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 쉰 여덟번째 - 순천

세종해피뉴스 2024. 6. 6. 22:30

- 최참판댁, 팔마비, 낙안읍성

 

하동을 지난다. 하동에는 박경리 선생님의 대하소설 『토지』, 주인공인 최치수 및 최서희 일가와 주변 인물들의 생활공간을 재현한 최참판 댁이 있다. 하동이 악양면 평사리 일대에 최참판댁을 건립하여 문화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기로 하고, 1997년 6월 대하소설 『토지』 최참판댁 건립 추진, 1999년 12월 착공, 2년 뒤인 2001년 2월 준공하였다고 한다.

 

[최참판댁]

 

최참판이 나무그늘아래 책읽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 하다.

 

[사랑채로 들어가는 중문]

 

여러채로 고가의 멋을 충분히 살리고 살림살이도 잘알려주는 공간이라 생각된다. 

 

[최참판 댁 사랑채]

 

 사랑채의 루상의 마루에 앉아 주변의 한옥이 보이는 옛스러운 멋을 음미한다. 나오는 길 멀리 들판을 바라보며, 소설의 내용보다는 너른 들을 내려다 보는 자와 먼 벌판에서 그 곳을 가꾸어야 하는 자의 삶을 상상으로 번갈아 느껴본다. 변함없는 인간의 삶이라 생각하며 발길을 순천만으로 돌린다. 이곳 순천만 갈대밭의 총 면적은 약 160만평에 달한다고 한다. 

 

새로이 올라온 갈대숲 사이에 난 데크 길을 거닐며 망둥이도 게의 모습을 찾는 재미로 발길이 자주 멈친다. 어느덧 용산 전망대로 가는 산길로 접어들어 진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전망대에 이르는데, 보수 공사로 인하여 중간 지점의 전망대에서 길이 막힌다.  아쉽지만 이 곳에서 순천만의 모습을 눈에 담아본다. 이곳은 석양이 멋지다는데, 아직 해지는 모습을 보기에는 시간이 남아 기다릴 용기가 나지 않는다. 돌아 갈 길도 멀어  눈에 보이는 S자 물길의 습지, 갈대밭의 신비로운 모습으로 이곳을 찾은 기쁨을 대신한다.

 

[전망대에서 순천만]

 

 돌아 나오는 길이 힘들게 느껴지나, 눈앞의 광경을 즐기며 발길을 옮긴다. 이 곳의 갈대가 은색으로 바람에 나쁘끼는 모습을 상상하며 갈대밭 사이를 지난다. 여행에서 못 이룸에 대한 아쉬움은 다음 여행을 상상하게 하는 것 같다. 

 

[순천만 귀가길]

 

 어렴풋이 저물어가는 저녁 긴 해를 마주하며 순천만을 벗어나, 순천에서 하루 저녁 묵고, 아침을 맞자 마자 이곳의 팔마비를  찾아본다. 2021년에 보물로 지정 되어 이 비를 궁금하게 여겨 찾아보려 했기에  번잡하여 지기 전인 아침부터 서둘러 찾아 본다.

 

[보물 순천 팔마비]

 

순천 팔마비는 1281년(충렬왕 7) 이후에 승평부사(昇平府使) 최석(崔碩)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승평부(지금의 순천)에 건립한 비석이라 [고려사] 열전에 있다고 한다. 승평부 ( 지금의 순천)에서는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수령에게 8마리 말을 기증하였는데, 최석은 비서랑의 관직을 수행하고 개성으로 떠난 후, 자신이 기증 받은 말과 자신의 말이 승평부에 있을 때 낳은 망아지까지 돌려 보내니, 이에 읍민들은 최석의 청렴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팔마비를 세웠다고 한다. 

