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 예순 여덟번째 - 경주 2

세종해피뉴스 2024. 9. 1. 23:37

 많은 문화재들이 보아 달라고 눈길을 뺏지만, 보물을 알아 보는 것도 벅차다는 생각으로 이 곳 저곳  발길을 옮긴다.

 

[보물 제 1411호  임신서기석]

 

임신서기석은 점판암제로, 한 면에 5줄 74글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비석의 첫머리에 ‘임신(壬申)’이라는 간지로 이름이 임신 서기석이라 하는데, 비문의 내용은 "임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느님 앞에 맹세한다.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충도를 지키고 허물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일 이 서약을 어기면 하느님께 큰 죄를 지는 것이라고 맹세한다. 만일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우면 ‘충도’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한 따로 앞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곧 시경, 상서, 예기,춘추전을 차례로 3년 동안 습득하기로 맹세하였다.” 라고 하는데, 명문의 임신년은 552년(진흥왕 13) 또는 612년(진평왕 34)의 어느 한 해 일 것으로 보는데, 6세기 신라시대 금석문의 특징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한다. 아마도 화랑들이 돌에 새긴 것 같다.


여러 조각상들이 저마다의 특징을 가지고 배치되어 하나 하나를 둘러 볼 충분한 거리를 가지고 배치되어 있다. 

 

[전시된 조각상]

 

모습이 익숙한 수막새가 벽 한쪽을 차지하고 눈웃음을 보내고 있다.

 

[보물 2010호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

 

 2018년 보물로 지정 된  ‘신라의 미소’라 알려 진 신라시대 원와당(圓瓦當)으로, 일제시기 경주 사정리(沙正里, 현 사정동)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 진다. 이 수막새는 1934년 일본인이 골동상점에서 구입하며 존재가 알려졌으며, 일본으로 반출 되었다가 1972년 국내에 반환 되었다고 한다. 와당 조성 방법처럼 틀에 찍어  만든 것이 아니고, 와범으로 형태를 잡은 후 손으로 직접 빚어 만든 작품이라 한다. 

 

[국보 제 275호  도기 기마인물형 ]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한 높이 23.2㎝, 폭 14.7㎝, 밑 지름 9.2㎝의 인물형 토기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된다고 한다.  받침은 가야의 굽다리 접시(고배) 형태에, 두 줄로 구멍이 있다. 그 위로 모서리에 다리로 버티는 말 갑옷을 입은 말 등에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고 있는 무사가 앉아 있다. 무사는 투구에 창과 무늬가 있는 방패를 들고 있어, 당시의 방패일 것으로 주목 받고 있다고 한다. 무사의 등 뒤쪽에는 쌍 뿔모양의 잔이 있는데, 진짜 사용했고, 어찌 사용했는지 한동안 보며 추측해 본다. 이 기마인물형토기는 가야의 말갖춤(마구)과 무기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고 한다.

 

신라미술관으로 건물을 옮겨간다. 이곳은 불교조각들이 역사 전설 정토로 분류되어 전시되어 있으며 많은 보물이 전시되어 있다.

 

[이차돈 순교비]

 

고대 신라시대, 불교를 제창하다 527년(신라 법흥왕 14년)에 순교한 이차돈을 기념하기 위하여 817년(신라 헌덕왕 9년)에 건립 되었던 통일신라 시기의 추모 비석이라 한다. 원래는 1200여 년에  경주 백률사 자리에 세워져 있던 곳을 이곳으로 옮겼다 한다. 화강암제의 육면 기둥으로, 복련을 새긴 대좌 위에 자리하며, 원래는 당위에 지붕 모양의 옥개석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나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비석 제1면에 이차돈의 순교 장면이 부조되어 있는데,  땅이 진동하고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잘린 목에서 피가 솟아오르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제2~6면에는 정간에 자경 3 cm로 글자를 새겨 넣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많은 불교조각 중 금강역사의 모습이 힘차게 자리하여 그힘을 느껴본다

 

 

[사천왕상]

 

 전시실 자리 한 곳에 위치한 국보를 접한다.

