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 예순 아홉번째 - 보은

세종해피뉴스 2024. 9. 8. 10:52

 보은을 찾아본다. 그동안 불편을 주던 허리와 발바닥의 통증이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는 생각으로 산행이 조금은 요구되는 곳을 찾아보다가 복천암의 보물인 승탑을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속리산 법주사를 방문하면 많은 보물을 볼 수 있겠으나 너무 많은 보물에 부담이 가 부속 암자를 찾아 보려고 법주사로 향한다.

 

[천연기념물 보은 속리 정이품송]

 

 속리산 법주사로 가는 길 한가운데 보이는 정이품송은 나이가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는 소나무로, 높이 14.5m, 가슴높이 둘레 4.77m이라고 한다. 세조 10년(1464)에 왕의 가마가  소나무 아래를 지나게 되었는데, 처진 가지로 가마가 지나기 어려울때 가지를 들어 왕이 지나도록 하였다 하고,  또 세조가  이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세조는 소나무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정이품 벼슬을 내려 이 소나무를 정이품 소나무라 부른다고 한다. 1980년대 초 솔잎혹파리의 피해, 1993년 강풍으로 서쪽 큰 가지가 부러져 삿갓모양이 사라지어, 자연재해로 그 모습을 잃었다고는 하나 다행히 기본의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수정암]

 

 법주사를 조금 지나 복천암으로 향하는 길에 수정암이 자리한다. 수정암은 법주사 암자로서 1914년 장태수(張泰守) 비구니가 창건, 1973년 극락전과 진영각, 요사채 등을 중건하였다고 한다. 비구니 절 이어선지 정갈하게 각종 꽃 화분이 인상적이다.

 

[수정암 극락전]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으로, 안에 유형문화재인 석조여래좌상이 자리한다.

 

[수정암 극락젼 목조아미타여래 삼존상]

 

 극락전 내에는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협시보살 등 3구의 불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충북문화유산 보은 법주사 수정암 석조여래좌상]

 

 목조아미타여래 삼존상 옆 우측에 석조 여래좌상 1구가 봉안되어 있는데 조성연대는 알 수 없고, 오랫동안 수정암 비불로 전해져 왔다고 한다. 전고 92㎝인 이 석조 불상은 상호가 큼직하며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형상으로 미간에는 백호가 표현되어 있다. 수인은 촉지인이고, 손가락이 굵다. 손바닥 안에 원형 지물이 있어 약사여래로 전래되고 있다. 약합으로 보이는 이 지물은 무게로 볼 때 석재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두껍게 개금되어 석불이라는 것은 극락전 앞의 안내문을 통하여 알게 된다.

 

[세조길]

 

 수정암을 나서서 복천사를 찾아 길을 나서면 조선 7대 임금 세조가 요양 차 복천암으로 온 역사적 사실에 착안하여 붙인 이름의 세조길도 함께 한다,  

 

[복천암]

 

 복천암은 성덕왕 19년(720)에 창건되어, 고려 태조 1년(918) 증통국사(證通國師)가, 선종 1년(1084) 도생승통(導生僧痛), 예종 2년(1107)에 자정국존(慈淨國尊)이 중수하고, 조선 세종 31년(1449)에 신미선사(信眉禪師)가 중수하였다고 하는데, 이후 영조 11년(1735)에 탁융선사(卓融禪師)가 소실된 것을 재창하여 순조 3년(1803) 취준사(就俊師)가 중수하였다고 한다. 복천암 극락전은 1976년 해체 복원하였고, 아미타불상과 후불탱화, 신미대사의 탱화가 보존되어 있으며 현판 무량수(無量壽)는 공민왕 친필로 전한다고 한다.

 

[극락보전]

 

 대웅전이 아닌 극락보전은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법당이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 보은 법주사 복천암 극락보전]

 

 기단위에 조선시대 양식으로 복원한 정면3칸 측면3칸의  맞배지붕의 조선시대 불전이며,  조선후기 다포계 맞배집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측면에 공포를 갖춘 건물이다. 이 건물의 특이한 점은 내부의 고주와 이를 중심으로 구성된 불감이라한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 보은 법주사 복천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아미타불좌상을 본존상으로 하여 관음보살좌상을 좌협시보살로 그리고 대세지보살좌상을 우협시보살로 하는 아미타삼존불상이다. 삼존상은 각각 중대석이 사각인 3단 연화대좌에 봉안되어 있다. 이 불상은 법당이 1733년 화재로 소실 된 이후, 1735년부터 1737년까지의 중창불사 때에 법당과 함께 조성된 상이라 하는데,  조각장은 연기(演機), 두책(斗策), 수성(守性), 초붕(超鵬), 수견(守堅), 광붕(廣鵬) 등 임을 발원문을 통해 알 수 있다고 한다.

본존상은 하품중생인의 수인을 하고 얼굴은 풍만하고 온후한 인상으로,  법의는 변형 편단우견으로 속에 입은 편삼의 옷깃을 대의와 대칭을 이루게 입고 있다. 가슴에는 수평으로 내의의 윗단이 보인다. 좌우 보살상은 같은 모습으로 손만 좌우대칭을 이루고, 각각의 보관에 화불과 정병으로 관음과 대세지보살상임을 구별할 수 있다. 관음이 들고 있는 연꽃가지 위에는 특이하게 정병이 붙어 있다.

