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이백 열여섯번째 - 여주 2

세종해피뉴스 2025. 12. 16. 20:55

신륵사 경내에서 나와 강변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곳에 자리한 보물들을 찾아 나서는 길이다. 보물이 자리한 강변에는 여느 사찰에서나 한그루 쯤  키우는 은행나무도 보인다.

 

 [조사당 앞의 향나무와 강변의 은행나무]

 

이곳의 보호수인 향나무, 은행나무등이 사찰의 품위를 높이고 있다. 보물인 전탑이 올려다 보이며 발길을 옮긴다.

 

[보물재 226호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커다란 위용을 드러낸 이 탑은 흙을 구운 벽돌로 쌓은 전탑으로,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만 몇기가 남아 있는 탑형식이다.  기단을 2단으로 하고, 그 위 3단의 계단을 쌓은 다음 여러 층의 탑신이 올려저 있다. 전탑의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이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고,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아 7층같아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은 것이 독특하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라 한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은 얇다. 

탑의 북쪽의  수리할 때 세운 비에,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이라는 연대 기록으로, 조선 영조 2년(1726)에 나오지만,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으로 보며, 지금 탑의 형태도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한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고려 전기 제작으로 보는데,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고 한다.

탑을 내려다 볼수 있는 뒤편에 또 다른 보물이 자리한 비각으로 다가가 본다. 

 

 [대장각기비]

 

 [보물 제 229호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

 

이 비는 대장각(불경을 만들어 보관하던 곳)의 조성에 관한 기록을 적고 있는 비로,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에,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워 비몸을 지탱하고 있는 모습이다.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보이는 현상이라 주목되는 부분이라 한다. 권주의 글씨로 새겨진 비문은 비몸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가 없으나, 비문의 뒷면에는 불경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고 한다.  세운 시기는 고려 우왕 9년(1383)이며, 거북 모양의 비받침, 용의 머리가 새겨진 비머리가 고려 후기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간략화되는 예라고 한다.

  

 

강변 암반위의 탑과 정자 앞에서 강을 보며 물멍을 때리며 맘과 몸을 안정시키며 쉬어 가본다.

 

 

무슨 사연으로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지 궁금해 하던 탑이다.

 

 [경기도 문화유산자료 여주신륵사삼층석탑]

 

강언덕의 바위 위에 자리한 모습이 어울리다는 생각을 같게 하는 삼층석탑은, 단층 기단에 평면 방형의 3층 석탑으로, 기단은 1매의 석재로 조성되고, 각 면에는 양 우주와 탱주를 모각했다. 갑석 역시 1매의 석재로, 각 면 3구씩 그리고 모서리에 1구씩, 모두 복엽 16판의 복련이 표현되어 있다. 중앙에는 낮고 높은 각형 2단의 받침에 탑신부를 놓고,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1석으로 조성되었다. 현재 3층 탑신석은 결실되었고, 옥개석은 3층 모두 남아 있으나 상륜부는 모두 결실된 모습이다. 

신륵사동대탑수리비 기록으로 나옹스님을 장례 한 장소가 전탑과 삼층석탑이 있는 지역이라는데, 수습 된 사리로는 부도를 조성하고, 화장한 이 장소에 탑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어, 일종의 기념탑으로, 여강의 지세를 바로잡기 위한 비보탑의 성격을 갖는 고려 후기 석탑이라고 본다고 한다.  

 

신륵사의 탐방을 끝내며 걸어 나오며 사색 중에 또 다른 이 곳의 보물이 생각나서, 찾아보고 싶어져 여주 대교 건너편의 영월공원으로 향한다.

 

 

영월공원에 자리한 2개의 보물을 스쳐지나, 여주 팔경중의 하나인 마암을 찾아본다. 공원을 가로 질러 강에 이르는 곳에서 강가의  바위들로 이루어진  강 절벽길을 따라 걸음을 옯기면, 위로 올려다 보는 위치에 마암이라 새겨진 바위를 만난다.