 

[국보 제 28호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경주시 북쪽 소금강산의 백률사에 있던 것을 1930년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은 것으로, 사람 키 높이의 1.77m의 서 있는 불상으로 중생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약사불이라  한다. 머리는 큰편이 아니며, 단아한 우아함을 갖는듯 한 상으로 보인다. 허리에 비해 어깨가 좁은 느낌이며, 어깨를 감싼 옷은 두 팔에 걸쳐 흘러 내리고, 앞가슴에는 치마의 매듭이 보인다. U자형의 주름을 넣어 옷의 흘러 내림을 표현한 듯 하고, 하체로 갈수록 두터움으로 안정감을 느끼고, 상체가 뒤로 젖혀진 모양은 무언가를 들고 있음을 표현하려는 듯 하다. 두 손은 없으나 오른손은 위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에는 약그릇이나 구슬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금동의 전신 입상이라는 특이점을 상기하며 눈에 담으며 주위를 돈다.

전시장에는 석불상 들이 자리한다. 설명서를 읽어 보며 천천히 관람한다.

 

[석불상 들]

 

 보관에 십일면관음보살이 조각된 보살상 등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나, 이 들은 장소와 시간이 다를 뿐 조성하며 염원한 것은 결국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보물 제 2071호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

 

 이 삼존상은 비교적 최근인 2020년 보물로 지정 된 삼국 시대 미륵신앙과 신앙행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작품으로, 의좌상의 본존 미륵불과 입상의 좌ㆍ우 협시보살로 총3구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 의좌상 불상 중 가장 오래 된 작품으로서, 오른손은 손가락을 구부린 모습으로, 왼손은 주먹을 쥔 시무외ㆍ여원인의 변형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두 협시보살은 1미터 남짓에 머리에는 삼화 보관을 쓰고 각각 지물을 들고 있는 서 있다. 통통한 빰에 잔잔한 미소가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장식과 표현이 근엄보다는 자비를 느끼게 한다.

 

황룡사의 치매가 전시장 계단 옆에서 위용을 나타내고, 안으로 들어서면 황룡사구층목탑을 재현한 모형이 자리한다. 그 규모와 섬세함을 느끼면서 전시장을 둘러본다.

 

[보물 제 1870호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

 

 황룡사찰주본기는 통일신라 경문왕 11년에 성전사원인 황룡사의 구층목탑을 중수하면서 기록한 실물자료로, 구층목탑의 건립 과정과 중수 과정을 후대의 역사서가 아닌 중수 당시 제작된 유물로 전하는 점이 중요하다고 한다. 이 본기는 박거물이 찬하고, 요극일이 썼으며 이를 승려인 총혜와 조박사 연전이 전각한 것이라 한다. 특히 황룡사 목탑 건립과 관련하여 후대의 사서 기록과 비교 검토가 가능하다는 점이 역사적·기록사적 위치가 크다고 한다. 금동사리함의 내외면에 쌍구체로 쓴 찰주본기는 9세기대에 주로 쓰였던 서체로  탑지(塔誌)의 서술체계는 물론 서체 등의 중요한 자료이며, 사리장치 품목과 안치장소가 있다는 점으로 고대 탑파의 사리장엄 연구에 소중한 자료이라 한다.  사리함의 문비 내․외면에 선각된 신장상은 절대연대(872년)를 가진 유품으로 불교조각의 기준이 된다고 한다.

지난 번 방문한 감은사지에서 알게 된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함이 이곳에서 모습을 보인다.

