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이백 열아홉번째 -밀양

세종해피뉴스 2026. 1. 6. 22:35

밀양으로 길을 잡는다. 밀양 하면 표충사 와 얼음골이 먼저 떠 오르나, 우선 이번 보물을 찾는 여행은 국보이며 밀양의 자랑인 영남루를 찾아본다. 주차장에서 오르는 주변에는 박시춘 엣 집터와 밀양읍성 그리고 밀양이 배출한 사명대사의 동상이 자리한다. 눈앞에 탁트인 넒은 마당에서 바라 본 영남루 전체의 모습은  남쪽의 햇살로 그 실루엣 이 보인다.  이곳 밀양의 영남루는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한국의 3대 누각이라 불리는데 밀양강의 언덕에 자리한 이어진 건물의 누각 위용이 눈을 잡는다.

 

[ 국보 영남루 ]

 

보물 제 147호 에서 2023년 에 국보로 지정 된 영남루는 대루, 능파각, 침류각, 여수각 4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영남루는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이후 중창 및 중수가 거듭된다. 1844년 밀양부사 이인재가 당시 대루의 규모를 확장하며, 동서에 능파각과 침류각을 배치하고, 대루와 침류각을 연결하는 여수각(如水閣, 층층각)을 설치하여 현재의 모습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때 많은 부속건물과 함께 밀주관이라 불리며, 관원들과 지방 빈객들을 접대하고 유숙시키는 객사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국보  밀양 영남루의 대루]

 

중앙에 자리한 대루는 통일신라 법흥왕때 영남사(嶺南寺)라는 절의 금벽루 혹은 소루, 죽루라는 작은 누각으로 시작, 이후 고려 때 절이 폐사되고 누각만 남아 있던 것을 1365년(공민왕 14)에 밀양군수 김주가 중창하고 영남루라 한 것이 관영 누각으로서의 시작이라고 한다. 대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 장방형 평면의 대형 목조 2층 누각으로 7량가 구조이며, 팔작지붕에 부연을 사용한 겹처마에 처마 끝에는 막새를 달고 있다.  내부는 통칸에 우물마루 바닥에,  4면을 돌아가면서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평소 마루에 오르는 인원이 제한 되어 있으나 오늘은 한산하다. 

 

[연남루 현판]

 

영남루의 북쪽 처마에는 세 개의 대형 편액이 눈에 띈다. 중앙의 '영남루'는 조윤형의 글이고, ‘강좌웅부’와 ‘교남명루’는 이유원이 쓴 글이라 한다. 마루에 올라보면 대루 안에 여러 현인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느낀 감흥을 나타낸 시판이 보인다. 조선 선조 때는 영남루에 걸린 시판은 이미 300여 개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12개의 시판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 내용을 잘 알 수 없어 선인들이 글을 남긴 글을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영남루의 능파각] 

 

1442년 밀양부사 김영추가  망호당을 지어 빈객숙소로 제공하다가, 1542년에는 부사 박세후가 망호당을 대루의 동쪽으로 옮기면서 능파각이라 불렀다 한다. 능파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5량가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대루의 우물마루와 바닥이 통한다. 

 

[침류각과 여수각]

 

침류각은  영남루의 서쪽 부속 건물로, 본채와 계단식 통로(달월자형 월랑)인 여수각으로 연결된 독특한 구조를 가지며, 숙소 기능을 했던 정면 3칸 측면 2칸의 5량가 겹치마 팔작지붕 건물이라 한다. 

 

 [ 영남루의 옆면]

 

남쪽에서 들어오는 햇살을 거슬러  밀양강과 시내를 바라볼 수 있다.

 

[경남 문화재 자료 아랑각]

 

강을 향하여 내려가면 아랑각이 자리한다. 아랑전설은  명종 때 밀양부사의 딸 아랑이 자신을 욕보이려던 통인 백가에게 항거하다 죽임을 당해 대숲에 버려진 후,  신임 부사가 부임 첫날밤에 죽게 되는 변이 발생한다. 이상사란 자가 밀양부사를 자원하여  아랑의 원혼에게서 억울한 사연을 듣고, 통인을 잡아 처형하고 아랑의 시신을 찾아 장사 지내니, 그 뒤로는 원혼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지금도 매년 음력 4월 16일에 제사를 지내고 , 이곳과 표충사(表忠祠)·아랑각(阿娘閣)·천진궁 등에서 매년 5월 16~20일에 밀양아랑제가 열린다고 한다. 영남루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천진궁을 관람한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밀양 천진궁]

 

효종때에 지어 공진관이라도 부르다. 영조 15년에 불탄 것을 영조 25년(1749)에 다시 지어, 헌종 10년(1844)에 크게 수리하였다고 한다. 1952년 단군봉안회가 생기면서 단군 및 삼국의 시조왕, 고려 태조(재위 918∼943)의 위패를 모시면서 대덕전이라 하다가, 1957년에 천진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1층이고,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자  팔작지붕에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기단은 낮은 2기단으로 앞면에만 문이 있고, 나머지 3면은 벽으로 되어있다.

