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 일흔 세번째 - 양양

세종해피뉴스 2024. 10. 24. 22:57

 바닷길 옆 바다를 보며 달려 양양을 찾아든다. 일전의 춘천박물관에서 선림원지에서 발굴된 금동보살이 매력적이어서 이것이 발굴된 현장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고,  이곳 절터에 그 외 많은 보물이 있다고 하니 가는 길이 신난다. 가는 길을 찾아 안내판을 쫓으니 앞에 나타난 곳은 자그만 건물 검문소인가 매표소인가가 발길을 잡는다. 이 곳은 미천골 휴양림안에 있어 이곳 입구에서 선림사지의 안내를 받고 길을 들어선다. 미천골 맑은 물을 벗 삼아 계곡을 따라 잠시 오르다 주차장이 없는 길 옆에 사지를 알리는 안내판을 발견한다.

 

[선림원지 입구]

 

 길 옆 임시주차 후 계단을 오르니 바로 마주치게 되는 심층석탑이 이 곳이 절터임을 알게 해준다.

 

[보물 제 444호 양양 선림원지 삼층석탑]

 

 보기만 해도 보물 임을 한 눈에 알게 하는 조각을 지닌 이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으로 법당 터 남쪽의 원래 위치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여러겹의 토대 위의 기단에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기고, 위층 기단에도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기고, 한 면을 둘로 나눈 뒤 8부 중상이 자리한다. 탑신은 몸통과 지붕이 한돌이며, 몸돌의 모서리에는 기둥이 있고, 지붕돌은 기단에 비해 적어서 안정감은 있으나, 다소 세련되지 않은 형상인 듯 보인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에 철제찰주를 꽂았던 구멍이 있다고 하며, 보주모양의 돌이 있으나 원형이 아닌 듯하다고 한다. 산속에 적적하게 자리한 8부 중상이 새겨진 9세기경의 신라시대의 탑의 기단부에서 소탑 60여 기와 동탁 1개가 발견된 일이 있으며, 탑 앞에는 안상을 새긴 배례석도 있다.

탑에서 보는 선림원지의 한쪽 긑자락에 석등과 석비 등이 자리하고 있다. 석등과 석탑은 같은 곳에 있지 않고 왜 떨어져 있지? 하는 생각을 갖고 승탑이 있는 자리로 향한다. 

 

[강원도 기념물 양양 선림원지]

 

선림원은 9세기 초 순응법사에 의해 창건된 후 홍각선사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전하는데, 발굴조사보고서는 지금으로부터 900년을 전후 대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절터가 완전히 매몰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선림원은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법사가 연 절이며, 1948년에는 년대가 804년임을 나타내는 신라 동종이 출토되어, 월정사에 옮겨 보관 중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현재는 일부 파편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춘천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사지에 남아있는 문화유산으로는 삼층석탑(보물)과 부도(보물), 석등(보물), 부도비(보물)들이 있다.

 

[보물 제 447호 양양 선림원지 승탑]

 

용무늬가 화려한 부도를 접한다. 이 승탑은 일제강점기에  파손되었던 것을 1965년 각 부분을 수습하여 현재의 자리에 복원한 것으로, 종탑이 없는 기단부 만이 남아있다.

8각으로 신라 시대의 특징을 보이는 승탑은, 정사각형의 바닥돌에 아래받침돌은 2단인데 아래단이 바닥돌과 한 돌로 짜여진 점이 특이하다. 윗단에는 두 겹으로 8장의 연꽃잎을 새기고,  위에 괴임을 2단으로 두었다. 중간받침돌엔 둥그스름형태에  돋을새김해 놓은 용과 구름무늬의 조각이 정식되어 있다. 윗받침돌에 2겹의  8장의 연꽃잎이 자리한다.  통일신라 후기작품으뢰 추정하며, 정확한 승탑의 건립시기는 절터에 남아있는 홍각선사비와 이 승탑이 홍각선사의 승탑인 점 등으로 신라 정강왕 1년(886)인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원림사지 법당터]

 

승탑에서 석등으로 향하면 높은 축대 위에 자리한 탑비와 석등이 보인다. 썰렁한 넓은 사지의 한편 축대위에 자리한 석조물이 실제의 크기와 달리 적게 보이니 을씨년 스럽다.

 

[보물 제 445호 양양 선림원지 석등]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식 이지만 받침돌의 구성만은 매우 독특하여 눈길을 끈다. 아래받침돌에 귀꽃조각이 앙증 맞게 돋아 있고, 지지대는 마치 장고허리와 유사하다. 화사석은 8각에  4개의 창이 있는데, 아래의 작은 공간에도 무늬가 있다. 지붕 돌 추녀엔 귀꽃조각이 장식이 있어, 지붕돌 경사진 면은 둥글넙적하게 느껴지나 귀꽃조각과의 어우러짐으로 단순과 정갈함도 느끼게 한다. 꼭대기에는 연꽃이 새겨진 머리장식의 작은 받침돌만 남아 있어 위의 장식이 궁금하여 진다. 통일신라시대 담양 개선사지 석등과 거의 같은 모습이며, 같은 절터 내의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와 함께 신라 정강왕 원년(886)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보물 제 446호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석등의 옆에 자리한 통일신라 정강왕 원년(886)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홍각선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한 탑비로, 비받침 위에 비문이 없이 바로 비머리가 올려져 자리하고 있었으며,  비문이 새겨지는 비몸은 파편만 남아 국립춘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던 것을 2008년에 비신을 새로 복원한 모습이라 한다. 비받침의 거북은 용의 머리모양에, 등에는 6각형의 무늬가 있고, 비몸을 새우는 자리엔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 있다. 비머리에는 전체적으로 구름과 용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고, 중앙에 비의 주인공이 홍각선사임을 밝히는 글씨가 있다.  비문은 운철이 왕희지의 글씨를 다른 곳에서 모아 새긴 것으로 신라 후기에 왕희지의 글씨가 보급 되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라고 한다.

