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 쉰 일곱번째 - 남해

세종해피뉴스 2024. 5. 26. 23:20

오늘은 남해를 방문한다. 해외거주 형님 내외와의 여행 길을 함께 한다. 숙소인 남해에서 일박 후 동이던 서던 바닷길을 따라 이동 할 생각으로 나선 길에 쉽게 접하기 어려운 사천의 선진리 왜성을 들려본다. 몇번의 방문은 이곳에 만연한 벛꽃을 보기 위해 들르던 곳이었지만 오늘은 그간 단장된 모습을 보기 위해 들른다. 새로이 주차시설도 잘 되어있어 벗꽃이 한창일때는 많은 사람이 다녀 갔을듯 한데 오늘은 한두팀 정도 보인다.

 

[사천 선진리 왜성]
 

주차장으로 부터 언덕을 오르니 왜성이 자리한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시작되고, 남원성 전투 이후  북상하던 일본군이 명량 해전 패배로 북상이 좌절되어서, 울산, 순천, 사천 등지에 왜성을 쌓고 장기 농성을 위해 축조 된 성이라 한다. 우리의 성은 유사 시 주민들도 입성하는 규모가 큰 형태이나, 일본의 성은 전투병력이 기거하는 일종의 진지 성격이라고 해선지 규모도 작고 낮아 보인다. 사천읍 선진항의 북방에 있는 이 성은 삼면이 바다에 접하고 동쪽만 육지에 닿아 있는 반도 지형에, 조선시대에는 항구로 유명 했던 곳으로, 싸움터에서 앞장서는 군대를 뜻하는 선진의 진지가 있던 곳이라한다. 

 

 

 

복원한 성문은 2005년 발골조사와 2006년 성벽보수 공사 중 확인된 4개의 기동받침돌과 2곳의 기둥 구명을 기초로 하여 일본 히메지성의 성문형태를 참고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의 해군이 두려워 남해의 곳곳에 진지인 왜성을 짓고 바다 쪽을 지키며 성을 지키는 당시 상황을 그려 본다

창선 삼천포 대교를 건너 섬 아닌 섬 남해의 독일마을에서 숙박을 하고 아침 마을 을 산책하여 본다.

 

[독일마을]

 

파독으로 간호사와 광부로 샐활하다 조국으로 귀국하여 여생을 보내는 분들이 바다가 보이는 이곳에 독일식 가옥을 짓고 집성촌을 이루어 만들어진 곳 이어선지 유럽풍의 생활을 느끼게 한다.

아침운동을 나선 주민어른과 의 아침 인사 후 만남의 시간을 가져본다. 

  

 

 

이 곳을 알리는 파독 전시관 문이 열리지 않아 접하지 못하고 발실을 돌리게 된다. 

고국으로 돌아와 여생을 남해 독일마을에서 보내시는 파독광부의 광산에서 사용했던 작업도구와 작업복, ‘코리아 엔젤’이라는 찬사를 들어온 파독간호사의 병원생활도 생생히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는 삶과 애환, 그 속에서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던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가족에 대한 간절함을 담아낸 공간이라 한다. 

아침의 바닷 바람을 맛보고, 남해의 보물을 찾아 산사로 찾아든다. 찾아가는 용문사에는 2개의 보물과 많은 유형  문화유산과 유형 문화유산 자료를 가지고 있는 사찰이다. 

5월 17일 부터 국가문화유산 보존 중심에서 활용을 늘려 세계 속 한국 문화의 위상을 높이고자 문화재청이 62년 만에 국가유산청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에 문화재는 문화유산으로, 문화재 자료는 문화유산 자료로 새로운 명칭을 갖게 된다.

 

[천왕각]

 

용문사는 조선 중기 이곳 자리가 좋다 하여 금산의 보광사 대웅전 등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기고 절의 이름도 용문사라 하였다고 한다. 계곡은 힘차게 흐르는 계곡수로 머리를 시원하게 한다. 절의 입구에 있는 천왕각은 조선 숙종 28년(1702)에 지었다고 하며,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사람 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안쪽에는 사천왕을 모시고 있는데, 이곳의 사천왕은 마귀가 아닌 부정한 양반이나 관리를 밟고 있다. 동쪽은 지국천왕, 남쪽은 증장천왕, 서쪽은 광목천왕, 북쪽은 다문천왕이 비파, 칼, 용, 창 등을 들고 절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잡귀가 들어오는 것을 막는 문지기 구실을 한다.

