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 일흔 한번째 - 고성

세종해피뉴스 2024. 9. 27. 01:22

- 옥천사

 오늘은 경남 고성의 옥천사를 찾아본다. 더위가 가시지 않은 날의 먼 나들이지만 이동으로 인하여 즐거운 마음이다. 고속도로 중간에 내려갈 수도 있으나,  예전 다니던 길을 눈에 익히고저, 고성 톨게이트로 나와 대가리 저수지 길을 끼고 들어서  예전의 벛꽃 길을 찾아든다. 가는 길목에 자리한 갈천서원이 있어 잠시 숨을 고른다.

 

[고성 갈천서원]

 

갈천서원은 행촌 이암(杏村 李嵓)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된 사원으로, 이암(1297~1364)은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역임한 자라 한다. 회화면에 금봉서원이라 이름 지어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 된 것을 1712년에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우면서 갈천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는데, 사원의 문은 닫혀 있어 담넘어로 구조를 파악한다.

 

[갈천서원 강당, 낙영재]

 

강당은 정면 3칸, 측면 1.5칸으로 지붕은 네모꼴의 처마에 세모꼴의 지붕을 올린 팔작지붕이며, 중앙의 마루와 마루 양쪽에 방 1칸씩을 두고 있고, 오른쪽 방 앞에는 누마루가 있다. 강당 뒤로는 사당으로 가는 출입문인 내삼문과  행촌 이암, 도촌 이교, 묵재 노필, 관포 어득강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5칸의 규모이며 지붕면이 양면으로 경사를 짓는 맞배지붕이다. 더위로 오래 머물지 못하고 숲속의 옥천사로 향한다. 옥천사는 청담스님이 출가 한 삭발본사인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연화산 옥천사 일주문]

 

 옥천사는 연화산 기슭의 절로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이 지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인조 17년(1639)에 다시 지었다고 하며, 산내에는 청련암, 백련암, 연대암, 적멸보궁의 4암자가 있다.

 

[천왕문]
[사천왕상]

 

천왕문을 통과하여 바로 올라가도 되지만 옆으로 사찰에 이르는 길이 있어 작은 경사를 오른다.

 

[보장각]

 

사찰 오르는 길의 오른쪽에 자리한 옥천사 유물전시관인 보장각에는 보물 제495호 "임자명 반자(壬子銘飯子)옥천사 청동북을 비롯한 120여 점의 경상남도 유형문화재가 전시되고 있는데 오늘은 방문객이 적어선지 닿혀있다. 예전에 나한상의 귀환 행사로 관람한 것을 기억하며 자리를 옮긴다.  옥천사 나한상은 7존이 도난 당하고, 4존이 회수되어, 회수하지 못한 3존 중 하나인데, 외국의 경매장에서 발견되어 환수된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문화재의 도난에 관해 많은 안타까움을 가졌었는데..

 

[ 보물 제 495 호 고성 옥천사 청동북]

 

청동으로 제조 된  금고 또는 금구반자라고도 하며, 대중을 불러모으거나, 의식을 행할때 사용된다고 한다. 지름 55㎝, 너비 14㎝로, 4개의 테두리와, 중심원에는 6개의 둥근 연꽃열매가 있으며, 밖으로 연꽃 잎이 새겨저 있다. 가장 바깥에는 덩굴무늬가, 그 안쪽의 원에는 무늬가 없다.  둥근 고리가 3개 매달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옆면의 명문이 있어 반자(飯子)로 불리었으며, 고려 고종때에  한중서라는 사람에 의해 제작 된 것 임을 알려준다. 처음부터 옥천사에서 전해진 것이 아니라 지리산 안양사의 것이었는데, 언제부터 옥천사에 보관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고성 옥천사 청동향로, 경남 문화유산] [고성 옥천사 동종, 경남 유형문화유산]

 

소장 문화유산을 몇가지 소개하면, 높이 23㎝, 입 지름 27.5㎝인 조선시대 청동 향로에는 안쪽에 ‘의령수도사’라고 점선으로 새긴 글자가 있다고 한다. 4곳에 꽃 모양 장식에 봉황과 덩굴무늬가 새겨지고, 받침대는 문양이 없고, 조선 순조 때(1816)에 보수하였다는 글씨가 새겨 있다고 한다. 은을 입히는 방법으로 문양을 만든, 표충사 은입사 향로와 같은 수법의  작품으로,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동종은 조선시대 청동으로 만든 높이 110㎝, 입 지름 82.5㎝의 종으로, 용뉴에 두 마리의 용이 등지고 있고,  윗쪽 띠에는 2자씩으로 연결된 80여자의 범자가 새겨 있으며, 아래쪽 띠에는 연꽃 덩굴무늬가 새겨져 있다. 4곳 유곽에 덩굴무늬와 9개의 유두가 있으며,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삼존불이 양각되어 있는데, 아래쪽 띠 위편에는 ‘건륭 41년’의 글이 있어, 1776년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진주 민란 때에 파열된 것을 수리하였다고 한다.
 