 

 1박 후 비가 내리는 궂은 날 오후 시간 진전사지로 향한다. 이 곳도 양양의 폐사지 이지만 국보를 품고 있는 곳이다. 마을을 지나 계곡을 오르는길 옆에 진전사지가 자리하고 넓은 터에 국보인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국보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1966.02.28소재지강원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100-2번지

 

진전사의 옛터에 서 있는 3층 석탑이다. 진전사는 8세기 후반 통일신라시대에 도의국사가 창건한 절이라 전하는데, 터 주변에서 ‘진전(陳田)’이라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절의 이름이 밝혀졌다고 한다.

탑은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려 놓은 모습으로, 아래층 기단에는 천인상이 위층 기단에는 구름 위에 앉아 무기를 들고 있는 8부 신중(八部神衆)이 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는데, 1층 몸돌에는 각기 다양한 모습의 불상 조각들이 있다.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려져 있어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3층 지붕돌 꼭대기에는 받침돌만 남아있을 뿐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탑의 4면 조각들]

 

국보 탑에 새겨진 문양들만 촬영해 본다. 사면 기단에는 8부 중신이 1층 몸돌에는 부처님이 자리한다. 3층석탑이 있는 진전사지터는 넓게 조성되어 있으며 주변에 간간이 석물들도 보이고 있다. 이곳의 화려한 석탑을 통하여 사찰의 규모와 당시의 위세를 느껴본다. 오던길로  안으로 더 차를 몰아 산으로 오르면 진전사가 자리하고 언적을 오르면  도의선사탑을 찾을 수 있다.

 

[진전사]

 

산안개 속의 진전사의 옆의 언덕에 도의선사탑이 자리한다. 아마도 사리탑은 사찰에서 조금 윗편에 자리하는 것을 따른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잠시 멎은 듯한 비의 수중기가 만들어낸 옅은 운무사이의 선사탑은 신비감 마저 주고있다.

 

[보물 제 439호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

 

멀리 동해바다가 내다보이는 진전사터 안의 작은 언덕 위에 서 있는 탑이라는데 아쉽게 바다를 보지 못한다. 이탑은 진전사를 창건한 도의선사의 묘탑으로 추정되며, 도의는 선덕왕 5년(784)에 당에서 유학하고 헌덕왕 13년(821)에 귀국하여 선종을 펼치려 하였으나, 교종 만을 중요시하던 때라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이 절로 들어와 수도하다가 입적하였다 한다. 이 탑은 일반적인 다른 탑과는 달리 8각형의 탑신(塔身)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아랫부분이 석탑에서와 같은 2단의 4각 기단을 하고 있어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석탑 같은 기단의 구조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우리나라 석조부도의 첫 출발점이 되며, 세워진 시기는 9세기 중반쯤이라 추정하고 있다.  단정함이 느껴지며 보아 온 탑과는 다른 모습에서 사리탑 모양의 시작은 탑모양이었구나 하는 새로운 배움을 얻는다.

 

사찰이 깊은 산중의 외딴 곳에 자리하더라도 이토록 크고 화려한 장식으로 공들인 사찰을 창건하고저 한다면 스님의 덕이 높아 따르는 사람이 많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두군데 사지가 양양이라는 지역적 특색 때문에 변방인데도 이렇듯 큰 사찰이었던 것이 놀랍고,  아직도 이런 귀중한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슴에 놀란다. 이 번에 본 조각이 장식 된 모습이 당시의 유행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모습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 탑들과 석조물은 당시의 사람 들이 누린 행복과 생활이며, 현재의 풍요함과 만족감은 현재의 사람들이 누리는 물질적 정신적 가치라고 생각해 본다, 문화재를 돌아보며 느끼는 점은 유형이든 무형이든 남아있는 문화재는 한 시대를 살다 갔다는 흔적이고, 그것이 남아 후대가 과거가 어떠했는지를 알게 하는 길잡이라는 것이다.  요즈음은 모든 기록이 컴퓨터의 데이터로 남을 것이라 생각되나 그래도 쉽게 접하고 몇 백년의 흐름 속에 온전히 남는 것은 석조물 이외는 그리 흔치 않다고 생각해본다. 내가 만약 나의 흔적을 남기고 싶으면 둘에 새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라 생가하며 헛웃음 한번 지어본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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