[삼세불도와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 보은 법주사 복천암 신중도]

 

신중도는 190㎝×158㎝로 1795년에 제작되어, 법주사 대웅보전에 봉안되었으나 후에 복천암으로 이안(移安)되어 복천암극락보전의 향우측 벽면에 현괘되어 있다 한다. 화면구성은 원근법군집구도를 써서 위로 가면서 존상들의 크기가 축소되고 있다.  중앙에 위태석천과 제석을 주존으로 하여 여러 무장신을 배치한 신중탱화로 주색은 적색과 녹색이며 배경으로는 황토색이 사용된 탱화이다. 18세기 후반에 유행한 제석천룡탱화로 화기문에 의하면 조선후기 대표적 화승인 신겸(信謙)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탱화로서 충청도 지역에 남아있는 드문 사례라 한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명칭  법주사 복천암 삼세불도]

 

복천암 극락보전 후불도는 1909년에 제작으로, 389㎝×286㎝의 석가모니불, 약사불, 아미타불을 모신 삼세불도로, 세 여래를 중심으로 하단에는 각 여래마다 2위의 협시보살과 2대천왕이 있고, 상단에는 역시 2대천왕과 8위의 제자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협시보살의 배치가 통례에서 벗어나 석가모니불의 협시보살로 그려져야 할 문수․보현보살 대신, 관음․세지보살이 그려진 점이 특징이라하는데, 경전에 근거한 도상적 안배보다는 전각의 명칭인 극락보전이나 대중적 신앙 양태를 염두에 둔 도상배치의 변용으로 여겨진다고 본다. 금어(金魚), 금호(錦湖), 약효(若效) 등이 제작한 것이라한다.

  

[복천암]

 

복천암을 나서 승탑으로 오르는 길 복천암의 전경을 눈에 담는다. 사찰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위에 대부분의 승탑이 자리하는데 어디쯤인지 정확히 모르고 산길을 따라 길을 나선다.

 

[보물 제1416호 복천암秀庵和尙찹과 보물 제1418호 복천암 學祖燈谷和尙탑]

 

산길에 힘들어 할때 쯤 올려다 보인 두 승탑을 대하니 먼길이 아니지만 발이 접히지 않게 조심하며 오른 길의 수고스러움을 잊어 버린다. 더위와  땀냄새를 찾아 달려드는 산모기를 피하며, 두탑이 비슷하다는 생각으로 방문을 인사드린 후 승탑을 둘러본다.

 

[보물 제 1416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수암화상탑]

 
옥개석은  옆의 학조화상탑에 비해 간략한 편으로, 탑신에'秀庵和尙塔(수암화상탑)'이라 하였고, 중대석에 成化十六年 八月日立(성화십육년팔월일립)'이라고 2행의 명문이 음각되어 탑의 주인공과 조성년대를 알게 하고 있다. 성종 11년(1480)에 조성되어, 수암화상이 이곳 복천암과 관계된 조선초기의 고승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 팔각원당형탑의 양식을 계승한 조선시대 초기의 탑으로서 주인공의 존명과 조성년대의 기록으로 조선시대 탑의 절대년대를 알 수 있는 기준작으로 중요한 문화유산이라한다. 
 

[보물 제 1418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학조화상탑]

 

학조화상탑은 수암화상탑과 함께 위치한 탑이다.  팔각 중대석 두 면에 걸쳐 '正德九年 甲戌五月 日立(정덕구년 갑술오월 일립)'그리고 '學祖燈谷 和尙塔(학조등곡 화상탑)'이란 명문이 있어 조선 중종9년(1514)의 건립임을 알게 하며, 주인공의 존명과 건립년대를 기록하고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탑이다. 학조화상은 성종 19년(1488) 인수대비의 명으로 해인사를 중수하였고, 연산군 6년(1500)에는 왕비 신씨의 명으로 해인사 고려대장경 3부를 인행하여 발문을 짓는 등 조선전기에 활동한 고승이라 한다.

 

[충북 유형문화유산 순조태실]
 
복천암에 이르기 전  보은 순조 태실로 가는 길이 있어,  복천암 방문 후 들리리라 맘먹는데, 산길을 날아 다니고 싶지만 아직 몸이 만들어 지지 않음을 새삼 느끼게하는 길나섬이다. 다소 무리라  그냥 지나치게 되어 자료를 올려 본다. 태실의 형태는 8각을 기본으로 한 부도(승려의 사리탑) 모양을 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8각의 돌난간이 둘러 놓았다. 앞에는 거북모양의 받침돌과 용을 새긴 머릿돌을 갖춘 태실비가 있는데, 앞면에 ‘주상전하태실’이라고 새겨 놓았다고 한다. 조선 정조 11년(1787)에 만든 것으로, 이 때부터 태실이 있는 산을 태봉산이라 하고 보은현을 군으로 승격시켰다 한다. 

 

승탑을 보고 내려오는 산길에서, 지나치는 등산객과 인사를 나누는 기쁨을 가져 본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없는데, 오늘 그 기쁨을 맞본다. 앞으로는 힘이 들지도 모르지만 조금씩 멀리 빠르게 다녀 보아야지 하는 희망을 갖게 된 날이다. 법주사를 지나며 이 곳도 한번 들려 그간에 근간에 새로이 보물로 지정된 천왕문과 소조 사천왕상을 다시금 보물로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관련기사] 如一同行 백 예순 아홉번째 - 보은 > 뉴스 | 세종해피뉴스 (xn--vg1b03zi5a71m9wruj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