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 예순 한번째 - 합천

세종해피뉴스 2024. 6. 24. 15:39

- 영암사지

합천으로 길을 들어선다.  오늘은 함벽루와 쌍사자 석등이 있는 영암사지를 찾아보려 가는길로 먼저 함벽루를 찾는다. 탁트인 강변에 자리하여 시원한 강바람을 즐긴 옛 사람의 풍류를 넘겨 짐작해 보며 눈앞의 함벽루에 이른다.

 

[함벽루]

 

함벽루는 1321년 고려 충숙왕 대에 당시 합주지주사 김영돈 (1285-1348)이 처음 창건하고,  이 사실을 기문으로 적은 이는 안진이라는 분 이라 한다. 이 누각은 여러 차례에 걸쳐 중건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하며, 당대의 문인인 이황(李滉), 조식(曺植), 송시열(宋時烈) 등과 같은 조선시대 최고 지식인 들의 글이 누각 내부 현판에 걸려 있다.

 

 

 

뒤 암벽에 새겨진  함벽루라는 글은 송시열의 글씨라 한다.

 

 

 

강가에 지어져 비가 내리면 누각 처마를 통해 빗물이 황강으로 바로  떨어지는 것이 멋이라 한다.

 

[함벽루]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에 들보 5량(樑)으로 조성된 이층 목조기와집으로, 강가의 시원한 바람과 탁트인 조망을 가진 정자이다.

 

함벽루와 연호사

 

 강 건너에서 보는 모습은 죄측으로는 연호사가 자리하며 데크로 이어지는 길을 따르면 절벽바위의 풍광이 이 곳에 함벽루가 왜 세워졌는지 짐작케 한다.

 

소목리의 정자

 

길을 나서 영암 사지로 가는길에 황계폭포에서 황강으로 들어가는 계류가 이룬 절벽이 눈길을 잡아 차를 멈춘다. 

황매산 군립공원을 지나 이 곳 황매산의 남쪽 기슭로 찾아든다.  

 

[영암사지]

 

영암사는 처음 지어진 연대는 정확히 모르나, 고려 현종 5년(1014)에 적연선사가 이 곳에서 83세에 입적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홍각선사비의 조각 중에도 ‘영암사’라는 절의 이름이 보이는데, 홍각선사비가 886년에 세워졌다는 점에서 영암사의 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절터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쌍사자석등(보물)·삼층석탑·귀부, 당시의 건물 받침돌·각종 기와조각 들이 남아있다. 먼저 영암사지의 왼쪽 편에 독립적으로 자리한 2기의 귀부를 찾아본다.

 

[귀부]

 

1968년 보물로 지정된 귀부(龜趺) 2기는 법당터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남아 있다. 귀부는 거북의 모습을 하고 있는 비의 받침돌로, 원래는 그 위로 비몸돌과 비머릿돌이 얹혀 있었을 것이나, 양쪽 모두 지금은 귀부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보물 제 480호 합천 영암사지 귀부: 동쪽]

 

동쪽 귀부는 거북의 등무늬가 6각형이고, 비몸돌을 괴는 네모난 비좌(碑座) 주위에는 아름다운 구름무늬가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거북이지만 머리는 용머리처럼 새겼고, 목은 똑바로 뻗어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이 귀부 2기는 각 부 양식이나 주위의 석조유물 등과 관련지어 볼 때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보물 제 480호 합천 영암사지 귀부: 서쪽]

 

  서쪽 귀부도 6각형의 등무늬를 배열하였고,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는 4면에 안상(眼象)을, 가장자리에는 연꽃잎을 새겼다. 서귀부는 동쪽 귀부보다 얇고 약간 작지만 거의 같은 솜씨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덩그란히 양쪽에 배치 된 귀부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 궁금해 하며 옆에 자리한 사지로 들어선다.

 .

[영암사지]

 

 삼층석탑과 석등 만이 이전에 사찰이었음을 알게 한다. 영암사의 건물터는 일반 사찰 건물과 다른 특징이 있다는데, 금당이 있는 상단 축대의 중앙 돌출부 좌우에 계단이 있는 점, 금당지 연석에 얼굴모양이 조각되고, 3면에 동물상을 돋을 새김한 점, 서남쪽 건물터의 기단 좌우에 계단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고 한다. 보기에도 석조물이 독특한 모양이라는 생각이 든다.

 

[금당터]

 

영암사의 정확한 창건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통일신라 전성기 때의 많은 유물들이 남아 있어 그 즈음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절터 안에는 법당터를 비롯한 여러 건물의 기단(基壇)이 남아 있어 당시의 거대했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발굴을 통해 조사해 본 결과, 불상을 모셨던 금당·서금당·회랑터·기타 건물터가 확인되어 당시 절의 규모를 알 수 있고, 금당은 3차례에 걸쳐 다시 지어진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보물 제 480호 합천 영암사지 삼층석탑]

 

1968.12. 보물로 지정된 이 탑은 탑신부가 무너져 있던 것을 1969년에 복원하였으며,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3층석탑으로 통일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고 한다. 기단은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탑신부(塔身部)는 몸돌과 지붕 돌이 각각 한 돌로 모서리에 기둥을 새겼다. 1층 몸돌이 약간 높은 편이며 2·3층은 크게 줄었다. 지붕돌  받침은 4단씩이고, 지붕의 경사는 완만하고 네 귀퉁이는 살짝 치켜 올라갔다.  탑의 머리장식부분은 전부 없어졌으나, 3층 지붕돌의 윗면에 쇠막대를 끼우던 구멍이 있다고 한다. 신라석탑의 양식을 잘 이어받고 있으나, 기둥 표현이 섬약하고 지붕돌 받침수가 줄어든 점으로 보아 건립시기는 9세기경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보물 제 353호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영암사터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1933년경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가져가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막아 면사무소에 보관하였다가 1959년 절터에 암자를 세우고 원래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한다.  이 석등은 사자를 배치한 가운데 받침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기본 형태인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데, 아래받침돌에는 연꽃모양이 조각되고, 그 위로 사자 두 마리는 가슴을 맞대고 서 있는 모양이다. 사자의 뒷발은 아래 받침돌을 딛고, 앞발은 들어서 윗 받침돌을 받들고 있으며, 머리는 위로 향하고 갈퀴와 꼬리, 근육 등의 표현되어 있다. 화사석은 4면에 창이 있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조각되어 있으며, 지붕돌은 8각으로 여덟 곳의 귀퉁이에는 자그마한 꽃조각이 솟아있다.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과 견줄 수 있는 걸작이라고 한다. 

 

[영암사지 원경]

 

 황매산을 배경으로 삼아 축대 위에 자리한 사지에  석등과 석탑 만이 덩그란히 자리한 모습이 예전의 사찰을 짐작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입구에 새로이 사찰이 자리하나, 사지에서 느끼는 석조물 만이 남아 과거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은 아마도 외세의 침략 전쟁으로 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행 중에 느끼며 보게 되는 외세의 침략에 의한 문화재 소멸을 보며,  또한 우리는 아직도 전쟁으로 부터 안전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있다는 생각에, 저물어 가는 아무도 없는 사지 만큼 허전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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