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이백 열일곱번째 - 예산

세종해피뉴스 2025. 12. 23. 19:47

김정희 생가, 수당고택, 상항리 불상

 

 
예산을 찾아본다.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는 조선 후기 학자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그의 출생지와 묘소가 있는 추사고택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추사는 글과 그림 글씨가 독창적이며 이 분야 뛰어난 업적을 남긴 학자이자 예술가이며, 그의 문하에 3천의 선비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추사의 옛집을 비롯하여 화순옹주와 남편인 김한신의 합장무덤이 있고, 그 옆으로 정조가 내린 열녀정문, 백송(천연기념물 제106호), 김정희의 무덤이 있다.
 

김정희은 북학파인 박제가의 제자로, 24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가서 고증학과 금석학·서체 등을 배우고, 순조 16년에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한, 실사주시에 입각한 학문을 연구 한 분이라 한다. 헌종 6년에 윤상도 옥사사건에 연루, 제주도에 9년간 유배생활 중에 연구하였던 추사체를 완성하고, 유배생활에서 돌아와 아버지 무덤이 있는 과천에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한다.

 

[추사고택]

 

추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으로,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대왕의 사위가 되며 예산과 서울에 저택을 하사 받는데, 예산의 집은 53칸 규모로 충청도 53개 군현에서 한칸씩 건립비용을 부담하여 지었다고 한다. 지금의 모습은 1976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며, 일부만 복원한 것이라 한다. 이곳 예산은 조상의 터전이 어서, 김정희는 성묘과 독서를 위해 자주 왕래하며 머물렀다고 한다. 

서울의 저택은 월성위궁으로 김정희가 관직 활동을 할때 지내던 곳이라 한다. 고택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눈에 든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김정희선생고택 사랑채]
 
안채와 사랑채 2동짜리 건물로 조선 영조의 사위이자 김정희의 증조부인 김한신에 의해 지어진 집으로, 건물 전체가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는 서쪽에 있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낮은 동쪽에 따로 있다. 남자주인이 손님을 맞이하던 생활공간인 사랑채는 'ㄱ'자 남향집으로 온돌방이 남쪽에 한칸, 동쪽에 두칸 있으며,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대청쪽으로 난 문은 모두 들어열개문으로 위로 활짝여는 개방적인 문이다.  각방의 앞면에는 툇마루가 있어 통로로 이용된다. 고택에 있던 김정희 장서는 수만권이었는데 1910년 화재로 불타버렸다 한다.

 

[해시계]

 

사랑채 앞에 자리잡고 서 있는 입석은 안내글을 통해 해시계 임을 알게 된다. 추사선생께서 직접 제작하였다는 돌기둥 해시계는 남북방향으로 자리하며, 앞면에 새겨진 '석년'이라는 글씨는 선생의 아들 김상우가 추사체로 써서 새긴 것이라 한다.

 

[안채]

 

안채는 가운데의 안마당을 중심으로 사방이 막힌 'ㅁ'자형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대청은 동쪽을 향하고 안방과 그 부속공간들은 북쪽을 차지하고 있다. 안채는 'ㅁ'자 형으로 6칸 대청에 안방, 건너방, 부엌 광등을 갖추고 있다. 특이한 것은 안채내의 부엌은 난방용으로만 쓰이고 요리를 위한 부엌을 따로 둔 점으로, 이는 왕실주택구조로서  왕실사람인 화순 옹주가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라 한다.

 

[안채]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지형의 높낮이가 생긴 곳은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층을 지게 처리되어 있다.

 

[영당]

 

안채의 뒤편에는 선생이 떠난 후 아들 김상우가 세운 영당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 영당]

 

영당의 건립은 추사의 평생의 벗 권돈인이 도우며, 추사체로 추사영실이라는 현판을 쓰고,  초상화는 추사의 제자 이한철이 대례복을 입은 모습을 그리고, 이 에 권돈인이 초상화에 찬문을 쓰며, 김정희 를 추모하는 여덟 수의 시를 지어 아들인 김상무에게 주었다는데,  초상화의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현판의 원본은 간송미술관에 있다고 한다.  추사고택을 나서서 인근에 자리한 화순옹주의 홍문을 찾아본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화순옹주홍문]
 
홍문은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는 열녀문으로, 화순옹주는 추사 김정희의 증조할머니이자 영조의 둘째딸로, 남편 김한신이 38세에 세상을 떠나자 영조의 만류에도,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남편에 대한 옹주의 정절을 칭찬하면서도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은 아쉬움 때문에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고, 지금의 열녀문은 훗날 정조가 내린 것이라 한다.

