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 예순 두번째 - 당진

세종해피뉴스 2024. 6. 30. 22:24

- 안국사지

 

 당진의 보물을 찾아 나서 본다. 가는 길목에 있는 면천의 향교를 방문하고저 길을 벗어난다.

 

[골정저수지]

 

 입구에 자리한 골정저수지에 아직 연꽃을 피워내지는 못하지만 한적한 풍경을 보여준다.

 

[면천 향교]

 

 홍살문을 앞 세우고 하마비가 세워진 향교에 당도한다.

 

[면천 향교]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으로, 향교를 세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태조 1년(1392)에 세웠다고 전한다. 건물 배치는 앞쪽에 강당인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있으며, 뒤쪽에 제사지내는 공간으로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명륜당]

 

 들어가서 본 모습이 아니라 자세히 본 모습은 아니다. 잘 보존된 모습으로 앞이 트인 강당 형태가 아닌 것이 차이나 보인다.

 

[동재와 서재]

 

 학생들의 기숙사인데 이 곳도 특이 하게 동.서재의 건물 형태가 다른 향교와 다르다.

 

[대성전 입구]

 

 밖에서 안의 형태만 짐작하게 된다.  대성전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고 하며, 대성전 좌우에 있는 동무와 서무는 규모와 형식이 같은 건물로  앞면 3칸·옆면 1칸에 지붕은 사람인 맞배지붕이라 한다. 이 외의 건물로 내삼문과 외삼문 등이 있으며, 해마다 음력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다음에는 드론이라도 준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보려 한 안국사지를 찾아 길을 옮긴다.

 

[안국사지]

 

안국사지는  안국산(일명 은봉산)에 위치한 폐사지로, 안국사는 창건된 해가 분명하지 않으며, 절 안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통해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 폐사되었던 것을, 1929년 승려 임용준이 주지가 되어 다시 일으켜 세웠으나, 곧 다시 폐사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고 한다. 절터에는 탑과 석조여래삼존입상이 보물로 보전되고 있다.

 

[보물 제 101호 당진 안국사지 석탑]

 

안국사지 정면의 이 탑은 안국사지 있는 탑으로, 탑은 아래부분인 기단부가 다른 탑들에 비해 간단하고, 2층 이상은 탑 몸돌이 없어진 채 지붕돌만 포개져 있다. 탑신은 유일하게 1층 몸돌만이 남아있는데, 각 귀퉁이에 기둥을 새기고 한 면에는 문짝 모양을, 다른 3면에는 여래좌상이 자리한다. 각 층의 지붕돌은 크게 보이며, 처마 밑은 깊이 자리한 4단의 지붕돌 밑면받침이 있다. 전체적으로 균형감이 없고, 조각도 형식적이며, 1층 몸돌이 작아서 우수한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고려 중기 석탑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탑이라 한다.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탑의 뒤편에는 높이 5m에 가까운 큰 석불입상이 있다. 머리에는 커다란 사각형의 갓을 쓰고 있고, 얼굴은 몸에 비해 어색하게 큰 편이다. 불상의 몸은 대형으로 네모난 기둥같은 느낌도 준다.  몸에 팔과 손을 붙여 일반적인 석불과 다른 형태를 보인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있으며, 왼손은 배에 붙여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는 모습이며, 좌우에는 본존불을 모시는 보살상이 있는데, 오른쪽 보살은 허리까지 묻혀 있고 왼쪽 보살은 머리만 파괴되었을 뿐 형식은 본존불과 같다. 세불상이 모여 있어 나름의 볼거리가 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고려시대 충청도 지방에서 유행하던 불상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당진 안국사지매향암각이 있는데, 불상의 뒷편에 눈에 들어오는 바위는 자연석의 통바위로, 높이 2.93m, 길이 13.35m, 폭 2.5m이라 한다. 형태가 배모양 같다 하여 '배바위' 또는 고래모양이라 하여 '고래바위' 또는 베틀에 딸린 북모양이라 하여 '북바위'등으로 불리우며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있다. 이곳에 매향 내용이 암각되어 있다고 한다.

 

[배바위]

 

 매향비는 매향 의식을 행한 시기, 주체, 향을 묻은 곳을 표시한 비인데, 별도로 비석을 만들지 않고 자연적으로 생긴 바위에 글씨를 새기기도 하며,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에 특히 유행하고, 향촌 공동체에서 주도 하였다고 한다. 매향 의식은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이 와서 중생을 제도할 때 교화를 받아 정토에서 살고자 하는 염원이 담긴, 현세의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백성들의 열망이 미륵 신앙에 바탕을 둔 매향이라는 행위로 나타난 것이라 한다.

 

 

[당진 안국사지매향암각]

 

 눈으로 보고, 내 안목으로는 알 수 없는 배바위의 암각 명문은 매향과 관계된 고려말, 조선초의 기록으로서 전국에서 발견된 매향관련 명문 중 비교적 이른 시기의 자료이며, 조성시기를 달리하는 2건의 매향자료가 기록되어 있어 안국사지 및 주변지역의 역사와 매향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고 한다.

 

안국사지에 소장된 보물을 보며 어딘가 세련 되지는 못하지만, 충청지방의 석불 조각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그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가져 본다. 큰 길에서 다소 외진 이 곳에 이루어진 불사를 보며, 절터가 세워질 당시 이 곳은 어떠 한 곳이었는지 궁금증이 생긴다. 뙤약 볕에 사지 주변을 다듬으시는 보살님과 몇 마디 섞으며, 세월이 가도 누군가는 문화유산을 돌보려 하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문화재를 눈으로 탐하고 만 다니는 나에게 그 들은 고마운 분 들이라는 생각으로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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