 

[경남 유형문화유산 목조 천왕좌상]

 

 

 사천왕상의 제작방법은 분할제작 기법으로 각 이음부분에 나무심을 끼워 처리하였으며, 때로는 철심으로 고정되었다 한다. 머리 뒤쪽에서부터 발끝까지 대의가 늘어뜨려져 있고, 두부에 위치한 천의에는 대형 화염문이 장식되어 있으며, 하반신 아래 부분에는 8자로 매듭지어 있다. 사천왕상 발 아래의 생령좌는 따로 만들어 배치하였는데 악귀가 아닌 세속 관리인의 모습이다.

 

[보물 제 1849호 남해 용문사 대웅전]

 

 

2014년 유형문화재에서 보물로 승격된 남해 용문사 대웅전은 중창기록과 건축양식으로 볼 때, 조선 현종 7년(1666)에 일향화상에 의해 건립되고 영조 47년(1773)에 중수가 완료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기단은 지형을 고려하여 전면은 2단으로 높게 형성하고 배면과 측면은 1단이다.

 

[보물 제 1849호 남해 용문사 대웅전]

 

정면3칸, 측면3칸,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기둥은 4면의 우주를 평주보다 크게 사용하였고, 전면과 후면 그리고 측면의 순서로 기둥 크기를 달리하여 정면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네 모서리에는 팔각형 초석 위에 팔각형 활주를 세워 구조적 안정을 꾀하고 있다. 

공포형식은 외 3출목 내 4출목이며, 주간포의 개수를 전·후면은 각각 2개, 측면에는 1개를 적절하게 놓아 공포간격을 조절하여 완결성을 높이고 있다. 보머리에는 봉황과 용의 머리를 조각하여 18세기의 장식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대웅전 반자에는 바다를 상징하는 거북, 게, 물고기, 해초 등이 조각되어 있다.

 

[보물 제 1849호 남해 용문사 대웅전]

 

대웅전의 한쪽면에는 출입문이, 다른 편에는 쪽문이 자리한다. 대웅전 뒤편에는 이곳이 보물인 괘불탱을 거는 괘불대가 걸려 있어 괘불의 크기를 짐작하게 한다.

 

[보물 제 1446호  남해 용문사 괘불탱] 문화유산청 자료

 

 

2005년 보물로 지정 된 남해 용문사 괘불탱은 본존불상 좌·우에 협시보살상만을 배치시킨 삼존도 형식이며, 중앙의 본존불상은 18세기 후반 이후 불화들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양식이며, 좌협시보살상은 보관을 쓰고서 여의를 들고 있는 점으로 석가모니불의 좌협시인 문수보살상이라 추정하며, 우협시보살상 또한 좌협시보살상과 표현이 유사하다. 그림 하단부에는 화기가 남아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석조보살좌상]

 

[목조 아미타여래삼존좌상]

 

 

용화전에 모셔진 석조보살좌상은 약 300년 전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용문사 경내에서 발견된 화강암 보살상으로,  현재는 하얀 분칠을 한 상태여서 본래의 모습을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한다.  왼손은 배에 대고 병을 들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대었는데 연꽃가지를 잡고 있었던 것 같다고 본다. 통일신라 후기의 특징이 표현된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 내지는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삼존불은 대웅전 중앙에 위치하며, 세 구의 불상은 저부에  복장공이 모두 열려 있었고, 복장물 역시 대부분이 도난당한 상태였으며, 그 중 경전 · 다라니 등이 불상 내부의 목 부분과 팔, 다리 쪽으로 끼워져 남아 있었다고 한다. 

