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이백 열두번째- 여주

세종해피뉴스 2025. 10. 28. 23:44

- 고달사지

사적지인 고달사지를 찾아 여주로 향한다.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세워진 고달사는 고려 광종 이후로  역대 왕들이 보호하던 사찰로 , 이 곳의 석조 문화유산들은 모두 고달이라는 석공이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절을 이루는 데에 혼을 바치고, 다 이루고 나서는 스스로 스님으로 도를 이루어 큰 스님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하는 곳이다. 발굴조사를 통해 금당터 등의 건물터는 넓은 넓게 형성되어 예전의 절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고달사지 사적]

 

대크길과 잘 가꾸어진 잔디밭 조성으로, 사지내의 문화유산을 둘러 보기 쉽고 , 무념의 마음으로 산보 겸으로 둘러보기 알맞은 장소와 거리라는 생각이 든다. 먼저 시야를 사로 잡는 탑비를 찾아본다.

 

[보물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가까이서 보니 탁 트인 공간이 무색할 정도로 커다란 탑비이다. 원종은 이름이 찬유로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 90세(승랍 69세)로 입적하는데, 고려 광종이 대사가 입적 후, 시호를 ‘원종’, 탑호를 ‘혜진’이라 내리고, 그 를 기리고, 살아 생전의 행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한다. 받침돌의 거북 머리모습과 발의 모습이 역동 적이고, 등에는 3중의 6각형 문양에, 소용돌이치는 구름 문양 위에 연꽃이 장식된 비좌를 가지고 있다. 머릿돌은 연꽃 받침대 위에 구름과 용을 새기고, 사각형 구획에 글자를 넣었다. 광종이 당대 최고의 문장가 김정언에게 비문을  짓게 하고, 국공(國工)을 파견하여 승탑과 한 쌍으로 조성한 것이라 한다. 1915년  비몸이 넘어지면서 여덟조각으로 깨어져, 이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해 오다가 현재는 여주박물관에서 소장 전시하고 있으며, 현재의 비문은 복제 하여 설치 한 것이라 한다. 조금 지나친 곳에 석조대좌가 자리 한다.

 

[보물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
 
석불대좌는 불상이 없이 자리하는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다. 받침돌은 위·중간·아래의 3단의 각기 다른 돌로 구성되고, 윗면은 불상이 놓여져 있던 곳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기고,  대좌는 사각형이며 큰 크기임에도, 유연하게 느겨지는 것은 연꽃 잎으로 둘러져 있기 때문인 듯하다. 이와 유사한 연꽃 무늬가 보이는, 절터의 고달사지 승탑이 고려 전기의 양식인 곳으로 보아, 대좌도 10세기 후반으로 본다고 한다.
부처님이 자리하지 않은 석조 대좌를 여러 사지에서 보게 되어, 그 연유에 대한 궁금증이 쌓여만 간다. 절터의 금당지에서는 통일 신라 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기단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여주 고달사지 석조]
 
공양을 준비하는 데 사용된 듯한 석조가 사지 아래 쪽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깊이가 깊지 않고 단순한 장방형에 내부가 완만한 곡선으로 파진 형태에 배수공을 가진 구조로, 표면을 다듬고 각 모서리의 모난 것을 죽이고, 세로줄의 홈을 내서 장식한 모습이며, 고려시대 제작인데도 아직 보물로 지정 되지는 않는 것도 의문이다.  이 석조는 존재만으로  고달사가 왕실의 후원을 받는 커다란 사찰이었슴을 알게 한다.
 

[ 거북 비 받침]

 

탑비 위에, 옆에 자리한 크기가 작은 탑비를 받치던 출처를 알 수 없는 다소 망실된 거북모양 받침대가 자리한다. 탑비 뒤의 산으로 들어서면 승탑과 탑이 조금 떨어진 거리에 따로 자리한다. 계단으로 정리 된 다소 경사진 언덕을 오르며 먼저 국보인 승탑을 찾아본다.

 

[국보 여주 고달사지 승탑]

 
웅장하면서도 조각이 정교한 높이 4.3m의 고려시대의 승탑은 바닥의 형태가 8각이고, 상·중·하대 세 부분의 기단은, 하대엔 내부에 꽃 형태의 무늬가 있는 안상이 2구씩 있으며, 그 위에 16엽의 연판이 돌려져 있다. 중대는 거의 원형으로, 정면을 보고 있는 용과 같은 얼굴의 거북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네 마리의 용이 보주를 쥐고 있으며, 남은 공간은 구름무늬가 가득하다. 상대석에는 8엽의 앙련이 조각되어 있다. 탑 몸돌에는 문비와 자물쇠, 사천왕상, 광창이 표현되어 있으며, 지붕돌은 두껍고 비천과 구름이 표현되어 있고,  윗면 각 모서리에 큼직한 귀꽃이 달려 있는데, 일부는 파손된 상태이다. 상륜부에는 복발 위로 보개와 보주가 올려져 있다. 통일신라 승탑의 기본형인 팔각원당형 구조를 잘 따르면서도 조각의 세부수법에서는 고려 특유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승탑에서 계곡 쪽으로 비탈길 계단을 내려오면 원종대사의 탑이 보인다.
 

