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이백 열다섯번째 - 여주

세종해피뉴스 2025. 12. 9. 23:55

- 신륵사

 

여주의 신륵사를 찾아 나선다. 남한강을 굽어 보고 자리한 신륵사를 찾아보니, 강바람에 느끼는 찬공기를 통해 겨울로 가는 길목의 강변과 주변 풍광이 스산하고 한적하게 느껴진다. 많은 보물을 지닌 사찰에 간만의 방문으로 설레는 맘이 앞선다. 이전과 달리 문화재 관람료가 징수되지 않고, 주차시설도 잘 되어 있어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간다. 일주문과 불이문을 지난다. 잘 정돈 된 사찰을 대하며 이전의 모습을 떠울려 본다. 봉미산 기슭에 자리하는 신륵사는 원래 신라시대에 지었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은데, 고려 후기에 나옹선사가 이 곳에서 입적하자 이후 크게 중창되었으며,  조선 초기 세종 영릉의 원찰로 지정되고,  이후에도 중수가 계속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고 한다.

 

[ 신륵사 전경]. 

 

신륵사(神勒寺)라는 명칭은 신(神)비한 힘으로 굴레를 씌워 용마를 제압했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고승 나옹화상이 신비한 굴레로 남한강의 용마(龍馬)를 제압하여, '신통력의 신(神)'과 '제압했다는 륵(勒)'을 합쳐 '신륵사'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구룡루를 통해 내부로 들어서며 다층석탑과 극락보전을 접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신륵사 극락보전]

 

극락보전은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불전으로, 고려 말 나옹 선사 혜근스님이 1376년에 이곳에서 돌아가신 후 왕실의 후원으로 크게 다시 지었는데, 임진왜란 후 수리되고, 1678년에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지금은 1797년부터 1800년까지 다시 수리한 것으로, 평지에 길게 화강암을 3단의 기단을, 그리고 주춧돌은 자연석에  둥근 기둥을 사용하고 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지붕의 네 모서리에는 기둥 4개를 설치하고, 다포 양식으로 규모는 작지만, 공포를 높고 화려하게 두어 지붕을 크게 만든 것이 특징인데 이는 왕실의 보호를 받고 왕릉을 지키는 역할 때문으로 본다. 

 내부에는 목조 아미타 여래 삼존상이 자리한다.

 

 [보물 제 1791호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주존인 불상은 좌상,  협시상을 입상으로 한 것은 고려시대 전통 구성이다.  상호와 상체가 긴 편에, 육계도 길게 조성되어 색다르게 느껴진다.  조성발원문 기록으로 조각승 인일(仁日)과 수천(守天)의 작품으로, 조선시대 1610년에 조성되었다 하며, 눈언저리의  음영 기법과 아래 입술을 도톰한 것이 특징적 표현이라 한다.  좌협시보살상은 천의식, 우협시보살상은 대의식으로 법의를 착용하고 있으며, 특징은  좌협시보살상의 양쪽 어깨 위의 머리카락의 표현법과 하반신 중앙에 화려한 장엄, 우협시보살상의 보발의 귀 밑 정리돈 표현법 등으로, 조성자와 조성시기가 분명하고 안일이라는 새로운 조각승의 이름을 알게 해준 작품이라 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 삼장보살도]

 

극락보전에 함 쪽 벽면에 자리한 커다랗고 오래되어 보이는 불화는 하늘, 땅, 지하세계를 주재하는 3보살을 그린 불화이다. 1758년(영조34) 수화승 각총과 20명의 화승이 참여조성한 불화로, 괘불도를 제외하고 현존하는 경기지역 불화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라고 한다. 수륙재(水陸齋; 물과 육지를 헤매는 영혼과 아귀를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종교의례)를 베풀 때 의식장소에 걸었다고 하며,  이 불화는 천상의 교주인 천장보살, 오른 쪽에 지상의 교주인 지지보살, 왼족엔 지하세계의 교주인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각 보살의 권속들이 둘러싼 모습으로 세 보살 모두 같은 높이의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있다.  

법당을 나서며 마당에 자리한 다층석탑을 접한다.

 

 [보물 제 225호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2단의 기단에 여러 층의 탑신을 세운것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석탑양식이며,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많은 장식 중에 각 면에새겨진 용무늬가 예전이나 오늘이나 나의 눈길을 잡고 있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의 받침은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는 치켜올려져 있는데,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며,  8층 탑신의 아래까지는  옛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이 고급스러워 보이게 하며, 전체적으로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과 돌의 재질, 조각양식이 비슷하다고 한다. 신륵사는 조선 성종 3년(14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 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 다층석탑 용무늬]

 

대리석에 새겨서인지 정교하고 섬세한 모양의 용모양을 볼 수 있다. 

