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수서원
숙수사지 터라 여겨지는 곳에 자리한 사적지 이며 2019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소수서원으로 들어선다. 저녁시간에 방문하기에는 다소 시간 상의 아쉬움에 마음만 바쁘고 발길은 늘어진다. 이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의 사학기관으로 조선 중종 38년 (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安珦)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이듬해에 유생들을 교육하며 백운동서원이라 하고, 이후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으며, 인조 11년(1633)에는 주세붕을 더하여 제사 지냈다고 한다. 어스녁한 늦은 시간에 서원의 방문은 마치 학교가 파한 시기에 학교 문을 들어서는 기분이다.
입구 오른편에 자리한 경렴정은 주세붕이 북송의 성리학자 염계 주돈이를 경모한다는 의미로 지은 정자로, 해서는 이황의 글씨, 초서는 황기로의 글씨인 두개의 현판이 있다.
죽계라는 이름의 내, 바위 위에 ‘敬(경)’ 글자는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창건하고 쓴 글씨이라 한다. 위에는 백운동이라는 글이 자리한다.
이황이 풍기군수 재직시 흙을 쌓아 만든 단위에 취한대를 짓고, ‘敬’자 위에 ‘白雲洞(백운동)’ 세 글자를 써서 음각하고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소수서원 내로 들어서는데, 나도 알수 없는 경건한 마음을 갖게된다. 입구 한편에 성생단이 자리한다.
정문 바깥쪽의 성생단(省牲壇)은 향사에 쓸 희생(犧牲)을 검사하는 단으로, 서원의 생단은 사당 근처에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소수서원의 생단은 서원 입구에 있다.
입구를 들어서면 강학당의 측면이 보인다. 서원입구에서 바로 강학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남쪽 기단에 계단을 설치되어 있다.
2004.04.06 이곳의 문성공묘와 함께 두 건물 모두 서원 창건 당시에 건립된 조선 중기의 건물로, 임진왜란 이전 건물로서의 역사성과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강학당은 서원의 양대기능 중 하나인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장대석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다듬은 초석을 놓았으며, 정면4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로서, 사방 둘레에 너비 1m정도의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툇마루 가장자리는 턱을 두었고, 기단 네 모서리에 추녀를 받는 활주를 설치되어 있다. 강학당의 정면은 동쪽을 향하고, 정면 4칸 중 좌측 3칸은 마루이며, 우측 1칸에는 방을 2개 설치하였고, 기단3면(정면, 우측, 좌측)에 계단이 있다.
내부 대청의 북면에는 명종의 친필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이 높이 걸려있다. 풍기군수 이황이 명종 4년(1549) 12월에 경상감사 심통원을 통해 건의하여, 이듬해 4월에 명종의 친필 액자를 하사받았다 한다. 소수서원은 대제학 신광한이 왕명을 받아 이미 무너진 교학(敎學)을 다시 이어 닦게 하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라 하며, 이 현판은 검은 바탕에 글씨는 돋을 새김하였다.
![](https://blog.kakaocdn.net/dn/dbf9Ds/btsL3i7stzm/ck8h6Kr7yMyBz5N9PRKOv0/img.jpg)
강학당 옆에는 자리한 문성공묘로 문성공은 안향의 시호라 한다.
2004.04.06일 보물로 지정된 문성공묘는 제향기능의 사당으로 안향을 주향으로, 문정공 안축 · 문경공 안보 · 그리고 문민공 주세붕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고 있는데, 일반 적으로 사원의 뒷편에 사당을 모시는 것과는 달리 강학당이라는 대성전 옆에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일반적인 서원의 형태가 자리잡기 이전의 최초의 서원이기에 가지는 형태인 듯하다. 정면3칸, 측면3칸의 맞배집으로 장대석의 낮은 기단 위에 둥근 주좌를 놓고,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내부의 모습은 제향공간이라 볼 수 없으나, 혹 매년 3월, 9월 초정일(初丁日)날 제향을 올리고 있다고 하니 이때나 접할 수 있을 듯 하다.
책을 보관하는 곳이라 아마도 도서관 같은 곳이란 생각이 든다. 뒷편에는 영정각과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장만하기 위한 건물인 전사청이 보인다.
학구재와 지락재는 유생이 사용하는 숙소로 학문을 구하는 집인 학구재와 인생의 즐거움을 배움을 통하여 얻는 다는 뜻의 지락재의 현판으로 학생들을 일깨우는 듯 하다.
동재 일신재(日新齋)와 서재인 직방재(直方齋)가 한 건물에 있다. 다른 서원처럼 좌우 대칭의 두 건물이 아니라, 정면 6칸의 한 건물에 대청을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배치되어 있어, 한 건물에 현판이 두 개 걸려있는 형태이다. 직방재는 안과 밖을 곧고 바르게 하라는 주역에서 따온 것이며, 일신재는 날마다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라는 대학의 뜻에서 따온 말 이라 한다. 이곳은 당시 교사들의 집무실 겸 숙소였다고 한다.
소수서원의 사료관을 통하여 소수서원의 연혁 및 여러 유물을 둘러보고 서원을 다시 둘러보며 나온다.
어스녁 하루를 마무리 할 시간, 쫓기듯 나서는 발길을 잡는 소나무 숲, 우리네 문화재를 찾아 볼때 그 곁을 지켜주는 수종이다. 푸르름을 띄며 이곳을 지키고 있는 소나무 한그루 한그루가 마치 이곳 서원에서 학문의 정진에 노력하였지만 알려지지는 않은 유생들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긴 여정에 많은 문화재를 보려는 욕심에 둘러 본 영주에서의 하루 복기가 어려울 정도로 벅찬 하루이다. 이 곳 영주에서 서원의 처음이 시작 된 것이, 학문을 숭배하고 안향을 기리고 그 학문을 교육하려 노력한 이 곳 풍기군수들의 열정이라는 것과, 그리고 한 시대를 풍미한 사찰터에 서원이 들어선 것을 알게 되며, 세상 물정은 사람들에 의해 바귀고 이에 대한 것은 역사속에 기록이나 유물로만 전해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영주의 못 다 접한 문화재에 대한 미련을 간직하며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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