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 예순번째 - 양양

세종해피뉴스 2024. 6. 18. 23:59

동해를 찾아본다. 오늘은 낙산사를 찾아 나서는 길이다. 화재 이후의 복원 된 모습과 이 곳의 보물들을 알아보려 한다. 가는 길목의 하조대 간판에 이끌려 길을 들어선다. 등대로 향하는 길은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건너편 산자락으로 발을 옮겨 정자로 향한다.

 

 

 

하조대는 조선의 개국공신 하륜과 조준이 잠시 은거한 곳으로, 두분의 성을 따서 불린다고 한다. 조선 정종 때 정자를 건립되어 퇴락하여 철폐되고, 수차례의 중수를 거쳐 1940년에 8각정이 건축되고, 동해의 절경을 볼 수 있는 돌출 된 만의 정상부에 위치 하는데, 현재의 건물은 1998년 해체복원한 건물로, 초익공 굴도리양식의 육모정으로 지붕에 절병통을 얹은 구조이며, 이 곳엔  조선 숙종 때 참판 벼슬을 지낸 이세근이 쓴 "하조대"가 암각화되어 있다.

 

 

 

'애국송' 이라 불리는 바위 위의 수령 200여년의 소나무는 돌틈에서도 녹색의 잎을 가지고 바위 위에서 푸른  바다를 보고 서있다. 오래전 본 모습에서 별 반 다를 것이 없이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놀랍다.

 

 

 

길을 달려 낙산사에 도착하여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낙산사 일주문을 지난다.  낙산사는 낙산(오봉산)에 있는 사찰로, 신라 문무왕 11년(671년)에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의 전설에 의하면 의상이 관세음보살을 만나고자 낙산사 동쪽 벼랑에서 27일 동안 기도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바다에 투신하려 하였는데, 이때 바닷가 굴 속에서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여의주와 수정염주를 건네주며 "내 전신은 볼 수 없으나 산 위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대나무 2그루가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는데, 그곳이 바로 원통보전 터라고 한다. 이를 계기로 오봉산을 관세음보살이 있는 낙산(보타락가산)이라 여겨 '낙산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데크 길을 돌고 돌아 낙산사로 향한다. 소나무 사이 사이 깔아놓은 데크길을 돌아 올라가며 가벼운 명상에 잠겨본다.

 

[홍예문]

 

조선 세조 13년(1467)에 낙산사 행차하여 절 입구에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돌문으로,  당시 강원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으로,  각 고을의 석재를 하나씩 보내와 26개의 화강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홍예문 위 누각은 1963년 세운 것으로, 앞면 3칸·옆면 1칸의 문루이다. 

2005년 4월 대화재로 낙산사 의 대웅전과 보타전, 원통보전 그리고 이를 에워싸고 있던 원장(垣墻), 홍예문, 요사채 등 목조 전각들이 불에 타 전소되고, 보물 479호인 '낙산사 동종' 등이 불에 타게 된다. 이때 남은 것은 의상대와 홍연암 이다.

 

[사천왕문]

 

낙산사 사천왕문은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이며, 맞배지붕으로 내부에는 양 측면에 사천왕이 모셔져 있다. 이 건물은 6·25전쟁 및 2005년 산불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2005년 산불이 사천왕문 앞에 있는 큰 벗나무 두 그루가 불을 막아 화마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천왕상]

 

이 사천왕상은 조선 말기에 김주성이 조성하고, 근래 사천왕상을 개금하였다.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持國天王) 비파를,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긴 검을 들고 있고,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용과 비사사를 거느리며,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보탑과 창을 들고 있다.

화재이후 복원된 원통보전 으로 들어선다. 예전에 본 고찰의 이미지를 느낄 수 없었으나, 탑이 예전 기억에 머물게 한다.

 

[보물 제 499호 낙산사 칠층 석탑과 원통보전]

 

 다행히 원통보전 바로 앞 낙산사 7층석탑(보물 499호)은 불에 약간 그을리기만 했을 뿐 별다른 `화상'이 없으며, 이 건물 안에 모셔져 있던 건칠 관음보살좌상(보물 1362호)도 불이 번지자 승려들이 안전한 지하로 옮겨 놓아 구사일생으로 화를 면했다.

 

[보물 제 1362 호 양양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

 

2003년 보물로 지정되며, 산불에서 화를 당한 낙산사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던 불상으로 승려들의 노력으로 화를 면한 건칠불상이며, 근처의 영혈사에서 모셔왔다고도 전해진다. 금속으로 만든 팔각 대좌 위에 약간 숙여 마치 굽어보는 듯한 느낌을 주며, 둥글고 탄력적인 얼굴에,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가슴 부분이 두드러지며, 오른손은 가슴에 왼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 모양으로,  내의 깃이 가슴 밑을 수평으로 가로 지르고 있으며, 구슬장식을 하고 있다. 표현수법으로 고려 후반의 전통양식을 바탕으로 한 조선초기의 작품임을 짐작하고 있다.

