 옷자락 무늬의 표현이 빈약한 느낌이다. 

대좌는 상 · 중 · 하대석이 모두 방형으로 각기 연꽃잎과 안상을 새겨 장식하고 있으며, 불상을 이전하는 도중 백제 양식을 보여 주는 금동불 입상 1구가 출토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이관된 바 있다고 한다.

 

 

이 사찰에 자리한 석탑은  1987년의 홍수 때 발견 된 석탑 부재를 수습하여 다시 쌓아 올린 것으로, 원래의 모습이라고 보기 어려운데, 조성 시기도 알 수 없다고 한다. 다만 석불좌상이 고려시대 양식인 점으로 미루어 석불과 같은 시대의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여는 청동기문화시절부터 이마 인간이 정착하여 살기  좋은 환경이었던 것을 알 게 된다. 좋다고 생각하는 자리에 무언가 옛 사람들의 흔적을 볼 수 있다는 것에, 삶의 편함에 대한 추구는 시대에 따라 다르지 않음을 알게되며 집으로 향한다. 

 

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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