 

 [보물 제180호  여주 신륵사 조사당]

 

발길을 극락보전 뒤로 옯기면, 자그마하며 단아한 모습을 가진, 사찰의 덕이 높은 승려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건물인 조사당이 자리한다. 조선 전기 예종 때 지은 것으로 보며, 낮은 기단 위에 앞면 1칸·옆면 2칸의 팔작지붕에 다포 양식의 모습이다. 앞면은 6짝의 문을 달아 모두 개방할 수 있게 하고, 옆면은 앞 1칸만 문을 달아 출입구가 있다. 조선 전기의 조각 수법으로, 규모는 작지만 균형이 잘 잡힌 아담한 건물이다.

 

 [경기도 문화유산자료 여주 신륵사 삼화상진영]

 

신륵사 조사당에는 불단 뒷벽 중앙에 지공을, 그 좌우에는 무학과 나옹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신륵사의 중요 인물인 나옹화상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주요한 작품이며, 현재 전국 사찰에 전하는 1,000여점의 진영 가운데 데 삼화상 진영은 매우 드물어 자료적으로 희귀하나, 조사들의 성품을 부각시키는 전신성이 약하고 제작연대도 불분명 하다고 한다.

 

[팔각원당형석조부도, 원구형 석조부도, 견륭삼십팔년명 동종]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여주신륵사팔각원당형석조부도]

조사당 왼쪽에 구릉에 있는 두 부도는 조사당 북쪽 구릉 너머에서 1966년 11월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이때 팔각원당형석조부도에서는  상대석 상면과 탑신석 하면에서 사리함이 발견 수습되었다고 한다. 이 부도는 연화문의 사각형의 지대석에  낮은 중대석을 올리고, 상대석은  큼직한 연화문을 장식, 상면에는 별도의 팔각홈을 마련하여 탑신석을 고정하며, 팔각의 탑신석에 2면은 자물쇠, 4면은 부도에서는 사천왕을 상징하는 범자가 새겨져 있고, 낙수면이 완만한 경사의 옥개석에는 굵은 마루부 끝에 귀꽃을 돌출시켜 장식하고, 상륜부는 원형의 복발석과 보주석을 올렸다. 조선 초기에 신륵사에서 머물다가 입적한 승려의 것으로 추정한다.

 

[경기도 문화유산자료 여주신륵사원구형석조부도]

 지대석 겸 하대석을 사각형으로 마련하고, 중대석은 모서리에 연주문 기둥을 세우고,  가운데 부분에 연주문을 가로로 배치하여 상하로 구분한 다음, 그 안에 안상을 표현한 모습이다. 상대석은 8엽의 연화문 장식을,  탑신석은 명문이나 문양이 없는 원구형 부재이며, 옥개석 하부에 받침을, 상부에는 기왓등과 마루부를 마련하고 그 끝에는 용 머리를 장식하였다. 상륜부는 복발석과 보주석이 간략하게 올려져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여주 신륵사 건륭삼십팔년명 동종]

조사당 안에 있는 종으로 중국 종의 양식이  반영된 작품으로, 쌍룡의 용뉴에 음통은 보이지 않는다. 하대 위의 종의 몸체에는  방형의 명문곽이 있으며, 새긴 명문으로 제작자인 ‘도편수 이만숙, 이영길, 이영산’ 은 같은 18세기 중엽  충청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이만돌의 계보라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종을 만든 장인이 건축 장인에서 쓰이는 도편수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라 한다. 

 

산위를 바라보며 조사당 뒤에서 오르는 계단 길을 따라 오른다.

 

 [ 나옹화상 탑]

 

조사당 뒤편으로 오르는 조성된 길을 따라 오르면 나용 선사의 사리탑이 탑비와 그리고 비 앞을 밝히는 석등이 함게 자리한다.

 

 [보물  제 228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석종은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 옆으로 계단을 두고 있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이,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가 있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운 것으로,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으로 밀양에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여, 그 제자들이 절 뒤에 이 탑을 세워 두었다 하는데, 고려 후기의 석종형 부도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라고 한다. 

 

[보물 제 229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보제존자 나옹의 탑비이다.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기고,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몸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글씨를 썼는데  필치는 해서체라 한다. 

 

[보물 제 231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크지는 않으나 모습이 눈길을 끄는 8각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은 표면 전체에 꽃무늬를 새겨 장식하고 있으며, 화사석은 각 면에 무지개 모양의 창을 낸 후, 나머지 공간에 비천상과 이무기를 조각했고, 지붕돌은 두꺼운듯 하나 치켜올림하고 있다. 고려 우왕 5년(1379) 보제존자석종 및 석비와 함께 세워진 작품으로, 연대를 알 수 있는 고려 후기의 대표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여러 보물을 접하고 이제는 사찰을 나와 강변으로 향한다. 이곳 강을 접한 돌 절벽에 자리한 이곳에서 만 볼 수 있는 모습을 찾아 나선다. 

 

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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