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이백 스물 여덟번째 - 옥천

세종해피뉴스 2026. 4. 15. 23:29

옥천으로 봄 벛꽃 길을 찾아 나선다. 옥천의 보물인 이지당과 영암사 동서 삼층석탑은 일전에 다녀와 오늘은 단풍 구경삼아  길을 나서는 것이다.  금강휴게소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나 청성면으로 향하면서 예전의 경부고속도의 한적한 길도 밟아본다. 금강의 한 지류인 보청천을 따라 청성면으로 향하는 강변길의 강가운데 자리한  정자가 보인다. 보리섬이라고도 불리는 강 중간에 돌출한 이섬에는 보이는 정자는 상춘정이라 불린다. 이곳은 길가에서 바라보는 데크길은 잘 정비 되어 있으나, 상춘정이 보이는 길가에는 전용 주차장이 없어, 산계리 마을 입구 공터나 국도변 갓길에 주차 후 도보로 진입해야 한다.

 

[상춘정]

 

노란 개나리 꽃밭 위에 자리한 상춘정은 보청천 한가운데 솟은 석회암 으로된 섬 위에 1970년대 건립된 정자라고 한다. 이곳은 일출 및 물안개 사진 촬영 명소라고 하며,  겨울철에는  은하수 출사지로도 유명한 곳이라 한다. 며칠사이에 내린 비로 인하여 보는 물색이 누런 색이라 정자의 물위의 반영을 볼 수 없음이 옥의 티라고 느껴진다.

 

 

탁한 물로 물에 비치는 반영이 없어 좋은 이미지를 얻지는 못하였으나 녹색을 띄는 물버드나무와 노란 개나리가 만들어내는 경치에 만족하며, 벛꽃이 만발한 길을 따라 청성면으로 향한다.

 

 

청성 강가의 공터에 차를 대고 잘 정비 된 강변길을 따라 벛꽃길을 산책하며 벛꽃 길의 풍광을 즐겨본다.  이곳 청성면으로 들어오는 다리에 들어서기 전에 본 옥천지재의 안내문이 궁금하여 길을 잡는다.

 

[충북 문화유산 자료 옥천 지재]

 

길에서도 보이는 언덕위의  자리에 위치한 옥천 지재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 김옥정 선생이 후학을 교육하던 서당이라고 전한다. ‘지재’라는 명칭은 미호 김원행 선생이 배산인 구지봉에서 구자를 빼며 지재(止齋)라고 하였다 한다. 지재 건물의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서당 입구에는 초창기 조성 된 연못이 있으며, 현재는 금릉김씨 종중의 재실로 쓰인다 하는데, 이 날 문중사람들이 여럿 모여 있다.

 

 [옥천 지재 모습 : 문화재청 자료]

 

많은 이와 마당에 가득찬 차량으로 오랜시간의 지체가 멋적어 다소간의 담소 후 차를 돌려 자리를 비운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유형문화유산 경율당을 찾아본다. 

 

[충북 유형 문화유산 옥천 경율당]

 

카다란 소나무와 어울리게 자리한  경율당은 조선 영조 12년에 용궁 전씨 전후회가 지은 것으로, 율곡 선생의 학덕을 흠모 호를 경율, 서당 이름도 경율당이라 하였다고 한다. 후손들의 학문 연수와 인격 수양의 장소로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된 곳으로, 앞면 4칸·옆면 2칸으로, 팔작지붕, 4면 모두 마루가 있는 서당의 구조형식이다. 지붕 마루 끝에 있는 기와에 ‘옹정30년을유’라는 글로, 1730년대의 건물임을 알 수 있고, 현재는 해마다 전씨 문중의 제사를 지내는데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충북 유형문화유산 경율당]

 

입구에 노란선을 둘러져 입실이 금지 되어 있다. 그 이유로는 입구가 붕괴사고가 있을 듯하여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 툇마루에서 금강을 바라보는 호사스러움을 느껴 보지 못한다.

 

[경율당]

 

건물 높이 올라보니 금강이 눈에 든다. 글 읽던 학동과 같은 높이에서 강을 보며, 나와같이 공부하다 먼산을 보며 딴 생각을 했을 서당의 학동의 보습을  그려본다. 이 곳을 돌아나뫄 옥천의 학자 조헌 선생의 묘를 찾아본다.

