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를 벗어 나기 아쉬워 발길 잡아 찾은 곳은 두암고택, 가는 길의 이산서원을 지나 종택을 찾아본다.
두암고택은 조선시대의 문신 두암(斗巖) 김우익(金友益)이 20세가 되던 1590년(선조 23)에 분가하며 지은 ㅁ자형의 본집과, 후손들이 지은 함집당(咸集堂)이라는 이름의 별채, 그리고 김우익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봉화에서 예천 흘러가는 내성천 변에 남향으로 자리 잡아 겨울 해가 따스이 내려쬐는 모습은 동양화 같은 모습으로 자리한다.
문이 잠겨 넘어다 본 모습은 ㅁ자형의 몸채에 양쪽으로 한 칸씩 돌출되어 있어 凸자형 모양이며, 전면 7칸중 좌측의 세 칸은 측면 2칸에 바닥과 지붕을 높인 팔작지붕이며, 전면에는 툇간에 마루를 두었고, 뒤는 온돌방이라 한다. 가운데 칸에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안마당의 모습은 볼 수 없음에 아쉬움을 갖는다.
별채인 함집당(咸集堂)은 김우익의 손자 김종호를 추모 하여 자손들이 그의 호를 따서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좌측의 두 칸은 마루이고, 우측의 한 칸은 온돌방으로, 마루 부분에는 판벽과 세살문을 설치하고, 사면 처마 밑에 폭이 좁은 마루가 있다. 담장 너머의 고목을 쪼는 딱다구리의 소리를 쫒아 그 모습을 화면에 담아보는 기쁨을 누리고 길을 나선다 .
종택 근처의 이산 서원은 주변이 잘 정비되어 있으며, 서원의 앞에는 2층 문루인 관물대가 자리한다. 이산 서원은 1573년(선조 6)에 지방유림들이 이황을 배향하여 창건하여, 1574년에 ‘이산(伊山)’이라 사액되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8칸의 이산서당만 남아 있다가 1996년 복원되었다고 한다. 이산서당은 유림의 회합 및 학생들의 강학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원래 이산면 내림리의 이산서원이 영주댐 건설로 수몰지역이 되어 석포리 이 곳으로 이건하고, 동·서재와 사당, 누각, 경지당 등 8개 동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이산서원은 옛 영천군의 최초의 서원이자 유일한 사액서원으로 조선시대 동안 박승임, 김륵, 권두문·김중청 등 옛 영천군 지역의 저명한 학자들이 활동하였다고 한다.
경지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굴도리 소로수장집으로, 가운데 4칸 마루방을 둔 중 당협실형이고, 양측 온돌방 후면에는 각기 반침을 두었다고 한다. 자연석 기단에 초석은 3종류를 혼용하여 두리기둥을 세우고,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 이라 한다.
길을 소수서원 방향으로 향한다. 소수 서원으로 가는 길에는 처음 접하여 가슴 설렘을 갖게하는 문화재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소수서원 가는 길에서 소로의 마을 길을 따라, 굽이 돌아 안으로 계속 오르다 보니 길이 끝난다. 길의 끝자락의 인가 마당에 차를 대고 올려다 본 곳에는 축대위의 과수원, 뜻하지 않은 방문객을 보며 짖어대는 개를 뒤로 하고 과수원으로 올라 끝자락에서 전각을 찾아낸다.
어렵게 모습을 들어낸 이 불상은 발견 당시 목에는 금이 가고 발목 아래는 땅에 묻혀 불완전한 상태를 보수정비한 것이라 하는데, 어렵게 찾아 온 불상의 이미지는 꽤나 세련 된 듯하다.
큰 듯한 머리의 육계가 큼직하지만, 길어 보이는 이목구비의 둥글고 우아한 얼굴,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 양감있는 다리에서 현대적인 미의 감각도 느껴진다. 양 어깨를 감싼 옷 그리고 옷을 굵은 선으로 둥글게 표현하고, 양 다리의 동심타원형의 주름의 표현은 삼국시대 불상의 독특한 표현기법이라 한다.
어렵게 찾고 외로워 보이는 불상의 시선을 따라 주변을 둘러 보며, 이곳에 덩그라니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이 곳이 절간자리 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근처의 소수 서원으로 향한다.
소수서원으로 들어서면 소나무 숲 사이에는, 서원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의 당간지주가 있다. 보물이기도 한 이 당간 지주가 왜 서원 앞에 서 있는지 뜬금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 기억된다. 아마도 옛 사찰 부지에 서원이 자리한 것 일 것이다.
유교의 성지 소수서원의 불교 유적인 이 당간지주는 서원 내에 아직도 당시 숙수사의 여러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위치가 원위치로 보인다고 한다. 숙수사는 통일신라 전기에 창건된 사찰로,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오다 소수서원의 건립으로 폐사된 듯 하다고 한다. 마주보는 면의 바깥면 중앙에 세로띠를 새기고, 네모난 기둥 끝으로 올라가면 약간 가늘어지고, 맨끝은 둥글게 경사지며, 꼭대기 끝 안쪽 면에는 홈을 파서 당간을 고정시키는 모양이다. 지주와 당간을 받치던 바닥돌이 있었을 듯하나, 현재는 지주 양쪽으로 길고 큰 돌 1장씩이 놓여있을 뿐이라 하며,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라 한다.
숙수사에 관하여 좀 더 깊이 있게 알아보고 싶어진다.
당간 지주 앞에서 고민을 한다. 하루에 너무 많은 문화재를 섭렵하면 가슴이 먹먹해 온다. 새로운 것을 보거나 많은 것을 접할 때 벅차하는 감정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는 어디인가? 소수 서원의 해는 기울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는데, 망설임의 마음을 모르는 듯 발길은 소수서원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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