[보물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

 

탑비와 함께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는 탑은 3단의 기단 위에 탑신과 지붕돌을 올린,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한 탑으로, 기단부는 네모난 바닥돌에 연꽃잎을 새기고,  아래 받침돌도 네모난 형태이다. 가운데 받침돌은 윗부분에는 1줄로 8각의 띠를 두르고, 밑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으며, 거북이가 머리를 오른쪽을 향하고, 돌아가면서 4마리의 용이 구름 속을 날고 있다. 윗 받침돌에는 연꽃이 새겨지고, 탑신은 4면에는 문모양이, 다른 4면은 사천왕입상이 새겨져 있다. 길을 따라 내려 온 사지의 입구에 이곳을 발굴시 나온 석재들이 모습을 들어내고 있다.

 

 [고달사지 출토 기단석]

 

이곳에서 규모에 비해 많지 않은 석조물을 보니  세월 속에 사람손을 많이 타 석물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곳에서 나온 보물 중의 하나로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는 고달사지쌍사자석등(보물)을 알아본다.

 

[보물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
 
 
고달사터에 쓰러져 있었던 것을 1959년 경복궁으로 옮겨 가고,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높이는 2.43m에 화사석까지만 남아 있다가, 2000년의  발굴조사에서 지붕돌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쌍사자석등의 사자는 서있는 자세가 대부분인데, 웅크리고 앉은 모습이 특징적이며, 고려 전기인 10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여느 사지를 지키는 것은 석탑과 석등인데, 이 곳에는 궁금하게 석탑이 자리하고 있지 않다. 궁금증을 가지고 여주를 벗어나기 전, 2007년 보물로 지정된 영릉의 재실을 찾아본다. 영릉은 세종대왕과 소현왕후의 영릉과 효종과 인선왕후의 영릉, 두 곳이 한자 이름이 틀리게 하며 이웃하고 있다.

 

[보물 여주 효종 영릉 재실]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대왕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이며, 재실은 제수장만 및 제기 보관 등의 제사기능을 수행하는 능의 부속건물이다. 가을 에 접어들어서 인지 제법 쌀살해 지며, 왕릉으로 향하는 길은 잘 가꾸어진 가운데 낙엽도 물들어, 고즈녁한 풍경을 자아내어 산책하기 좋아 보인다. 재실 앞 마당에서는 '효종이 이루고자 한 태평성대' 의 주제로 토크 콘서트가 진행되고 있는데, 이는 요즘  진행 중인 조선 왕릉 축제 행사의 하나인 듯 하다. 역사를 알려는 젊은 참가자들에게서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을 본다.

조선 왕릉의 재실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에 대부분 멸실되어 원형이 훼손되었는데, 영릉 재실은 조선 왕릉 재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아있고, 공간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대표적인 조선시대 재실건축으로 학술적·역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고 한다.

 

[재실 배치도]

 

재실의 배치도를 통하여 건물의 쓰임새에 관해 알아본다.

 

[재실의 재빙]

 

효종대왕릉은 1659년 경기도 양주군 건원릉(현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의 서쪽에 자리를 잡은 후 능호를 익릉(翼陵)으로 하였다가 영릉으로 고치고, 능을 조성할 때 능 앞에 재실을 건립하였는데, 이후 1673년 석물에 틈이 생겨 현 위치로 옮겨오면서 재실도 함께 옮겨왔다고 한다.

 

[천연기념물 여주 효종대왕릉 (영릉) 회양목]

 

키작은 나무인 회양목이 이렇게 까지 크는가 싶다. 이처럼 크게 자란 회양목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생물학적인 가치가 큰 노거수 일뿐만 아니라, 1673년에 조성한 효종대왕릉(영릉) 재실에서 300여 년 동안 자라온 나무로서 그 유래와 역사성이 매우 커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재실 공간 내에 회양목과 향나무 그리고 재실 건축 연대보다 더 오래된 500년 이상의 느티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재실의 역사성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영릉릐 재실]

 

여주의 여행을 마치며, 사지를 통해 비슷하지만 색다름을 느끼며, 그 다양성과 숨은 이야기에 흥미가 샘 솟는다. 모든 것을 다 알고 다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면, 그래도 오늘 본 것을 혼자 만족하며 흐믓한 것을 보면 범인이 맞다는 생각을 가지며 집으로 향한다. 

 

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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