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 일흔 여덟번째 - 금산

세종해피뉴스 2024. 12. 23. 14:38

충남의 인삼으로 유명한 금산으로 향한다. 금산은 오래전엔  전라북도 였다가 충청남도로 이관된 곳으로 명산인 대둔산이 있는 곳이며, 임진왜란 (금산 전투) 당시 순절한 의병장 조헌, 승장 영규를 비롯한 700의사를 모신 무덤인 칠백의총이 있는 곳이어서, 이 곳 칠백의 총에 보관된 보물을 찾아보려 가는 길이다. 

 

[사적 금산 칠백의총 전경]
 
임진왜란(1592) 때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700명의 병사들을 위한 무덤과 사당으로, 그 들이 전사한 후 조헌 선생의 제자인 박정량과 전승업이 시체를 거두어 무덤을 만든 칠백의총이다. 조선 선조 36년(1603)에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가 세워지고, 인조 25년(1647)에 종용사를 세워 700의사의 위패를 모셨다한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의총을 허물고 순의비를 폭파했으나, 금산군 사람들이 비석 조각을 감추어 보존하였다가. 1971년 깨어진 조각을 시멘트 등으로 다시 붙여 복원하였으나, 2009년 석재로 재차 복원하고 비각도 새롭게 건립하였다고 한다. 1963년 국가에서는 묘역을 확장하고 1976년에 기념관·순의탑을 새로 지었다.

 

[ 칠백의총 기념관]

 

전시 된 보물을 찾아 칠백의총 기념관으로 발길을 옮긴다.

 

[박물관 내부]

 

이층 구조의 박물관은 임진왜란 당시 전사한 자들에 대한 나라사랑의 충의를 느끼며, 추모의 맘으로 둘러보는 분위기를 갖고 있다고 느낀다.

 

[임진왜란 당시의 복장유물]

 

당시의 전투복과 병장기가 전시되어 있는데, 몸을 보호하는 장비 없이 , 왜군에 비해 조총도 없이 창검으로 맞선 당시의 조상의 용맹에 안스러운 맘이 생긴다.

 

[ 보물 제 1007 호 조헌 관련 유품 과 영규대사 존영]

 

조헌(1544∼1592)은 의병장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호조좌랑, 예조좌랑, 감찰을 거쳐 보은현감을 거치고, 여러번 재등용되었는데 사직하고 지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1,7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영규대사와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나, 금산에서 왜군을 막기 위해 남은 군사 700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 분으로 호는 문열(文烈)이라 한다.

 

[보물 제 1007호  조헌 관련 유품]

 

1989.08 보물로 지정된 조헌 유품은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시 충청도 의병장으로 금산벌판에서 왜병과 싸우다 순사한 중봉 조헌(1544∼1592)이 남긴 유물로 총 6종 7점이다. 문과급제 교지는 조헌이 나이 24세에 명종 22년(1567) 문과에 급제한 교지로서 조헌의 관계문서로서는 제일 오래된 것이며, 의병장제수교서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임금이 조헌에게 충청도 의병장으로 제수한다는 내용이라 한다. 그리고 조헌종사문묘 교서는 1883년 고종임금이 조헌을 문묘에 제사지낼 것을 명해 내린 교서이며, 또한 치제문(致祭文)은 2매로, 1795년 정조와 1812년 순조가 조헌 영전에 그의 죽음을 기리며 보내는 제문이라 한다.

 

보물 제 1007호  조헌 관련유물]

 

이 외에도 대나무를 조각하여 끈으로 꿰어 차도록 만든 화살통도 함께 보불로 지정되어, 나라를 위해 순사한 조헌을 기리기 위하여 일괄 보불로 지정되어 후세에 호국정신을 함양하고 있다.

 

[21개의 비석]

 

종융사에는 의병장 조헌과 의승장 영규를 비롯한 칠백의병 뿐 아니라 눈벌 전투에서 순직한 고경명과 그 막좌및 사졸 그리고 횡당촌 전투에서 순절한 해남현감 변응정과 무명의사 등 21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21개의 비석은 종용사에 안치된 21위의 위패를 상징화한 것으로 위패를 전시관으로 가져온 곳은 칠백의병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함이다.  계단에 전시된 칠백개의 조형물을 통해 이곳에 자리한 칠백의 혼령을 대한듯 한 아픔을 간직하고 기념관을 나선다. 

멀지 않은 곳의 보석사로 향한다.

 

[보석사의 일주문]

 

이 곳의 은행나무의 황금빛 은행 잎은 볼 수 없으나 우람한 몸체는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보석사의 일주문을 지난다. 보석사는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로 신라 헌강왕 11년(885)에 조구선사(祖丘禪師)가 창건한 역사가 오랜 사찰이다. 들어가는 길목에는 의병승장비가 자리한다.

 

[보석사 은행나무]

 

사찰 옆으로 길을 따라 들오서면  조구 대사 가 창건시 (886년) 심었다고 전해지는 커다란 보석사 은행나무가 방문객을 잎을 떨구고 서있다.

 

[보석사]

 

보석사 해탈문 불이문 방향이  아닌 은행나무 있는 곳에서 사찰로 들어서는 길이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보석사 대웅전]

 

창건 당시 절 앞에서 캐낸 금으로 불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절 이름을 보석사라고 하였다 하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고종(재위 1863∼1907) 때 명성황후가 다시 세웠다고 한다. 보석사 대웅전은 정면 3칸 · 측면 2칸 규모의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로 고풍스런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금산 보석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대웅전내에는 주존인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좌상 모두 둥글 얼굴, 반듯한 코에 반개한 눈과 입매가  올라간 입술 등이  단정한 모습이며, 어깨 폭이 넓고 허리가 길며, 무릎 폭이 넓어 전체적으로 볼륨있는 안정감이 있다. 석가불은 변형우견편단을 입고,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으며, 복장물이나 발원문은 남아 있지 않지만 전형적인 17세기 석가여래삼존불의 특징을 보인다 한다.

 

[ 지장전]

 

법당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협시로 봉안하고 있다. 그리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을 안치하며, 시왕상 앞에는 시봉을 드는 동자상 10구를 안치한다. 이 밖에도 판관 2구, 녹사 2구, 문 입구에 장군 2구 등 모두 29개의 존상을 갖추고 있다.

 

[천연기념물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000살 이상 될 것으로 추정(지정일 기준)된다. 높이 34m, 가슴높이의 둘레 10.72m의 크기라 하며, 이 나무는 마을에 큰 일이 생길 것 같으면 소리를 내어 미리 알려준다는 이야기가 있다.

[보석사]

 

보석사를 나서며, 금산에 들어서며 구입한 따끈할 때 다 먹지 못하고 남은 인삼튀김으로 간식을 즐겨 본다.  조용한 산사에를 마주하며 맑은 공기와 화사한 전경에, 몸에 좋은 인삼을 먹는 행복감에 여행의 피로를 달래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또 다른 이곳의 명물 천연기념물인 요광리의 은행 나무는 고속도로로 길을 잘못 접어들어 눈 앞에서 놓치게 된다. 오늘은 그간 지나며 찾아보지 못한 보물인 조헌의 유물을 대하며 역사 속에 자리한 의병에 대한 추모의 맘을 가지게 된 것으로 만족하고, 뜻하지 않게 남아있는 단풍으로 기대하지 않은 멋스러움을 보여준 보석사 전경에 만족하며 귀가 길을 잡는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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