 

[ 보물 제 2110호 고성 옥천사 영산회 괘불도 및 함]문화재청

 

2021년 보물로 지정 된 ‘옥천사 영산회 괘불도 및 함’은 1808년(순조 8) 수화승 평삼을 비롯하여 18명의 화승들이 제작한 것으로, 20폭의 화폭을 붙인 높이 10m 이상의 대형불화이다. 도상은 석가여래 삼존과 아난존자와 가섭존자, 6존의 부처를 배치한 간결한 구성이며, 화기에 ‘대영산회(大靈山會)’라는 화제가 있어 영산회 도상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고 한다.  18세기 후반의 괘불도 양식으로, 묵서로 제작연도와 제작자에 대한 기록이 있다.

 

[범종각]

 

천왕문으로 계곡을 따라 오르는 곳에 범종각이 자리하며 한편에는 이곳이 큰 사찰임을 알려주는 커다란 목조 비사리구가 눈에 띈다.

 

[ 보물  2022.12 고성 옥천사 자방루]

 

최근에 보물로 지정되어 번호가 없는 「고성 옥천사 자방루」는 상량문 등 기록에 따르면 1664년에 처음 건립되었고, 1764년에 누각형태로 중창되어 ‘정루(正樓)’ 또는‘채방루(採芳樓)’라 지칭되었다 한다. 옥천사 사역 내로 진입하는 길은 자방루 양쪽의 출입구를 이용하는 방식(隅角出入, 문루 아래를 통하지 않고 옆으로 출입하는 방식)이다. 정면에는 ‘옥천사(玉泉寺)’ 라는 편액이, 배면에는 ‘자방루(滋芳樓)’ 가는 편액이 걸려있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5량가 자방루는 대웅전에 비해 큰 규모로 누하주(樓下柱, 누마루 밑 기둥) 없는 단층 전각으로, 고저차로  158cm가량의 자연석 석축을 조성한 후, 그 위에 60cm 높이의 기단위에 지어졌다. 공포는 익공형 공포로 지붕의 연목이 노출되는 연등천장을 하고 있으며, 자방루의 정면의 모든 칸에는 판문(板門)을 두어 개방과 폐쇄를 조절 가능하게 하고 있다.

 

[자방루 내부]

 

 내부는 고주(高柱, 내부기둥)를 두고 통간(通間, 내부 벽체가 없음)형으로, 대웅전 쪽 마루 한 칸이 없다.  자방루의 공포와 화반(花盤, 상부 목재를 바치는 부재), 고주 상부 보아지(기둥과 대들보를 연결하는 부재)의 화려 하며, 조선후기 사찰의 누각건축을 보여준다고 한다. 왼쪽으로 대웅전을 마주하고 있는 배면에는 76cm 높이의 난간을 설치하여 개방하였다.

 

[고성 옥천사 대웅전 경남 유형문화유산]

 

 자방루에서 본 대웅전은 오늘 복원 공사 중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효종 8년(1657)에 용성화상이 다시 지었으며, 그 후에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1층이며, 팔작지붕집에 다포계 양식으로 내부의 천장은 2단으로 된 우물천장이고, 불단이 있으며 그 뒤에는 탱화가 걸려있다. 대웅전 앞에는 좌우에 당간지주가 보인다. 자방루 앞의 넓은 공터에 비해 대웅전 앞이 답답할 정도로 협소하다.

 

[ 옥천사 대웅전 내부, 고성 옥천사 대웅전 석조삼존불좌상 및 목조대좌 경남 문화유산]

 

「고성 옥천사 대웅전 석조삼존불좌상」은 1670년에 조성된 옥천사 명부전 석조 지장시왕상과 양식적으로 유사하여 ,17세기 후반에 조성된 경옥 혹은 그의 계보 조각승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개금이 된 석조불은 조선후기 불교조각의 양식흐름과 조각승 계보의 추의를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이 사찰의 특징 중의 하나가 대웅전을 기점으로 명부전 팔상전 산신각 등이 넓지 않은 곳에 나란히 자리한 구조이다.

