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 예순 네번째 - 고령, 기장, 경주

세종해피뉴스 2024. 7. 21. 01:00

오늘은 부산이다. 보물과 여러 문화재가 있는 기장의 장안사를 찾아가는 길에, 고령을 지나며 이 곳의 자랑 거리인 장기리의 암각화를 만나 본다. 네비를 따라 들어 온 암각화 공원은 도로 곁에 빗물 침식을 막아주는 채양 건물 아래 자리하고 있다. 안내판을 보며 보물의 됨됨이를 알아 본다. 

 

[보물 제 605호 고령 장기리 암각화]

 

빗물침식을 방지하기 위한 시설 아래에는 청동기 시대 만들어진, 사람들이 자신의 염원을 신성시 하던 바위에 새긴 암각화가 자리한다. 낙동강의 지류인 회천모듬내에서 약 200m 떨어진 속칭 '알터마을'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제방을 만들기 이 전에는 유적 바로 앞까지 물이 들어 왔다고 하며, 발견 당시에는 앞쪽에 작은 웅덩이도 있었다고 한다.  바위면의 규모가 높이 3m, 너비 6m가량으로 남서쪽을 향해 있다고 한다. 주변에  작은 연못이라도 만들어 바위가 비쳐 지는 반영을 만들어 주면 운치가 있지 않을까 그려 본다. 바위만이 지붕을 이고 덩그라니 있는 지금의 모습 보다 물이 드나 드는 강가에 자리한 모습처럼 꾸미는 것이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암각화 주변을 고증으로 선사시대의 모습으로 재 탄생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암각화의 모식도]

 

[보물 제 605호 고령 장기리 암각화]

 

 저 마다의 뜻이 있을 암각화의 문양은 30여점의 '파형암각화'를 중심으로 4점의 동심원, 정확하게 형상을 알수 없는 것을 포함하여 50점 정도 조사되었다고 한다. 상징성이 있는 문양은 풍요와 다산을 빌고, 청동기 시대 확산 된 농경시대에서 필수적인 비를 부르기 위한 제사 의례를 행한 곳으로 보고 있다.

 

[확대한 모습]

 

문양 가운데 검파형 암각화는 하늘의 비를 부른다는 검의 상징성을 손잡이에 선을 조각한 장식이 있는, 이단병식석검의 손잡이를 묘사한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농경에서 풍요와 기우 의례를 위한 상징물로 이해하고,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물 또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양을 나타낸다는 의견도 있다고 한다. 

 목적지인 장안사에 당도 한다. 사찰 바로 옆에 주차장이 자리하여 여행을 한결 쉽게 한다. 신라 문무왕 13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쌍계사 라고 했다가 애장왕이 다녀간 후 장안사라 하였다고 한다. 사찰은 대웅전, 응진전, 명부전, 강당이 ㅁ자형 배치 형태며, 이를 산지중정형으로 분류한다고 한다.

 

[보물 제 1771호 기장 장안사 대웅전]

 

사찰내의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다포계 양식의 건물로 임진왜란에 불탄 것을 1638년 태의대사가 중건하고, 2009년에 대웅전 종도리에서 발견된 ‘묵서명’을 통하여  건물의 중건 및 중수 연대가 명확히 규명되어, 조선 효종 8년(1657)에 학능, 충묵에의해 새로 지었고, 이후 영조 20년(1744)에 연목 부분의 수리를 알 수 있었고, 1948년과 1951년에 부분적인 보수가 있었다고 한다.  건물이 비교적 높고, 앙곡이 강한 지붕, 정·배면의 공포 짜임새, 정면의 어칸 및 좌·우 협칸의 창호 구성, 보개천장 등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고 있다고 한다. 

  

[보물 제 1824호 기장 장안사 석조석가여래삼불좌상]

 

대웅전각내의 2014년 보물로 지정된, 삼불좌상은 17세기 중엽 경에 활약한 ‘녹원(鹿元)’이 수조각승을 맡아 제작한  불석으로 만든 것으로, 석제 불상 중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다고 한다. 본존불인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오른쪽은 아미타여래불, 왼쪽은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있다. 본존 석가여래상은 둥근 머리 위에 원통형의 정상계주와 반달형 중앙계주에  이마는 편평하다. 턱이 짧은 방형의 얼굴은 자비로운 상으로, 조성연대와 작가가 밝혀져 있는 불상이라 한다. 푸른 머리도 인상적인데 개금한 석조불이라 하니 다시금 보게 된다.

 

[유형문화재 영산회상도]

 

삼불좌상 뒤의 영산회상도는 19세기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한 금어인 금암 천여(1794~1878)를 비롯하여 6명의 화승이 참여하여 조성한 작품이다. 금암 천여는 순천 선암사의 중창을 주도한 인물로 선암사를 중심으로 지역에 편중되지 않고 폭넓은 활동을 하였으며, 금어로서 종장(宗匠)이 되었던 사람이라 한다. 

 

[대웅전 마당]

 

대웅전 좌우에 명부전과 응진전이 자리한다.  이들은 부산 유형 문화재이다.  장안사 3층 석탑에는 불기 2535년 혜경선사가 태국에서 모시고 온 부처님 진신사리 7과를 봉안하고 있다고 한다. ㄷ명부전은 1744년에 중건되어 지장보살과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모시고  주위에 명부시왕상을 모시는데, 지장삼존상 뒤의 지장보살도는 유형 문화재이며, 응진전에는 석가모니 부처와 제자들인 나한을 모시고 있으며 1899년 건립되었다고 한다.