김정희 유적지 안에 위치하고 있는데, 묘막터는 원래 53칸의 건물이었는데, 불에 타서 없어지고 주춧돌만 남아있다. 앞면 8칸·옆면 1칸 규모이며 근래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홍문 외에 옹주와 김한신의 합장묘· 김정희 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송이 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보기 쉽지 않은 백송을 찾아본다.

 

[천연기념물 예산 용궁리 백송]
 
백송은 나무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져서 흰빛이 되므로 백송 또는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한다. 수령은  약 200살 정도로 추정되며,  줄기가 밑에서 세 갈래인데, 두 가지는 죽고 한 가지만 남아 빈약한 모습이다. 이 나무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조선 순조 9년에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서  청나라 연경에 다녀올 때 종자를 필통에 가져와, 고조부 김흥경의 묘 옆에 심었던 것이라고 전해진다. 김정희 선생의 서울 본가에도 영조가 내려 주신 백송이 있어서 백송은 김정희 선생 일가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고 한다.

유적지를 떠나 수당 이남규 선생의 고택과 상항리 석불을 찾아 자리를 옮긴다.

 

[수당 이남규 선생고택 입구]

 

구한말의 열사인 수당 이남규 선생의 본가 입구의 커다란 고묵이 두팔을 벌려 방문을 맞이하고 있다. 

 

[국가민속문화유산  예산 수당고택 안채]

 

수당고택은 아계 이산해의 손자 이구의 부인 전주이씨가 아계의 묘소 근처인 현재의 장소에 1637년 창건하고, 1846년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사랑채와 안채의 배치 및 평면구성에서 이 지역 반가의 특징이며, 한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수당 이남규(1855-1907) 등 4대 충절인물을 배출한 곳이라 한다.
안채는 다소 늦은 시간의 방문으로 문이 닿여 있어 사랑채 건물만 볼 수 있다.

 

[ 사랑채]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에 툇마루 등이 있으며, 남향집으로 'ㅡ' 자형의 건물이며, 이곳에서 생활하던 수당 이남규는 갑오개혁과 을미사변때 옳지 않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고, 1906년 병오의병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전국에서 봉기한 을사의병의 다른 이름)때 홍주의병장 민종식과 의병을 숨겨주어, 1907년 공주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온양 평촌 냇가에서 순국 하신 애국열사라 한다.

 

 [안채]

 

문화유산청 자료

 

 조금 늦은 시간의 도착으로 고택의 안채는 문이 걸려 내부를 확인 못하였으나 '튼ㅁ'자영의 안채가 있으며, 모두 5량의 굴조리집으로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라 한다.  안채는 좌측끝은 맞배지붕이고, 대청 전면만은 빗물이 들이 치지 않도록 겹치마라 한다.

아쉬움을 달래려 상항리의 석불을 찾아 나선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예산상항리석불]
 
석불은 수당 고택에서 모습이 보이는 댐 밑에 자리한, 타원형의 평평한 하나의 돌에 새긴  마애불과 비슷한 형식의 불상으로, 본래는 방산저수지의 수몰지역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 한다. 불상의 상체와 주변 연꽃은 양각으로 새기고, 하체는 선을  음각으로 단순 표현하고 있다.  양 발을 무릎 위에 올리고 발바닥이 하늘을 향한 앉아 있는 모습이며, 광배는 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머리광배 좌우에 각각 4구씩 작은 부처를 새기고, 몸광배에는 꽃과 잎이 큼직한 연꽃 줄기를 두드러지게 나타냈다.  고려시대 지방화 된 불상이라 한다.

 

추사 체험장과 박물관등 다양한 볼거리가 자리한 이 곳에서 예술혼을 물려 받지는 못하였으나, 추사의 삶의 흔적을 찾아보고, 수당고택에서 먹먹해지는 기분을 느기며, 이전 보다 빨리  찾아오는 어둠을 느끼며, 해를 등지고 예산을 벗어나 집으로 향한다.

 

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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