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 쉰 아홉번째 - 강화

세종해피뉴스 2024. 6. 13. 17:59

강화로 들어서 본다. 이번 발길은 강화군 장정리의 석탑과 석조여래 입상 보물을 찾아보기 위함이나, 다리를 들어서며 바닷가에 설치된 보를 보지 않을수 없어 찬찬히 섬의 해안길을 따라 돌아본다. 강화도에는 5개의 진과 7개의 보, 53개의 돈대가 섬전체를 에워싸고 있다고 한다.

 

[초지진]

 

강화로 들어서며 1656년 강화유수 홍종보가 초지진과 이때 심은 것으로 추정된 400여년 된 소나무의 위용을 보여준다. 1871년  신미양요때 미군에, 1875년  운요호 사건시 일본군과의 포격전에  무너졌다고 하는데, 이때의 포격에 의한 상처가 소나무에 남아 당시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덕진진]

 

 덕진진은 방어 요충지며, 수영에 속하는 진으로 덕진돈, 남장포대 등이 이곳의 관활이었다 한다. 돈대와 포대는 조선 숙종5년 설치되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에 외세와 싸운 장소로. 신미양요때 미해병대에  점령되어 홍예문만 남고 파괴되어, 1977년 돈대와 성곽을 보수하고 덕진진의 성문인 공조루를 복원하였다 한다.

 

[광성보]

 

 우리의 역사속에 많은 외세의 침략으로 아프고 상처받은 일이 많지만, 고려 무신정권 시대 몽골의 침입에 대비해 만들어지고, 조선 효종 대에 재건되어 , 광성포대, 광성돈대, 용두돈대, 손돌목돈대 등의 여러 포대와 돈대가 소속되어 있는 광성보는 신미양요 때 미국과의 치열한 격전지로,  어재연 장군과  500명의 군사가 초지진, 덕진진을 함락하고 오는 미국에 맞서 손돌목돈대에서 치열한 백병전까지 벌이나,  지휘관 어재연, 동생 어재순과  군사 300여 명이 죽거나 다치고 20명이 포로, 100명이 자결하는 대패를 당한 가슴아픈 곳으로, 폐허를 1970년대 복원하였다 한다.

 

[갑곶돈대내 화기, 불랑기, 소포, 대포]

 

강화전쟁박물관과 함께 하는 갑곶돈대는 1232년 고려의  강화 천도 후 몽골과의 항전을 해온 요새로, 병인양요, 신미양요의 격전지 중 한 곳이다.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지역에 돌이나 흙으로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로, 감곶돈대는 숙종 5년 완성된 48개의 돈대 중 하나이며, 병인 양료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 한다. 1977년 복원되고 조선시대의 대포를 전시하는데, 블랑기(佛狼機)는 탄환과 화약을 장전하는 자포(子砲)와 이를 발사하는 모포(母砲)가 분리되어, 연속사격이 가능한 포로 임진왜란 후 널리 사용되고, 소포와 대포는  포구에 화약과 포탄을 장전하고 뒤쪽 구명에 점화하여 사격하며, 사정거리는 소포가 300m, 대포가 700m라 하는데, 포탄자체가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다고 한다.

 

[월곶돈대]

 

숙종때 강화유수 윤이제가 정비한 것으로 알려진 타원형의 성벽으로 유럽의 성을 연상시키는 성벽을 가진 월곶돈대는 문루인 조해루와, 조선 무신인 황형택지비를 지나 작은 언덕에 자리한다.

 

[연미정]

 

 오르며 보이는 성벽도 특이한데 안에는 옛 정취가 느껴지는 고려시대 정자이다. 월곶리가 한강과 임진강 합류 지점으로 하나는 서해로, 하나는 갑곶 앞을 지나 인천쪽으로 흐르는데, 그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 하여 연미정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후금의 침입으로 인한 정묘호란시 정묘 약조의 화의가 맺어진 곳이 이 곳이라 한다.  500년 넘은 듯한 느티나무 두그루 중 한구루는 부러진채  돈대안에 자리하고,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북으로 개풍군과 파주시, 동으로 김포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민간인통제구역 이북에 속하여 출입에 제한이 있었으나,민간인통제구역에서 해제되어 관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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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

 

 연미정 앞의 머무르섬(유도)은 500여m 떨어진 비무장지대 내에 위치한 무인도이며,  1996년 대홍수 때 떠내려 와 이곳에 고립된 황소를  표류 5개월 만에 해병대가 구조 하여 '평화의 소'라고 불리며 알려진다.  오래 기간 비무장지대라 구조가 쉽지 않음을  알게해 준  소는 제주에서 천수를 다했다고 한다. 북한지역이 눈앞에 보이는 곳으로 분단의 현실을  눈으로 느끼는 곳이다. 자리를 옮겨 장전리로 향한다.

 

[보물 제 10호 강화 장전리 오층 석탑]

 

 좁은 마을길을 돌아 낮은 언덕 중턱에 위치한 절터가 보인다. 그 규모를 알 수가 없으며, 봉은사지로 추정 하나 가람을 배치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보물 제 10호 강화 장전리 오층 석탑]

  

 손상이 많고 부재도 없어진 모습으로 자리한다. 기단의 네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이, 탑신부은 1층 몸돌만 두 장의 돌로 짜여있고, 나머지는 각각 하나의 돌이다. 1층 보다 2층 몸돌의 크기가 급격히 줄고, 지붕돌은 밑면에 1층은 4단, 나머지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추녀밑은 네 귀퉁이가 약간 치켜진 듯 한데 추녀마루가 깨어져, 정도를 알 수 없다. 신라석탑의 양식을 이어받아 변형된 고려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u자형으로 마을을 돌아 다른 길로 접어들면 보물 입상을 만나게 된다.

 

[장전리 석조여래 입상 보호각]

 

 현재는 전각을 만들어 보호 중이다.

 

[보물 제 615호 강화 장전리 석조여래 입상]

 

강화군 봉천산 아래에 자리잡은 할머니를 닯은 듯한 고려시대의 석조불상으로, 두꺼운 화강암의 판석에 돋을새김으로 조성된 석조불이다. 민머리에 상투 모양의 작은 머리(육계)가 있으며, 눈·코·입의 표현이 둔중해 보이며,  귀는  길며, 목이 짧아 삼도(三道)가 가슴까지 내려와 있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두껍게 표현되어 신체의 굴곡을 드러내지 못하고, 좁은 어깨선은 움츠러든 모습을 느끼게 한다.  U자형의 옷주름은 간략하게 처리되고, 2줄의 선으로 몸광배와 머리광배를 표현하는데, 2줄 사이에는 둥근 구슬도 보이며, 광배의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있다. 양감의 얼굴, 짧은 목, 움츠린 어깨, 옷주름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가진 작품이라고 한다.

 

강화에서 장점리의 보물을 접하니, 문화유산들이 그 가치가 다르지 않을 것인데 역시 많은 이의 관람이 있어야 빛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월곶 돈대에 자리한 연미정에서 넘겨다 본 이북의 모습에서 왜 이리 전쟁으로 우리는 많은 외침을 받고, 그러한 일이 아직 멈춘게 아니고 지금 진행 중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문화유산과 국토의 보전, 그리고 우리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군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 보며, 이는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이루어 내야 한다고 걱정하며 다리를 건너 강화를 벗어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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