 

삼존불 뒤의 후불 벽화 영산 회상탱은 건양 2년(1897)에 조성된 작품으로,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협시인 문수ㆍ보현보살과 사천왕 중 2구가 배치되어 있고, 그 상단에는 미륵·제화갈라·관음·지장보살 4구가 각각 2구씩 배치되어 있으며, 가장 상단에는 대제자상· 8금강(4구)· 사천왕상(2구) 등의 권속들을 꽉 차게 배치하고 있다. 권속들의 모습은 화면 아래에서 위쪽으로 갈수록 상대적으로 작게 표현하여 상승감을 주고 있다.  화기에 의하면 화원이 편수(片手), 연호(蓮湖), 봉의(奉宜)를 비롯하여 여러 명이 관여하였으며, 시주자도 많은 사람이 등장하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어서 문화유산자료로 지정하여 보존 관리 한다고 한다.

사찰을 둘러보며 다른 문화유산들을 접한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남해용문사 목조 지장 시왕]

 

명부전은 임진왜란 뒤에 세웠다고 전하나 지은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고 지장전,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건물 안쪽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시왕(十王)을 좌우에 모시고 있다. 좌협시 도명존자는 오른손에 석장을 쥐고, 우협시 무독귀왕은 합장을 한 채 각각 시립하고 있다. 시왕상들은 모두 등받이와 팔걸이, 족좌가 있는 의자에 앉아 정면을 향한 자세이며, 표현기법은 거의 동일하다. 두부에는 무독귀왕상과 같은 원류관 형태의 관을 쓰고 있으며, 손에는 홀(제5·6·7·8·9·10상)을 쥔 경우, 책과 붓(제1·2상)을 들고 있거나 손을 무릎 위에 걸친(제3상) 다양한 모습이다.

 

[경남 유형문화재 남해 용문사 영산전 석조석가여래삼존상 및 십육나한상 일괄]

 

남해 용문사 영산전 석조석가여래삼존상 및 십육나한상 일괄은 1680년 조각승 경옥(敬玉)에 의해 제작된 불석재 불상이다. 이 불상은 짧은 상반신과 높은 무릎의 신체비례, 방형의 큰 얼굴, 다리 사이의 양 갈래로 균등하게 펼쳐진 간결한 옷주름 등이 주목된다. 비례와 방형 얼굴, 착의법 등이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인다.  경상남도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던 경옥의 가장 늦은 시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제작시기, 제작자, 봉안처가 명료하여 학술적 가치가 있다고 한다. 

 

[경남 유형 문화유산 용문사 목조]

 

목조란 많은 대중이 운집하는 사찰 법회 때 배식용도로 사용되었던 목식통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는 조선시대 사찰에 부과되었던 종이 만드는 부역인 지역(紙役)과 관련하여 닥종이의 원료를 풀 때 사용되었던 용기로 추정 된다고 한다.  통나무 가운데를 파서 만든 구유형태로 양끝에는 각각 37cm, 47cm의 턱받이가 마련되어 있으며, 그 중 한곳은 턱받이 밑에 부착된 세로부재에 직경 7.5cm의 원공이 관통되어 있다. 용기 내부의 중앙 바닥에는 배수를 위한 직경 5.5cm의 원공이 뚫려 있다.

 

 

[경남 유형 문화유산 남해 용문사 건륭25년명 운판: 남해군청]

 

 

운판의 형태는 정상부의 보주형 장식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에, 일반적인 운판의 형태가 구름 모양을 띠는 것과 달리 이 운판은 화염형에 가까운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좌우보다 상하가 긴 형태이다. 당좌의 둘레에는 ‘건륭이십오년경진 오월일’과 ‘진주백천사’라는 명문이 점각되어 있다. 그리고 배면엔 당좌 테두리 내에 연당초문이 생략되었을 뿐 전면과 동일하며, ‘도 광십칠년정유이월일매득’과 ‘남해 용문사’라는 점각 명문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곳 용문사에는 이외도 건양2년 신중탱, 독성탱등 여러 문화유산이 존재한다.

갑작스러운 여행지인 이곳 남해에서도 보물을 접하고 남해 군립공원이 호구산의 맑은 계곡을 대하는 호강을 누려본다. 발길을 서쪽으로 옯기기 위해 산을 내려 온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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