 

[충청 유형문화재 옥천 조헌 신도비]

 

묘소 입구에는 선생의 일대기가 기록된 조헌 신도비가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 비에는 선생의 이 같은 생애와 최후 격전지였던 금산 싸움에 대하여 자세히 적고 있으며, 인조 27년(1649)에 세운 비로, 좌의정 김상헌이 글을 짓고, 이조판서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충북 유형 문화유산 옥천 조헌 신도비]

 

신도비는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이라 히는데, 이 비는 조선 중기 문신인 중봉 조헌(1544∼1592) 선생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조헌은 성균관에 입학 2년 후인 1567년 병과에 급제하고, 그후 호조좌랑·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 전라도도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옥천군 안읍 밤티에서 제자양성과 학문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조헌 의병장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1,600여명을 모아 청주성을 수복하나, 충청도순찰사의 방해로 해산 당하여, 불과 700여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 고바야가와의 왜군과 전투를 벌이다 칠백의병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한다. 금산의 칠백의 총을 방문시 의승장 영규대사와 함께 그 의 업적을 알아 본 일이 있는 분이며, 조헌의 교지와 유필이 보물 제 1007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 있는 곳 바로 위에 묘소와 표충사가 자리하고 있다.

 

[표충사]

 

[ 표충사]

 

내부에는 조헌 선생의 초상화와 제향 공간이 자리한다.

 

[영모재]

 

[충북 문화유산 자료 옥천 영모제]

 
묘소를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재실로 대청의 상량문에 따르면 순조12년에 건립되고,  2011년 해체보수하였다 한다. 앞면 5칸 옆면 2칸 반 크기로 팔작지붕의 기와집이다.
원래는 산지기의 기거 용도로 지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건물의 초창기는 알 수 없으나,  상량문으로 보아 1812년 창건하고, 1970년에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평면구성은 부엌, 안방, 윗방, 대청, 건넌방으로 되어 있고, 방 전면에 툇마루를 둔 중부지역의 전형적인 민가 형태라 한다.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있으며, 건축부재, 건축구조, 마루청판, 고미반자, 축조기술 등이 종합적으로 볼 때 보존할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한다.
 

 

찾아 오르지 못한 계단위에 조헌 선생의 묘소가 자리한다.

  

[충북 기념물 옥천 조헌 묘소]

 

 의병장인 중봉(重峰) 조헌(1544∼1592) 선생의 묘소이다. 선생의 유해는 별도로 옥천군 도리동에 안장하다가, 인조 14년(1636)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현재 묘역에는 묘비 2기가 있는데,  하나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곳으로 이장 할 당시 선생의 공적을 기록한 것이고, 좌우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한 쌍씩 세워져 있다.  

여행 시 곳곳에서 접하는 임진왜란에 기인 한 폐해에서 느끼는 욕 나오는 심정을 억누르고 묘소를 벗어나, 벛꽃을 따라 소정리길도 달려보고, 대청호로 향한다. 

 

[청풍정]

 

충주호로 깊이 달려들어와 멀리 보이는 청풍정은 조선 말엽 김옥균이 기생명월과 함께 소일하며 지내던 곳이라 하며, 기생명월이 국가를 개혁할 인물인 김옥균이 외진 곳에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장부의 큰 뜻을 펴길 바라며 절벽아래로 몸을 던졌다는 애뜻한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라 한다. 고여 있는 충주호가 생기기 이전에는 아래를 흐르는 강을 내려다 보는 절벽 언덕에 세워졌던 정자인 것을 상상해 보며 다가가 본다

 

[청풍정]

 

[청풍정]

 

석호리 백토산 아래의 정자로  건립연대는 알수 없다고 하나, 조선 후기에 참봉 김종경이 세운 정자로 전한다. 멋진 경관의 군복 8경중 5경이라 하며, 1980년 대청호 건설로 호수에 잠기기 전  금강물이 흐르다 절벽에 부딛혀 소를 이루고 주변에 버드나무가 10여리 곧게 벋은 경치를 가진 천하 절경이었다고 한다.

 

 

이 정자 뒷편에 모습을 드러낸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호수를 두루며 자리한다. 가벼이 떠난 여행 길에서  만나게 되는 절경과 어울어진 정자와 문화재로 인해 기쁨이 배가 된다. 눈을 즐겹게 하여준 활짝핀 벛꽃과 다양한 경관의 그 속에  자리한 정자로 충만한  만족감을 채우고 집으로 향한다.

 

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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