 

[유형 문화재 장안사 명부전 지장 보살도: 문화재청]

 

장안사 명부전의 지장삼존불상 뒷 면의 이 탱화는 장안사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영산회상도와  함께 1856년에 제작된 것으로 중앙의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하단 전면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비롯하여 옆으로 사천왕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상단에는 4위의 보살이 좌우대칭으로 둘러 싸고 있다. 장안사 대웅전 석가영산회상도를 그린 금어 금암 천여를 비롯한 6명의 화승이 참여하여 조성한 작품이라 한다.

 

[응진전 유형문화재 석가삼세불좌상과 좌우의 16나한상과 영산회상도]

 

장안사 응진전에 봉안 되어 있는 중앙의 석가삼세불좌상과 좌우의 16나한상은 몸에 호분이 칠해져 있으며, 16나한상과 권속들의 법의는 다양한 색깔로 채색되어 있다. 복장의 기문을 통해 1684년에 양공, 승호, 희연, 천휘, 천담, 법자, 법종, 수종, 허예, 도신 등 9명이 관여하여 장안사에서 조성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응진전의 23구 조각상은 장안사 대웅전의 불상보다 무른 불석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대웅전 불상보다 25년 후에 조성 되었다고 한다. 

응진전 석가영산회상도는 석가후불탱화로, 붉은색 바탕에 흰색과 황색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인물의 얼굴과 대좌 일부분만을 채색한 홍탱(紅幀)이라고 한다. 석가모니와 18명의 제자를 묘사하고, 서방극락정토의 연화화생자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도상으로, 화기에 의하면, 화승 수룡 기전과 관허 의관의 지휘 하에 1882년에 조성 하였음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장안사 설법전 내의 와불상]

 

 설법전에는 와불이 자리하는데 와불의 누운 모습이 다소 꽂꽂하면서도 정적인 느낌을 받는다. 얼굴의 표정과 몸 전체의 균형미는 보아 온 많은 와불 중에는 균형미가 느껴진다. 이 와불의 복장에는 불기 21545년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미얀마 마옹매이 절 원로 의장이신 고승 우쭈리아 샤야도우 스님께서 봉정받아 봉안하고 있다고 한다. 

사찰을 나와 바닷가를 따라 가다 경주 양남 주상 절리를 지난다. 

 

[경주 양남 주상절리]

 

[경주 양남 주상절리]

 

 바닷가에 누운 기둥에 쓰면 좋을 듯한 모양의 바위가 눈길을 잡는다. 가는 길에 감은사지를 들러본다. 마침 해가 넘어가는 풍경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아 당도하니, 석양이 들기 시작하는데 새털 같은 구름이 드리워져 몽환의 분위기가 눈을 즐겁게 한다. 감은사는 삼국을 통일 한 문무왕이 새 나라의 위엄을 세우고, 동해로 쳐들어 오던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동해 바닷가인 이 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문무왕은 살아 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아들인 신문왕이 뜻을 이어 즉위 이듬해인 682년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국보 제 112호 경주 감은 사지 동서 삼층석탑]

 

 신문왕 2년에 세워 진 감은사는 삼국 통일 후 나타나는 신라 쌍탑가람배치의 첫사례라 한다. 두탑은 조립한 방식이나 사용된 석재의 수는 같으나 동탑이 서탑에 비해 부재들이 조금씩 크다고 한다. 

한동안 서탑의 복원공사로 차일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오늘은 석양을 배경으로 나란이 그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 국보 제 112 호 경주 감은 사지 동탑]

 

[국보 제 112 호 경주 감은 사지 서탑]

 

 감은사터 넓은 앞 뜰에 나란히 서 있는 쌍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으며, 옛 신라의 1탑 중심에서 삼국통일 직 후 석탑으로 조성된 쌍탑가람으로는 최초의 배치라 한다. 두 탑은  모두 3층만 하나의 돌이고 나머지는 각 부분 들이 하나의 통돌이 아니라 여러개의 부분 석재로 짜 맞춘 것이라 하는데, 돌과 돌을 고정하기 위해서는 쇠로 만든 은장을 사용하였으며, 탑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 돌과  함께 장식의 중심을 뚫어 세운 쇠기둥이 찰주가 남아 있다고 한다. 1959년과 1996년 서탑과 동탑을 각각 해체 수리하고, 서쪽탑 3층 몸돌에서는 금동 사리기(보물)와 금동 사리외함(보물)이 발견된다.

 

[ 보물 제366호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

 

 서쪽 석탑을 해체·수리하면서 3층 탑신에서 발견된 사리장치이다. 사리를 모시기 위한 청동제사각함과 그 안에 있던 사리기로 구성되고, 사리기를 넣었던 사리감은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발견 당시 몹시 부식된 상태였다. 실 모습은 경주 박물관에 가서 보아야 한단다.  

 

[감은사지 금당터]

 

 감은 사지는 강당· 금당· 중문이 일직선 상에 배치되고, 금당 앞에는 동.서쪽에 두 탑을 대칭적으로 세우고, 이 건물 들은 모두 회랑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이러한 배치는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것이라 한다. 금당의 지하에는 배수 시설이 있으며, 전설로는 죽은 문무왕이 바다 용이 되어 이 시설을 통해 왕래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언제 절이 무너졌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서있는 이 곳까지 물길이 통하였다고 하는데, 저물어 가는 해를 대신하여 탑을 밝히는 조명이 탑의 웅대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두 탑은 흘러 간 시간 속에 사라져 간 많은 것을  보아 온 세월속의 연륜을 안고, 외롭지 않게 서로를 의지 하며  세월의 흐름을 안고 굳건히 서 있는 듯하다. 석양 빛과 조명 아래 자리한 두 탑을 보며 지나는 시간 속에서  언제 인지 모르는, 내게 주어진 삶을 동행인과  의지 하며 잘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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