 

 [ 단군을 모신 내부 모습]

 

 [무봉사]

 

무봉사에 있는 보물을 찾아, 대숲을 지나며 밀양강 언덕 영남루 우측의  아동산 절벽 으로 올라선다. 규모는 작으나 역사가 오래되어 밀양 대표 사찰 표충사, 만어사와 함께 밀양 3대 고찰로 알려지고 있다.

이곳 무봉사 는 보물 석조여래 좌상 이 있는 유서 깊은 사찰로,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전 봄날이 아닌데도, 태극 나바 문양 나비들이 아동산 일대를 뒤덮어 나라에 좋은 일이 일어날 징조라 생각하고, 이후 나라에 경사스러운 징조가 생길때  태극 나비가 날아든다는  전설이 있는 사찰이다. 무봉사는 통일 신라시대 혜공왕 9년에 법조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며, 영남루의 전신인 영남사 절의 부속 암자로 지었던 절이라고 전해진다고 한다.

 

 [무봉서 대웅전]

 

773년(혜공왕 9)에 법조대사가 영남사의 부속 암자로 무봉사를 추가 건립한 것으로, 고려 말기인 1359년(공민왕 8년) 화재로 영남사가 소실되었고, 이에 영남사를 복원하는 대신 부속 암자였던 무봉사를 승격하였다 한다.

 

 [보물 제 493호 밀양 부봉사 석조여래좌상]

 

무봉사의 대웅전에 모셔진 높이 0.97m의 불상으로, 결가부좌 자세에 목에 신라 특유의 삼도가 뚜렷하며, 법의는 통견의로, 네모진 얼굴에 다소 평판적이나 단아한 모습이다. 광배는 2줄 선으로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하고, 그 안에 덩굴무늬와 연꽃무늬를 새기고,  광배의 바깥부분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광배의 앞면에 5구의 작은 부처를 새기고, 뒷면에는 드물게 연꽃무늬 대좌 위에 앉아 있는 약사여래를 조각되어 있다고 하는데, 뒷면의 약사여래를 사진으로 라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무봉사 석조 약사 여래 좌상 

 

희미하지만 왼손에는 약병을 들고, 오른손은 항마촉지인 수인을 하고 있는 약사여래불이라하는데 마모가 심하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본존불인 석조여래좌상보다 먼저 이곳 무봉사에 봉안되어 있다가 영남사가 소실되자 부처님을 이운해 오면서, 야외로 옮겨 관리가 허술해 지고 조선시대의 억불 숭유 정책으로 훼불할 목적과 부처님 코에  자손이 생긴다는 소문으로 훼손되어 특히 얼굴부분이 많이 소실되어 아쉬움을 가진다.

 

[ 사명 대사 동상]

 

 무봉사를 나서며 공원을 오르면 사명대사의 동상이 자리한다. 조선 중기에  밀양출신으로 임진왜란에 의승병을 모아 참전하고, 왜장 가토기요마사와 휴전 협상을 하기도 하며, 전쟁이 끝나고 국왕의 친서를 갖고 일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를 맺고 전란에 잡혀간 조선인 3000여명을 인솔 하여 귀국한 사명대사의 동상은, 대사의 국난극복 의지와 애민,애국정신을 기려 밀양 시민이 뜻을 모아 1971년에 건립한 것이라 한다.

 

 [밀양 최초 상수도 배수지]

 

공원에 배수지라는 건축물이 보인다. 1933년 부터 상문 수원지에서 정수된 물을 받아 밀양 내일동 관아 인근 지역에 수돗물을 공급했던 역사적인 장소라한다.

오랜만에 찾은 밀양에서 다시 찾아보는 문화재들이 갈끔하고 잘 관리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며, 또 다른 이곳의 독특한 보물을 찾아 길을 나선다.

 

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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