옛 여주 지명인 황여현은, 이곳 바위아래 강물에서 황룡마와 여룡마가 출현하여 붙여진 유래가 있으며, 명성황후의 성씨인 여흥 민씨의 시조가 마암 바위구멍에서 탄생하였다는 설화도 있는 곳이라 한다.

 

[마암]

 

이곳을 되돌아 나와 산책길 을 따라 오르면, 강을 굽어보는 위치에 자리한 영월루 가 지리한다.

 

 [경기 문화유산자료 영월루] 

 

소개 글에, 원래는 군청의 정문이며, 18세기말 건물로 추정하는데, 1925년 군청을 옯기면서 이 자리로 옮겨 온 2층 누각으로, 앞면이 3칸, 옆면이 2칸의 팔작지붕인 루이다. 이 곳은 강을 내려다 보는 정상이어서 인지 둘러보는 경치가 편하여 머물러 쉬기에 적합한 듯하다. 공원 입구로 길을 내려오면서, 잘 보전관리 되고 있는 보물로 지정 된 2개의 탑으로 향한다.

 

[보물 제 92호 여주 하리 삼층석탑]

 

원래는 하리지역의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58년 창리의 3층석탑과 함께 현재의 터로 옮긴 것으로, 1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의 삼층석탑이다. 기단은 4면 모서리에 기둥을 새기고, 1층 몸돌을 괴는 2단의 테두리가 있으며, 몸돌의 각 면 모서리에 기둥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 밑면 받침은 4단이며, 처마는 약하게 솟아있다. 조각수법으로  조성시기를 고려중기로 본다고 한다. 탑을 옮길 당시, 1층 몸돌 윗면 중앙에서 발견 된 사리홈의 모양은 높이 3㎝의 얇은 띠가 둘러져 있고, 그 안으로 2개의 구멍을 판 형상이며, 이와 닿게 되는 지붕돌의 밑면에도 이를 배려한 듯 홈이 깊게 파여져 있다고 한다. 몸돌의 윗면에만 깊은 홈을 두어 사리를 담아두는 일반적인 모습이 아닌, 그 정반대의 특이한 형태라고 한다.

 

 [보물  제 91호 여주 창리 삼층석탑]

 

하리의 탑과는 다른 모습의 이 탑은 창리지역 과수원 안의 옛 절터의 것을 옮긴 것으로,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나, 그 느낌이 독특하다. 아래기단의 4면에는 2개식의 안상은 움푹한 무늬의 바닥선이 꽃모양처럼 솟아 있고, 기단의 맨윗돌은  드믈게 엎드린 연꽃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도 독특한 수법으로, 1층의 몸돌만 하나의 돌이고, 이후 지붕돌부터는 윗층의 몸돌과 하나로 이루어져 있어, 마치 모자 형태의 돌 3개를 얹어 놓은 듯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3단, 추녀는 매우 두껍고 귀퉁이 끝의 들림도 희미하다. 고려중기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

 

 

스쳐 지나며 보면 그저 돌탑으로 생각되어 지는 두탑을 보며, 오늘 신륵사에서 본 전탑과 삼층석탑을 바교하며 함께 떠올려 본다. 안내글을 통해 얻은 탑의 시대적 배경과 각 탑이 갖는 사연과 독특한 모습 등에 대한 내용을 알고 보니, 각탑의 다양성을 알아가는 재미를 더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저마다 그 시대와 그 장소에 필요하여 만들어 졌을 것이고, 각기 다른 모습의 탑의 조성은 그때의 사연과 엽원을 담고 자기 만족을 위한 산물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인간이 짧은 순간을 살다 가면서, 그래도 오랜 세월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것이 석재물이구나 하는 생각과 그래서 인간은 묘비,기념비를 세우나 보다 라는 생각을 뒤로 집으로 길을 잡는다. 

 
유광하 기자
 

如一同行 이백 열여섯번째 - 여주 2

신륵사 경내에서 나와 강변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곳에 자리한 보물들을 찾아 나서는 길이다. 보물이 자리한 강변에는 여느 사찰에서나 한그루 쯤 키우는 은행나무도 보인다.[조사당 앞의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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