 

  [보물 제 499호 낙산사 7층 석탑]

 

이 석탑은 창건 당시 3층이던 것을 세조 13년(1467)에 이르러 현재의 7층으로 조성한 탑으로 전하며 이때 수정으로 만든 염주와 여의주를 탑 속에 봉안하였다 한다. 고려시대의 여운이 남아 있는 석탑 중 하나로, 탑의 받침인 기단부는 정사각형의 바닥 돌 위로 밑돌을 놓고, 윗면에 24잎의 연꽃무늬가 있다. 탑신부는 지붕돌과 몸돌을 1층으로 하여 7층을 이루고 있다. 각 층의 몸돌 아래로는 몸돌보다 넓고 두꺼운 괴임이 1단씩 있는 것이 특이하다. 지붕돌의 네 귀퉁이의 들림이 멋지게 느껴진다. 탑의 머리장식부에는 찰주를 중심으로 원나라의 라마탑을 닮은 장식들이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한다.

 

 

[낙산사 담장]

 

복원후 옛스러움은 없으나, 법당인 원통보전의 둘레를 사각으로 에워싼 담장으로, 안쪽의 담벽을 기와로 쌓고, 바깥쪽은 막돌로 쌓은 이 담벽은 높이 3.7m, 길이 220m로,  암키와와 흙을 차례로 다져 쌓으면서 위아래로 줄을 맞추고, 일정간격 둥근 화강석으로 변화를 준 벽면이며. 담장 위에는 기와로 지붕을 이어 담벽을 보호하고 있다. 조선 세조(재위 1455∼1468)가 낙산사를 고쳐 지을 때, 처음 이 담장을 지었으며, 최근에 연결하며 보수하였다고 한다.

[원통문]

 

 원통문을 지나 언덕을 걸어 바닷가의 해수 관음 상으로 발길을 옮긴다.

 

[해수 관음상, 양양 낙산사 홍련암과 의상대]

 

 발길을 옮겨 해안으로 향하면 보이는 해수 관음상과 홍련암, 의상대를 접한다. 의상대와 홍련암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로 소개된 곳으로, 671년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는 “낙산사”와 낙산사 창건 당시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한 해안 암벽 위에 설치하였다는 “의상대”,  의상대사가 홍련 속의 관음보살을 친견하여 설치한 “홍련암” 등 낙산사의 곳곳에 의상대사와 관련한 전설이 전하는 곳이다.

홍련암은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세웠고, 광해군 12년(1619)에 고쳐 세운 기록이 남아 있으나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6년(1869)에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의상대사가 붉은 연꽃 위에 나타난 관음을 직접 보고, 대나무가 솟은 자리에 홍련암을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건물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홍련암 법당 바닥에 엎드려 홍련암 밑의 계곡사이 바위로 밀려오는 파도를 구경 한 생각이 난다. 

의상대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낙산사를 지은 의상대사를 기념하기 위해 1925년에 만든 정자로, 원래 이곳은 의상이 낙산사를 지을 당시 머무르면서 참선하였던 곳으로 옛부터 의상대라 불렸다고 한다.

오늘의 방문 목적지이며 이 곳을 방문하게 만든 보물을 찾아본다. 해수 관음상에서 홍련암으로 가는 길 해안쪽에 자리한 사리탑이다.

 

[보물  제 1723  호 양양 낙산사 해구관음 공중사리탑.비]

 

사리탑1기, 사리비1기, 사리장엄구 일괄 (7종 37점)이 2011년 보물로 지정된다. 건립의 절대연대가 1692년으로 밝혀지고, 드물게 현존하는 승탑형 불사리탑의 새로운 예로 평가되며, 조선시대 왕릉의 장명등과의  유사성으로 양자 사이의 교류 관계와 양식의 영향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공중사리탑과 그 안에서 수습된 사리장엄구의 가치는 모두 불사리를 모시려는 목적 아래 만들어진 일관 유물이며, 서로  보완적인 기능과 의미를 지녀 높은 가치가 있다고 한다.  특히 비문의 내용이 사리장엄구의 일부를 이루는 문서 내용과 일치한다는 점이 공중사리탑, 공중사리비, 사리장엄구가 이런 관계 속에 존재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공중사리탑과 공중사리비와 사리장엄구 일괄은 관련 유물 가운데 어느 하나 결실되지 않고 고스란히 온존하고, 이렇게 관련 유물이 갖추어진 형태로 전해지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보물로 보전해야 하는 관점들을 새로이 알게 된 비라 생각한다.

 

[보타전]

 

 웅장한 모습의 보타전을 보타락 누각2층에서 바라보며 사찰에서 제공하는 냉음료를 즐기며 바라본다.

 

 

낙산사를 나와 한가한 진고개를 넘다 보니 진고개 정상 휴게소가 들어온다. 많은 이의 발길이 찾던 곳 이며 추억의 장소이었는데 한갖진 모습을 보니, 많은 것이 늘 그 자리를 지키지만, 인간들은 늘 변화하고 적응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져 본다. 이 전의 방문보다 많은 불사를 통하여, 산불로 인한 상처를 딛고 복원되어 많은 이들의 방문으로 활기참과 풍성함을 갖는 낙산사에서 얻은 감정을  이곳 진고개의 텅빈 주자창에 내려놓고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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