 

[고성 옥천사 명부전 불상, 경남유형문화유산]

 

 옥천사 명부전에는 지장보상을 중심으로 좌우협시인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상, 시왕상, 귀왕상, 판관상, 사자상 등 모두 21구의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방형 얼굴에 수평 눈썹, 직각을 이루는 오똑한 코 등의 개성 있는 인상의  표현과 둔중한 신체와 한 돌로 조성된 양손 등 조선후기 석조불상의 특징이라고 한다. 제작시기(1670년)와 조성자(경옥 등)가 분명하고,  봉안처에 제작 당시의 불상이 모두 남아 있어 조선후기 불교조각 연구에 기준작으로 자료적 가치가 높은 작품으로 본다.

 

[보물 1693호 고성 옥천사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 문화재청
[제2초강대왕도] 문화재청

                                     

지장보살의 뒤에 후불 벽화인 옥천사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는 1744년 화승 曉岸의 주도 하에 11명의 화승들이 참여하여 조성되었다고 한다. 이 불화는 지장시왕도 1점, 시왕도 8점 등 총 9점으로 구성된 작품이었으나, 이 중 <제2초강대왕도>가 1976년 도난 당하였으나, 2016년 프랑스에서 발견되어 국내 환수되어 옥천사에 보관되어 함께 보물로 지정된다. 지장보살도는 중앙에 지장보살을 배치하고, 그 좌우를 2단으로 나누어 하단에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2보살을 그리고, 상단에 대칭으로 6보살을 배치하였다. 시왕도는 한 폭에 각 1위(位)의 시왕모시고, 화면 상단에는 각 시왕과 권속들이 배치되고, 하단에는 지옥장면이 묘사 되어 있다고 한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명칭고성 옥천사 나한전 목조보살좌상 및 나한상]
 
 
「고성 옥천사 나한전 목조보살좌상 및 나한상」은 조선후기인 18세기를 대표하는 색난계 조각승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나한상은 조선후기 불교조각의 흐름은 물론 색난 계보와 양식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가치가 있다고 한다. 
 

[조사전]
[팔상전]

 

대웅전 옆의 옥천 샘물로 목을 축인 후 암자인 청련암으로 발길을 욺긴다.

 
[ 청련암 전경]

 

 

옥천사 맞은 편 산등성이로 오르면 청련암이 자리한다. 사찰 앞의 마당에 데크로 만들어 현대감 마저 느끼게 하던 곳인데 돌부처와 탑이 반가이 맞아준다. 이곳의 유물도 보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경남 유형문화유산 고성 옥천사 청련암 목조관음보살좌상]
 

 

이곳의 문화재이지만 현재는 옥천사박물관에 보관 중이라 한다. 높이 48.5cm로  비례, 착의법 등이 조선후기의 특징을 보이며, 이목구비, 세부옷주름, 측면의 두꺼운 양감 표현 등에서는 희장계 조각승과 관련된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청련암의 쇠솥과 바위]

 

 통도사 철제 솥과 비슷한 모양이지만 공양에 사용 된 것 보다는 다른 용도로 쓰인 듯 하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옥천사는 임금이 사용할 어람용 종이를 만들어 진상하던 조선시대의 사찰이라고 한다. 이 를 통해 옥천사와 딸린 암자에서 종이를 제작한 것으로 볼때, 아마도 종이제조에 이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쇠솥 옆에 이야기를 담은 황소바위가 보인다. 사찰의 일을 돕던 황소에게 주지스님이 목에 염주를 걸어주니 몸에서 하얀연기를 피어 오르더니 바위로 변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에 왜장이 옥천사 침입시, 바위 앞에서 불공 드리던 스님들을 보고 부수려고 정으로 내려치자, 바위에서 선혈이 솟구쳐서  왜병이 놀라 도망 가고,  이를 계기로 왜군을 물리치고 옥천사를 지켰다는 이야기 이다. 

 

 옥천의 샘물에 기운을 회복하고 돌아 본 옥천사, 새로이 보물로 지정 된 문화재도 있고, 이 를 전시할 공간도 충분하여 고성 지방의 새로운 명소로 거듭 날 듯 하다. 간만에 다시 찾아도 마음의 안식을 얻고 가는 사찰이라 생각한다.  작은 면적에 많은 건물이 모여 있으나, 작은 규모의 건물 하나하나에 꽉 채워진 문화유산을 갖고 있는 사찰에서 다시금 도난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집으로 발길을 옮긴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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