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 일흔번째 - 담양

세종해피뉴스 2024. 9. 15. 00:13

오늘은 함께 공부하는 학우들과 함께 담양으로 향한다. 대나무로 유명한 지방이지만, 메타스퀘이어 길을 달려 담양으로 들어서서 대통밥으로 여정을 달래며, 배롱나무로 그 진가를 높이는 명옥현을 찾아본다. 더운 날로 인하여 마을의 출입을 제한하기 위해 마련한 주차장을 지나, 좁은 마을 길을 따라 명옥헌에 당도한다. 연못가에 자리한 배롱나무의 가지에 만개한 꽃을 달고 있지 않고 가지 끝에서만 꽃잎을 대한다.

 

명옥헌 원림 [사진제공 : 담양군청 녹색관광과]

 

정자와 배롱나무를 함께 담기가 쉽지 않은 곳이라, 마침 안내판의 이 사진에 만개한 배롱나무 꽃과 정자가 함께 담겨 있어 빌려본다. 연못 입구에 약간 높은 위치의 둔덕이 있는데, 이곳에 전망대를 세우면 사진 같은 멋진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이곳에 올때마다 아쉬웠는데, 이를 담양군청에 건의 해 볼려고도 생각해 본다.

 

[배롱나무와 연못]

다소 늦은 방문 때문인지, 물에 반영 된 붉은 빛을 비추는 흐드러진 배롱나무 꽃을 기대하고 왔는데, 배롱나무 꽃잎이 연못을 덮으며 장식하고 있다.  배롱나무는 꽃이 100일간 핀다고 해서 ‘백일홍나무’, 줄기를 간지럽히면 가지가 움직인다고 ‘간지럼나무’, 농부들이 꽃이 질 때 쯤 쌀밥을 먹는다고 해서 ‘쌀밥나무’라고 한다고 한다. 서원이나 사찰에서 기와집과 어울려 화려함을 보여 주는 이 나무는 학문과 불심의 닦음을 백일이나 피는 이 나무를 보며 지속적으로 정진하라는 뜻으로 심은 듯하다.
 
[면옥헌 윈림]
 
 
명옥헌 원림은 명승 58호로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민간정원으로, 벼슬에 관심이 없는 조선 시대 선비 오희도가  ‘세속을 잊고 사는 집’이라는 뜻의 망재(忘齋)를 지으며 시작되고, 오희도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오이정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정자를 세우고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 곳에는 수령 100년이 넘은 배롱나무 20여 그루가 세월 만큼 굵은 모습으로 주변의 소나무, 느티나무, 동백나무와도 어우러 멋진 정원을 만든다. 명옥헌 마루에서 보는 배롱나무와 주변의 풍광은 마음을 밝고 안정적으로 만든다. 이곳에는 입구에 큰 연못이 있고, 정자 뒤에 작은 연못이 있다. 
 

[명옥헌]

 

 연못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소박한 명옥헌에는 ‘삼고(三顧)’라는 편액이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오희도를 중용하기 위해 세 차례 찾아온 것을  알려 준다고 한다. 

명옥현을 나서서 또 다른 조선 정원인 소쇄원을 찾아 본다. 소쇄원(瀟灑園)은 양산보가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은둔 생활 기간 중인 1520년부터 1557년 사이에 낙향하여 향리인 지석마을의 계곡에 조성한 곳으로, 양산보의 호가 소쇄옹(瀟灑翁)이었기에 원(園)의 이름을 소쇄원이라 한 것이라고도 한다.  ‘소쇄’는 깨끗하고 시원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소쇄원 입구의  대밭]

 

 매표소로 부터 '더운날 집에서 기거하시지' 하는 방문에 대한 인사를 받고 나서 관람 도중 만난 이는 두어쌍 정도로, 더운 날로 인해 적막한 소쇄원을 누비는 행운을 맞는다. 양산보가  소쇄원을 조성하기 시작하고, 아들인 (자징 과 자정) 대에 고암정사와 부훤당을 갖춤으로써  별서원림으로 완성됐고,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되었으나 손자 천운이 재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광풍각]

 

 소쇄원은 명승 제 40호인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에 보존 된 조선 최고의 민간 정원으로, 입구에는 대봉대라는 정자가 있고, 계곡 넘어에 광풍각이 자리하는데, 광풍각으로 가는 길목에는 담장이 자리한다.

 

[ 오곡문]

 

 오곡문은  담밑의 계곡 물 바로 옆쪽의 협문으로 내원과 외원을 이어 주는 문인데, 현재 문은 자리하지 않는다. 대문 보다는 싸리문이 있었을 것 같은 느낌이며, 담 및으로 물길을 터주는 담의 모양에서 담의 여유를 느낀다.