유래 만큼 보물로 지정 된 연유가 궁금한데,  이 비석은 고려말 건립 후 정유재란시 훼손되며, 이곳에 부사로 부임한 이수광에 의해서 1617년 다시 건립되어 현재까지 온전하게 전해 왔다고 한다. 팔마비의 ‘팔마비(八馬碑)’ 세 글자는 진사 원진해(元振海)의 글씨이고, 배면에 기록된 음기는 이수광이 짓고 동지사(同知事) 김현성(金玄成)이 글씨를 썼다고 하니, 순천 팔마비는 건립 후 중건시기가 알려진 순천 지역의  중요 유물이며, 13세기에 처음 건립된 점, 순천부사 이수광이 중건한 비가 400년 이상 현존한다는 점, 최석을 청렴한 지방관의 표상으로 삼아 비를 세운 점이 보물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라 한다. 아마도 최초의 백과사전 '지봉유설'을 편찬한 이수광의 글의 힘이지 않을까 ?

 

[보물 순천 팔마비]

 

 비석은 상면이 둥글게 처리된 비갈형(碑碣形), 비석의 높이는 약 160cm, 폭은 약 76.0cm, 두께는 약 16.5cm로, 전면은 액을 만들어 글씨를 새기고, 액의 상부는 귀접이 형태를 하고 있다. ‘八馬碑’ 석 자는 돋을새김으로 글자 한 자의 지름은 약 48.0cm라 한다.  이 비석은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옥개석(屋蓋石), 비신(碑身), 대좌(臺座)를 갖춘 비와는 달리 비신 위에 옥개석이 없고, 대좌에는 불교유물에서 볼 수 있는 연화문(蓮華文)이 새겨져 있는 것이 큰 특징이라 한다. 보물 하나를 더 만나 본 기쁨을 안고 순천의 낙안읍성을 관람한다.  

 

[낙안읍성 동문과 낙풍루]

 

낙양 읍성은 600 여년 전인 1397년(태조6) 낙안 태생 김빈길 장군이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토성을 쌓고, 이후 1424년(세종6)에  돌로 다시 쌓아 규모가 커졌고, 1626년(인조4)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를 지낼 때 중수하였다고 한다.

 

[성]

 

 낙안읍성은 조선 시대의 관아와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마을을 구성하는 초가집들의 가옥, 그리고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각종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많아 관람이 필요한 장소라 생각한다.

 

[관아]

 

 관아뿐 아니라 읍성 내에 초가집 가옥들은 몇 백년을 이어오며, 실제 주민들이 거주하는 민속마을이라, 이는 세트장과는 다른 전통의 맥을 잇는 가옥이라 잘 보존 관리되었으면 한다.

 

[초가집과 은행나무]

 

 작약이 피고 , 초가를 엮은 지붕과 푸른 은행나무가 구름을 담은 푸른 하늘 아래 자리한  동네 풍경이다.

 

[임경업장군 선정비]

 

 곤아 옆쪽의 비각에는 조선시대의 명장으로 이곳에서 2년간 군수로 지낸 임경업 장군의 비가 있다. 비는 거북받침위에 비신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양으로, 비신 앞면 중앙에는 '군수임공경업선정비'라는 비의 명칭을 세로로, 왼쪽 아래부분에 건립연대가 적혀 있다고 한다. 이 기록으로 이 비는 임경업이 군수직을 마친 인조 6년 (1628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낙안읍성 옥사]

 

 안에 자리한 생활사를 둘러 보다 옥사와 고문 기구인 형틀 들, 그리고  죄인에게 형벌을 가하는 장면을 재현 한 것을 보게 된다. 처음 대하는  초가집 사이에 낮은 담장으로 자리한 기와집의 옥사를 보며, 관아가 아닌 이곳에 설치한 것이 어울리지 않아 이곳이 원 자리가  맞는지 의아심을 가진다. 

 

 

남쪽의 바닷길을 따라 돌며 귀가 도중에 서해의 선유도에 들려 시간을 보내니 어느덧 해지는 광경을 맞이한다. 짧은 시간 해 저무는 광경에 시간을 맏긴다. 짧지 않은 긴여행에 숙식을 함게 하며 묵묵히 함께 하신 분들 덕이라 생각해 본다. 그간 보지 못했던 문화유산 뿐 아니라 좋은 경치를 볼 수 있음에 감사하며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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