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 서른 일곱번째 - 남원

세종해피뉴스 2023. 10. 24. 23:54

오늘은 남원 신계리의 마애석불조상을 찾아가는 길이다. 길을 조금 벗어나 혼불 문학관을 찾아본다. 나는 읽어 보지 못한 소설이나 동행자가 통독으로 어렴푼한 기억 속에 들려 준 줄거리를 들으며 들러 본 것이 기억나서 추억을 얹고, 바뀐 모습을 궁금해 하며 찾아본다. 가는 길의 서도역에서 들러 기차길에 대한 많은 기억을 덮어 씌워 본다. 소설에 장소이기도 하지만, 실제 많은 사연을 않고 있었을 역이라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 본다. 기차길 위애 서서 중심 잡기 하며 걸어도 보고, 기차길에 설치 된 의자에도 앉아 본다. 깔금하게 정비 된 서도역에서 시간을 보내며, 기차길도 작은 역도 이제는 문화재 자료로 자리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서도역]

서도역에서 길을 나서 철길 건너를 달리면 혼불 문학관에 당도한다. 주차장에서 멋지게 단장한 언덕 길을 오르면 넓은 마당에 자리한 두채의 건물이 자리한다.

 

[혼불문학관의 전시관과 교육관]

한옥 타입으로 잘 지어진 전시관과 교육관은 혼불의 소설에 관한 궁금증을 가지게 한다. 잘 지어진 박물관이 문학과 건축의 조화를 느끼게 한다.

 

[전시관내 작가의 집무실 전경]

작가 최명희 님의 약력과 17년의 창작의 노고, 삶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혼불은 작가가 17년의 새월 혼신을 바쳐 쓴 대하소설로, 일제강점기 사매면 매안 마을의 이씨 집안 종부 3대의 며느리와 거멍굴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선조의 숨결과 손길, 염원과 애증을 우리 말의 아름다운 가락으로 복원하여 형상화한 소설이라 한다. 창작을 위한 노력을 문학관을 통하여 느껴본다. 

 길을 나서서 보고자 하던 마애불상을 찾아간다. 순천 완주 고속도로 밑을 지나서 산밑으로 접어들어 임도길을 조금 들어서면 산으로 오르는 길에 안내판을 만나게 된다. 길을 따라 조금 걷다보면 산성을 쌓듯  단을 만든 위에 마애불의 모습이 보인다.

 

 

산길을 산책 삼아 조금 오르다 보니 돌단 위에서 머리만 내밀며 찾아온 것을 반겨주고 계시는 듯하다. 

보고자 하는 뜻이 없다면, 이곳을 일부러 찾아 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 친견하겠다는 일념으로 이곳을 찾은 것에 스스로 뿌듯함을 느낀다.

 

[보믈 제 423호 남원 신계리 마애석불 좌상]

 원래 이곳에 자리했을 듯한 바위였다 짐작하지만, 굳이 이 곳에 와서 불사를 이룬 이유에 의문이 생긴다. 머물러 작업해야 할 날도 적지 않을 텐데, 의문 만 가득한데, 도선국사가 하룻밤 사이에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어, 이로 위문을 멈춘다. 하루 만에 만드셨다기엔, 거대한 바위를 몸체 뒤의 광배로 삼고, 자연 암반을 대좌(臺座)로 삼은 마애불은 3m도 넘어 보이고 도드라짐의 볼륨감이 부피감이 풍부하다.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조성 배경을 알 수 없다고 한다.

 

[보믈 제 423호 남원 신계리 마애석불 좌상]

풍악산에 바위의 남면을 안쪽으로 깍아내며 하나의 바위에 불상과 광배가 새겨진 3.4 m의 불상이다. 대좌는 자연 그 자체를 대좌로 삼기 위한 듯 따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민머리 위에 육계가 유난히 크며, 삼도가 있고, 의상은  편단우견 형식의 법의를 새기고 나머지 부분은 선각 기법으로 표현괴고 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으로 추정하는데, 자세에서 땅을 가리키던 오른손을 지금 막 배 앞으로 들어 올린 듯한데, 그 의미는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이렇게 비정형화된 수인은  고려시대 전기 불상에서 다양하게 보인다고 한다. 구슬처럼 둥글게 표현한 머리광배는 예가 별로 없는 특이한 것으로 주목 받는다고 한다. 양감이 풍부한 얼굴 표현 등은 통일신라 후기의 특징이지만, 풍만한 신체에 비하여 각 부분의 세부표현이 간략화된 점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마애석불좌상의 친견을 이루고 대곡리의 암각화를 보려 자리를 옮긴다.

 

[봉황정]

대곡리 암각화는 이곳 대곡리의 봉황대에 자리한 바위에 새겨져있다.

 

[대곡리 암각화]

대곡리암각화는 봉황대로 불리는 구릉의 정상 부근 암벽에 새긴 것으로 호남지방에서 유일한 선사시대의 암각화이다. 이 암각화는 두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크기는 1∼2m 내외이며 상하 혹은 좌우 대칭으로 기하학적인 문양을 나타내고 있다. 이 암각화는 1991년 처음으로 학계에 보고되었으며, 전북지방의 선사시대 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대곡리 암각화]

암각화란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나 동굴벽에 기호나 물건, 동물 등의 그림을 새겨놓은 것을 말하는데, 이 암각화는 청동기시대 도형으로 농경사회의 번식과 출산의 지모신을 추상화한 암각화라고 본다.  대부분의 암각화는 경상도에 존재하는데, 아마도 남원은 청동기 시대나 가야시대  같은 문화권에 속한 듯 하다. 포항 칠포리 암각화의 해석을 통하여 ,남원은 성장기로 추정하며, 내부의 말발국 형은 여성의 생식기를, 역삼각형 무늬와 석검무늬는 남자를 의미한다고 보는데, 이 문양은  주로 농사의 풍요와 생산의 의미를 지니는 주술행위의 결과물로 보인다고 한다.  

