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로 여행길을 나서 본다. 영주는 부석사로 널리 알려진 곳이지만, 좋은 곳 먼저 보면 다른 것에 대한 관심이 적어질까 걱정하여 여타 보물과 문화재를 찾아본다. 맑고 푸른 하늘에 날씨는 제법 쌀쌀하다. 영주시로 들어서며 가흥리의 문화재를 찾는다. 서천 강을 끼고 가는 큰 길 옆에 있는 아담한 바위산에 자리한 불상이다. 멋진 환경과는 달리 주차장 시설이 별도로 없어, 골목길에 주차하고 마애삼존불을 대한다.
불상은 강가 돌출한 바위면에 본존불과 그 좌우에 서 있는 보살상인 마애삼존불로 자리한다.
1963년에는 마애여래삼존상 만이 보물로 지정되어 오다가, 이후 오른쪽의 여래좌상도 함께 보물로 등재된 것이라 한다. 많은 불교 신자님들이 방문하여 향을 피워서, 길가이지만 주변에 향내가 은은히 번지고 있다. 첫 인상은 언제, 누구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이, 불상의 눈이 파여 있어 이를 보는 동안 안타깝고 의아한 의문을 가진다.
본존불은 전체적으로 큰 얼굴에 얼굴 윤곽이 깊고, 둥글고 볼륨감이 있는 모습이며, 가슴을 감싸고 내여온 법의도 무겁고 장중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자연 바위를 이용한 연꽃무늬와 불꽃무늬를 새긴 광배와 돋을 새김한 연꽃무늬의 대좌 등도 표현된 모습이 깊고 볼륨감이 풍부한 느낌을 갖게 한다. 왼쪽 보살상은 둥그스름한 얼굴에 강하게 느껴지며, 오른쪽 보살상은 보관을 쓰고 손에는 보병을 들고 있는데, 두보살도 부조라기 보다는 동상에 가깝게 선이 굵으며 깊게 조각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이 마애불은 통일신라시대의 사실주의적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낸 것으로 평가된다고 한다.
마애여래삼존상은 일제강점기 때 학계에 처음 존재가 보고 되었고, 마애여래좌상은 2006년에 뒤늦게 발견 되었다고 한다. 집중호우로 삼존상의 좌측 암반이 붕괴하면서 발견된 불상으로, 삼국 말에서 통일신라 초의 마애불상과 양식적으로 유사하며, 얼굴의 표현, 법의의 조각솜씨나 앙련의 연화대좌 형태에서 옆의 마애여래삼존상과 같은 양식을 보여주어, 거의 같은 시기(650년경)에 제작된 상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마애여래좌상 역시 발견 당시에 두 눈이 파내어져 있어, 이로 인해 눈의 홰손은 오래 전의 일이라 추정된다.
누군가가 다른 곳은 놔두고, 불상 3구의 양눈을 정으로 쪼고 코를 뭉갠 것에서, 지금도 그 악의가 느껴진다. 발견 당시도 눈알이 파헤쳐진 후 산에 버려져 있었으나 정확한 기록이 없어, 언제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는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있다고 한다.
불상 옆 면의 큰 바위에 또다른 문화재가 자리하고 있다고 안내판이 일러준다. 언뜻 보면 알 수 없어 천천히 찾아본다.
암각화란 선사시대 사람 들이 바위나 동굴의 벽면돌에 기호나 물건, 동물 등의 그림을 새겨놓은 것으로, 풍요와 생산을 기원하는 주술행위의 결과물로 보고 있다고 하는데, 이곳 가흥리 암각화는 높이 1∼1.5m, 너비 4.5m로, 청동기 시대에 새긴 것이라 한다. 청동 도구로 쪼아서 새기는 방법을 사용하여 3∼5개의 선을 옆으로 연결하였는데, 그 의미는 아직 알 수 없다고 한다. 어렴풋이 보이는 문양은 눈에 익다. 마애불이 아닌 인근에 자리한 보물 불상을 찾아 움직인다.
1963.01.21에 보물로 등재 된 불상은 광배와 상이 하나의 돌에 조각된 형태의 보살상으로, 원래는 시내의 절터에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목이 굵고, 힘 있는 모습에, 표현된 선도 굵고 깊은 것이 앞서 본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에서의 느낌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통일 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의 특징은 왼쪽 겨드랑이에 표현된 매듭으로, 이 매듭에서 내려오는 옷자락은 지그재그형을 그리며 팔 위에 걸쳐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 않은 예라 한다. 이곳은 주변이 잘 정비된 곳에 전각안에 자리하여, 관람이 용이하다. 바위에 줄이 간 듯하여도 왜 그대로 사용하여 불상을 제작한 것인지 의문을 가지고 본 불상이다. 이제 국보를 본다는 기대감으로 영주의 흑석사를 방문한다.