 

[보물 제 366호  감은사지 서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국보)중 서쪽의 석탑의 3층 탑신에서 발견된 사리장치로,  청동제사각함과 사리기로 구성되고,  사각함 윗면은 완만한 사각뿔모양의 뚜껑이 있고 높이가 약 31㎝정도 되며, 네 면에는  사천왕상이 별도로 주조되어 부착되고,  양 옆에는 동그란 고리가 달려 있다. 주위를 꽃무늬를 동판에 따로 새겨 작은 못으로 고정시키고, 가장자리와 뚜껑의 둘레도 꽃과 잎무늬의 장식판으로  단을 돌리고 있다. 사천왕상은 자세나 옷의 무늬가  당나라의 조각상의 모습로 보이나, 이국적인 얼굴과 갑옷은 중앙 아시아적인 요소가 많이 확인된다고 한다. 사리기는 정사각형의 기단과 사리병을 모셔 둔 몸체,  수정으로 만들어진 보주의 3부분으로 되어, 기단엔 안상무늬에 신장상 및 공양 보살상을 배치하고, 기둥을 세우고, 기단 위에 난간을 돌리며, 중앙의 사리병을 중심으로 4구 주악상을, 사이마다 4개 동자상을 놓은 구성이나 완벽히 남아 있지는 않다.  사리병  뚜껑은 은제로 투조하고, 위에 수정의 보주가 올려져 있으며, 사리를 집을때 사용한 작은 숟가락 및 집게도 함께 발견되었다고 한다. 

 

[감은사지 석탑 사리장엄구의 총동제 사각함의 4면]

[감은사지 석탑 사리장엄구의 사각함의 윗면과 사리기]
[각종 사리 장엄구]

 

함께 전시 된 여러 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의 모습이다. 감은 사지에 비해 화려함이 없으나 나름 사리의 보관에 최선을 다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녹유신장상벽전]

 

 사천왕사지의 동서 목탑 기단부 4면을 장식하던 것으로, 일정 간격 기둥을 두고 사이에 넝쿨무늬 벽돌을 쌓은기단에 있고, 신장상벽전은 탑 기단부 4면에 각 6개씩 총 24개 설치된 것으로 신라의 승려 양지가 천왕사 탑아래의 팔부중을 제작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양지가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반가사유상과 약사불]

 

 반가사유상은 경주 송화산, 약사불은 경주 남산에 있던 불상이다. 전시실 입구에 따로 전시된 이들을 마지막으로 옥외로 향한다. 다가운 햇살을 뚫고 땀으로 옷을 적시며 보물을 찾아 발길을 옮긴다.

 

[국보 제 38호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

 

원효대사가 주지로 계시던 고선사지의 탑으로, 덕동댐 건설로 절터가 수몰되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한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은 모습의 통일신라시대 석탑양식의 탑으로, 유독 묵직하고 중압감을 느끼게 하는 탑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단은 여러 돌로 각 면에는 기둥 모양을 넣고, 탑신도 여러  돌이 짜 맞추어져 있으나, 3층 몸돌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이는 사리장치를 넣어 둘 공간을 위한 것 임을 석탑을 해체·복원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들려있고,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통일신라시대 전기인 7세기 후반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많은 석조물을 지나며 더운 날씨와 혼잡을 피해 다시금 방문하기로 맘 먹으며, 정문 옆에 자리한 성덕대왕신종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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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 29호 성덕대왕신종]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통일신라시대 범종 이다. 높이 3.66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 이라 한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위해 종을 만드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설화로 인해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리운다. 종의  위에는 우리나라에만 보이는 음통이 있고, 종을 매다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몸체는 위 아래에 넓은 띠를 둘러 꽃무늬를 새기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연꽃봉우리를 사각형의 연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에 2쌍의 비천상과  종을 치는 부분인 연꽃모양 당좌가 있다. 몸체 앞,뒷면 두곳의 종에 대한 내력으로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 뿐 아니라 당시의 종교와 사상을 알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 자료라고 한다.

 

신종 앞에서 들리는 녹음 된 종소리를 듣게 되는데, 그 종소리의 웅장함과 이어지는 공명의 여운이 길게 남아 눈을 감고 몇차례 경청한다. 더위에 지쳐가는 몸에 힘을 주는 종소리가 끝남을 아쉬워하며 박물관을 빠져 나온다. 되돌아가는 먼길로 오늘은 너무 많은 것에 매료 되어 더 이상의 여행을 접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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