 

[ 선원사]

남원시내의 선원사로 철조 보살을 뵈러 들어선다. 시내에 자리하여 다소 의아함을 주지만, 통일신라의 승려 도선이 875년 창건한 사찰로 금산사의 말사이다. 사적비에 의하면 도선이 남원의 진압사찰로 이 절을 창간하고 약사여래를 봉안하였는데, 초창기의 당우는 30동이 넘었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하여 만복사와 함께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1754년(영조 30)에 부임한 부사 김세평이 노계소·신도계 등과 협의하여 약사전과 명월당을 재건하였고, 창건 당시의 철불을 약사전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중요문화재로는 약사전 안에 봉안된 철제여래좌상과 괘불이 있다.

 

[선원사 약사전]
[보물 제 422호 남원 선원사 철조여래좌상]

고려시대 철불로 머리에는 소라 모양의 머리칼, 이마 위쪽은 반달 모양을 표현하고 있다. 3각형의 얼굴형에 날카로운 코· 꽉 다문 입· 내민 턱 등을 가지고 있다. 넓은 옷깃을 오른쪽으로 여민  마치 한복을 입은 것 같은 표현이 독특하다. 지금의 손은 최근에 만들어 붙인 것이라 하는 데, 팔의 형태로 보아 원래는 오른손을 무릎에 올리고 손끝이 땅을 향하고 왼손은 배부분에 놓았을 것으로 짐작 된다고 한다. 

 

[보물 제 422호 남원 선원사 철조여래좌상]

금으로 도색이 되어 있어 나름 부드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철불에서 느끼는 다소 날카로움은 옅보이는 것 같다.

 

[약사전 뒤편의 괘불함]

예전에 큰 고을 이었던 남원에 만복사와 함께 큰 사찰이었으나 정유재란시 사라진 두 사찰이라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고, 남원에서 한동안 지낸 사람으로써 몰랐다는 것은 당시 문화재에 관해 눈뜨지 못 함이라 생각하며, 남원을 다시금 둘러 보리라 다짐하며 귀가 길에 임실을 지난다. 임실의 오수를 지나며 의견비를 찾아 본다.

 

[오수의 원동산 공원]

고려시대 최자가 지은 『보한집』의 이야기는 옛 국민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린 것으로 알고 있다. 내용은 주인 (김개인)이 개를 사랑하여  늘 함께 하는데. 장날에 개를 데리고 가서, 친구와 음식과 술을 마시고 취하여 개와 함께 돌아오다 잔디밭에서 잠들고 말았는데, 근처의 들에 불이 나 잔디밭에 옮겨 붙기 시작하여 개가 짖으며 옷소매를 물고 끌어당겨도 일어나지 못하자, 개가 냇가에서 자기의 몸에 물을 적신 뒤 불이 붙은 잔디에 뒹굴기를 몇 차례나 반복하여, 다행히 잔디밭에 불울 잡는다. 김개인이 잠에서 깨어 보니 개가 불에 그을린 채 죽어 있어, 상황을 안 후 그 자리에 개의 무덤을 만들고, 잊지 않기 위해 지팡이를 무덤 앞에 꽂아 둔 이야기 이다.  그 지팡이가 자라나 큰 느티나무가 되었고, 이 나무를 ‘개 오(獒)’와 ‘나무 수(樹)’자를 써서 ‘오수(獒樹)’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마을을 1992년 8월부터 ‘오수마을’이라 블렀다고 한다. 공원에 늠름하게 자리 한 오수의 개는 조각가인 필자의 고교 동창이 재현 한 조각품이란 것을 안 후부터는, 오수를 지나는 길에  들러 보아 잠시 머뭄을 갖는 곳이기도 하다. 이 곳의  나무는 수령 500년에 높이 18m, 둘레 5m로 자라 1982년 9월 군(郡)나무로 보호되고 있다고 한다.

 

[의견비]

전라북도 민속자료로  이 비석은 높이 220㎝, 폭 95㎝, 두께 30㎝로 화강암 소재에 전후로 각자(刻字)가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려우며, 냇가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55년 4월 현 위치에 다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용담댐의석양]

남원의 새로운 보물 들을 접한 뿌듯한 마음으로 귀가하는 도중 용담댐 삼락쉼터에서 떨어지는 낙조에 시간을 뺏긴다. 모기의 극성을 견디며 커피 한잔과 어울리는 음악 한 곡을 들어 본다. 여행과 장기간 운전의 피곤도 모르고 시간에 잠시머물며 저물어 가는 해에 모든 것을 뺏기고 시간을 보낸다. 시대를 넘나드는 여행에 마냥 흐믓한 마음으로, 넘어간 해로 어둠을  헤드라이트에 의존하여 힐링 된 몸과 마음으로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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