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승사
문경의 대승사로 길을 나선다. 며칠전 상주 남장사의 목각으로 된 후불 벽화를 보고 국보 목각후불탱화를 찾아 나선다. 봉하의 산마루에 사면석불상이 있어 붙여 진 산이름이 사불산인 산으로 찾아들면 대승사가 자리한다. 이곳의 설화는 587년 (진평왕 9) 붉은 비단에 싸인 석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왕이 예배하고, 이 바위 옆에 절을 창건하고 대승사라 하였다고 한다.
일주문을 지나면 산속에 마치 세속의 대감집의 삼문을 보는듯한 사찰에 당도한다. 오랜 역사 속의 사찰로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는 생각도 든다.
문을 통과하여 계단을 오르면 사찰의 대웅전 마당으로 가는길이다.
임진 왜란과 잦은 화재로 그리 오래되지 않은 건물로 이루어진 사찰인 직지사의 말사이다. 한낮의 햇볕을 위해 열어 놓은 문사이로 국보와 보물이 보인다.
2017.08.31 국보로 지정된 대웅전 안의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후불탱화 형식으로 조각 된 목각탱으로, 총 10매의 판목을 조합하여, 아미타극락세계를, 본존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보살 및 제자, 천왕상 등 24구의 존상을 좌우 대칭으로 배치하여 표현하고 있다. 1675년에 제작되어, 현존하는 조선 후기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라 한다. 강직하고 개성 넘치는 묘사력은 17세기 후반의 조각승 단응(端應), 탁밀(卓密)의 조각유풍과 관련 있으며, 목가설법상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현존하는 6점의 조선 후기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1684년 예천 용문사, 상주 남장사, 서울 경국사, 1692년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 1782년 남원 실상사 약수암) 중에서 가장 규모도 크며, 불보살상의 표현이 다른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들의 모본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1973.12.31 보물로 지정 된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및 관계문서는 원래 부석사에 모셔져 있던 것을 대승사로 옮겨 놓은 것으로, 대승사로 옮기기 전에 부석사와의 분쟁관계를 적은 문서들이 남아 있다. 이것은 「상주대승사외사사승도등장」, 「상주사불산대승사승도등장」, 「도내상주사불산대승사제승등장」, 「완의」등이다.
경내에 한눈에 많은 전각이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에 위치한 극락전을 찾아 본다.
2010.02.24 보물로 지정된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극락전에 자리하고 있다. 조사에 의해(성분분석, X-ray) 불상의 머리에 1301년에 쓴 기록과, 다라니를 포함한 복장물이 처음 불상을 제작시 납입한 것으로 추정되어, 이 아미타여래좌상이 14세기 초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복장에서 수습 된 다라니 12매는 고려 충렬왕 18년(1292)과 27년(1301)경에 판각 또는 인출되어 금동아미타불조성시에 불복장에 납입(納入)되어진 것으로, 아미타불조성에 있어 필수적인 다라니로 흩어져있는 불복장 일괄유물을 체계화시키는데 보완이 되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한다. 복장유물은 1. 아미타삼존다라니 2. 금강계만다라 3. 아자범자원상태장계만다라 4. 향낭 (고려후기, 향낭(香囊) 표면에 묵서(墨書)가 있음)이라 한다.
대승사는 선원(禪院)이다. 대승선원은 한국불교 정화의 씨앗이 움튼 곳으로, 성철, 청담, 서암, 자운 스님과 비구니 묘엄스님이 정진하고, 장좌불와(방바닥에 등을 대지 않고 한순간도 잠을 자지않는 수행법)로 유명한 성철스님은 이곳에서 3년간 눕지않고 수행한 곳이며 법전스님이 깨달음을 얻은 곳이라 한다. 스님들이 기거하며 수양하는 곳이어선지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 되어 있는 곳이다.
1989.04.10 스님들의 선방인 대승선원에 유리상자를 씌워 모셔 놓았다한다.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 중종 11년(1516) 불상에 새로 금을 칠하기 이전인 15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머리에는 화려한 관을 쓰고 있으며, 양쪽 귀에 걸친 머리카락은 여러 가닥으로 흩어져 어깨를 덮고 있다. 귀는 약간 짧고 목에는 3줄로 새겨진 삼도(三道)가 명확하게 있으며, 전신에 걸쳐 화려한 구슬 장식이 있다.
시왕상과 금강역사가 지장보살 좌우에 자리하는데, 지장보살 뒤 후불 탱화가 문화재 자료이며 모두 잘 보관하여야 할 문화유산이다.
사찰의 야간 법회 시 불을 밝히거나 또는 숯을 피워 주변을 따뜻하게 하는 기능을 가진 석물로 "불우리", "노반지주", "광명대", "화사석", "정료대"등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노주석은 석등의 원초적 형태로 분류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모두 조선시대 중, 후기가 대부분으로, 대승사 노주석의 형태는 사각형 지대석을 놓은 뒤, 사각기둥을 한가운데 세우고 그 위에 받침이 있는 화반(化盤)을 올려놓았다. 간주(竿柱)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옹정 7년(영조 5, 1729)이라는 제작연대와 공인의 이름을 알 수 있어, 중요한 자료라 한다.
사찰을 나서서 마애불을 찾아본다. 마애불은 사찰을 올라오는 길에서 묘적암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어 윤필암을 지나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이를 수 있다.
대승사의 암자인 윤필암과 묘적암 사이의 큰 바위에 새긴 높이 6m, 폭 3.7m의 마애석불여래좌상이며, 이곳에 미륵암이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고 한다. 불상을 새긴 바위가 약간 앞으로 숙여져 있어 비바람을 피할 수 있고, 또한 갓바위가 설치되어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특이하게 마애불의 머리 위에 연꽃무늬를 한 뿔처럼 생긴 것이 2개 솟아 있으며, 목의 삼도가 2개 인 것도 일반적이지 않다. 고려시대에 대규모로 만들어졌던 마애불상계열로, 우람한 형태에 조형미나 세부의 조각수법이 고려 마애불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한다. 마애불에 차를 돌리는 공간이 협소하여 묘적암으로 향하여 차를 돌려 나온다.
산속 깊이 자리하여 수양처로 어울리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며, 먼발치에서 정적만을 느껴 본다. 산길을 돌아 내려와 집으로 향한다. 몇번의 방문에도 찾아보지 못한 사불암은 오늘도 찾아보지 못하고 집으로 향한다.
문경에서 보은으로 가는 길인 쌍용계곡으로 잡아 드니 눈앞에 사우정이 자리한다. 정자 기둥 네 개에 적혀있는 사우(四友)는 고산(高山), 유수(流水), 청풍(淸風), 명월(明月)로, 높은 산, 흐르는 물, 맑은 바람, 밝은 달, 이 네 가지 자연과 벗하고 살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음을 의미하는 듯 하다. 이 정자는 민영석 의 아들 민우식(1885~1973)이 아버지를 위하여 건립하였다 한다. 관광객이 없는 가을 풍경을 눈에 담으며 자연을 돌아본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알아보고, 계절마다 변하는 자연을 친구로 삼을 수 있음이 남다른 나의 행복이라 생각하며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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