새로이 만들어 진 듯한 일주문을 통과하여, 언덕을 조금 올라 다다른 흑석사 모습은 국보와 보물을 간직한 사찰로서는 너른 절터에 비하여는 새로이 불사가 많이 이루어져 할 곳이라 생각을 갖게한다. 흑석사는 삼국시대 석조마애여래상과 통일신라의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절로, 늦어도 통일신라 때 창건된 절인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폐사이었다가, 1945년 중창되어 그리 보이나 보다.
국보가 자리한 극락전으로, 대웅전은 새로이 불사가 이루어 진 듯하고 아직 대웅전 현판도 없고 관람이 불가하여 이 곳으로 향한다.
오늘은 국보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사진으로 대신하고 있어 아쉬움을 갖게한다. 대웅전을 새로이 짓고 그 곳으로 모시려나 보다 하는 생각과 다시금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1993.11.05 국보로 지정된 이 문화재는 1990년대 목조아미타불상 몸체 안에서 복장유물이 발견되어, 이 에 의해 조선 세조 4년(1458)에 법천사 삼존불 가운데 본존불로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다. 상투 모양의 육계와 팔, 배 주변에 나타난 옷의 주름은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이라 한다. 법천사란 사찰명은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등 여러 지역에 걸쳐 있어 정확히 어느 곳인지는 알 수 없다 하는데, 복장유물로 불상의 조성을 알리는 글과 시주자 명단이 들어있는 『불상조성권고문』, 불경 내용을 적은 『불조삼경합부』와 불교부적 등 7종에 걸친 14점이 나오고, 1824년 유점사에서 간행된 『조상경』에 나오는 부장물의 내용과 일치하는 38종의 다양한 직물들과 5향(香), 5곡(穀), 유리·호박·진주 등 칠보류가 함께 발견되어서 국립대구 박물관에 보관 하고 있는데, 이 유물들은 조성 시기를 알 수 있고, 서지학과 직물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극락전을 나서 경내를 가로질러 올려다 보이는 보물로 향한다.
위로 보물을 품은 전각 앞에 대웅전이 자리한다. 석조여래좌상을 뵈러 경사진 돌계단을 올라본다.
1980.09.16. 보물로 지정된 불상은 부근에 매몰되어 있던 것을 발굴하여 모셔놓은 석조여래좌상으로 불상을 안치하는 대좌와 온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옆에 따로 놓여있다.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감돌고, 어깨가 약간 움츠려 든 모습에, 얇은 듯한 옷처리에 자연스러운 주름으로, 양 발 앞에서 부채꼴로 내려져 있다. 대좌는 8각으로 상대석이 없고 중대석·하대석만 남아 있는데 하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해서 연꽃무늬와 구름무늬를 표현했으며,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겨넣었다. 9세기 통일 신라시대의 불상이라하는데 흰빛으로 깔끔한 모습에 눈이 간다.
마애불 뒤로는 바위군이 자리한다.
이곳의 자연암벽에 본존불과 좌우 협시보살을 새긴 마애삼존불로 석조여래좌상 뒤에 자리한다. 본존불은 가슴 이하를, 협시보살은 목부분 이하를 새기지 않은 특이한 모습으로, 본존불은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에, 귀는 길고, 목에는 삼도가 있다. 옷은 주름이 마모되어 세부 표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삼면관을 쓰고 있는 좌우 협시보살은 모두 머리광배를 지니고, 신체 일부분만 새겨져 있지만 원형이 대체로 잘 유지되어 있는 작품으로, 신라말 또는 고려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미완성의 투박한 마애불 앞에 정갈하고 단정한 석조여래 좌상이 이루어 내는 두 문화재 조합이 왠지 한 곳에서 다양함을 볼 수 있는 만족감과 동시에 언발란스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 같다. 석조여래 좌상을 원형으로 복원하고, 마애불은 그 모습 자체로 볼 수 있도록 분리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찰을 나서며 발길을 재촉해 본다 이왕에 멀리온 길 다른 몇가지의 문화재도 더 보려는 욕심 때문이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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