  

 

담에 쓰여진 오곡문은 우암 송시열 친필이라 한다.

 

[광풍각과 계곡]

 

 광풍은 ‘광풍제월(光風霽月)’로 가슴속에 품은 뜻이 말끔하여 비 갠 날 청량하게 부는 바람과도 같고,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다는 [胸懷灑落 如光風霽月(흉회쇠락 여광풍제월)]”로 논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소쇄원에서 사랑방 구실을 하는 광풍각은 마루에 앉아 있으면 암반을 타고 흘러내리는 폭포를 볼 수 있다. 물의 양이 많지 않으나, 장마철이 되면 폭포수가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계곡 아래로 쏟아진다고 한다.  광풍각은 임진왜란에 불타고, 1614년(광해군 6) 양산보의 손자 양천운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광풍각은 처음엔 ‘계곡 물을 베고 자는 글방’이라는 뜻의 ‘침계문방(枕溪文房)’이라 불리었다고도 한다.

 

 

광풍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아담한 팔작지붕 정자이다. 정자의 한 가운데에 온돌방 1칸이 놓여져 있으며 그 주위로 마루가 사방으로 깔려 있다. 정자 전후에 퇴가 있으며, 온돌방 뒷면에는 90㎝ 높이의 함실아궁이가 있다. 방의 문턱에는 머름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세 방향에 삼분합의 들어열개문이 달려 있다. 이 분합문을 열어 처마 밑 창방에 걸어 두면 실내외가 하나로 통한다. 막돌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온돌방에는 각기둥을 세웠다. 천장은 연등천장과 우물천장을 혼합하였는데, 서까래가 모이는 부분은 눈썹천장으로 되어 있다. ‘광풍각(光風閣)’이라는 현판은 송시열의 글씨이다.

 

[ 광풍각과 제월당]

 

 당시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80년쯤 전에 중수하여 현재 2동이 남아 있다.

 

[제월당]

 

 제월당은 주인이 학문에 몰두 하던 공간으로 '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 ' 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현판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라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1칸 팔작지붕으로 왼쪽 한칸에 방이 있어  함실아궁이를 설치했다고 한다. 제월당은 소쇄원의 가장 높은 언덕에 있어, 정자 마루에서 보면 광풍각과 대봉대가 내려다 보이고 애양단과 오곡문 대나무 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제월당]

 

 오늘 여행의 마지막으로 보물을 찾아 나선다. 소쇄원에서 저수지 반대편에 머무는 개선사지로 향한다. 멀지 않은 길이지만 길이 잘 알려지지 않고 석등 만이 존재하여 찾는 이가 많지 않아 설렁하다.

 

[보물 제 111 호  담양 개선사지 석등]

 
 석등은 오랫동안 파묻혀 있던 것을  바닥을 파고 흩어진 부분을 정리하여 다시 세웠다고 하는데 1963년 보물로 지정된다. 높이 3.5m로, 아래 받침돌에는 엎어 놓은 연꽃 모양이 있고, 사잇기둥은 장고 모양이며, 윗 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모양이 있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은 8각으로 창이 8면에 있다. 지붕돌은 아랫면에 낮고 널찍한 괴임이 있고, 8각의 끝부분에는 꽃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석등의 창 사이 공간에 글이 새겨져 있는데, 신라시대 석등 가운데 글씨를 새긴 유일한 것이라 한다.

 

[보물 제  111 호  담양 개선사지 석등]

 

이 석등의 각 창구의 양쪽 간지에는 136자의 해서로 된 명문이 있다는데, 경문왕과 문의왕후, 그리고 공주의 발원으로 승 영판(靈判)이 석등을 조성하여 868년 첫불을 밝히고, 용기3년(龍紀三年: 891) 승려 입운(入雲)의 뜻으로 명문을 새겨넣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한다. 

걸음 옮기기도 힘든 더운 날 땀 흘리며 함께 찾은 담양에서 조선시대의 정원을 탐방하고, 역사성이 있는 보물도 둘러보며 즐거운 여행을 가져본다. 이전보다는 철책도 둘러져 있고, 주차장 시설도 갖추게 됨을 보며, 눈에 보이지 않게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보물의 보전을 위해 애씀을 느끼며 흐믓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관련기사] 如一同行 백 일흔번째 - 담양 > 뉴스 | 세종해피뉴스 (xn--vg1b03zi5a71m9wruj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