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 열세번째 - 상주(2)

세종해피뉴스 2023. 6. 1. 15:23

- 사벌국

 상주 박물관을 통하여 알게 된 사벌국의 자취를 엿볼 수 있는 곳으로 향한다.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전 사벌왕릉이 있다. 이 곳에는 보물인 상주 화달리 석탑도 이웃하고 있어 들러본다. 이곳은 주차시설이 미비하여 길에 차를 대고, 계속 내리는 빗속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왕릉을 둘러 본다. 계단을 오르면 비교적 봉분이 큰 릉이 소나무를 배경으로 잘 깍은  잔디위에 자리한다. 

 

[전 사벌왕릉]

왕이 묻혀 있는 무덤으로 알려진 이 왕릉은 상주지역에 삼한 시대에 존재하던 사벌국의 왕의 무덤으로 전한다. 사량벌국이라고도 불리는 이 왕국은 삼국사기에  '신라 석우로 장군이 사벌국을 멸망시키어 사벌주로 복속시켰다'는 기록으로 존재를 알 수 있다. 이 왕릉은 신라 54대 경명왕의 여덟 왕자 중 하나인 사벌대군 박언창군의 묘소로 알려지고, 상산 박씨문중에서 보호 한다고 한다. 1672년 현종 13년에 목사 이초로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사벌왕묘라 알려주어 수축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왕릉과 석물]

잘 다듬어진 왕릉에는 장명등과 망부석, 문인상이 자리하는데 요사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양모양의 석물도 보인다. 양은 온순하지만 신양(神羊)으로는 성(城)수호의 의미로 해석되며, 사악한 악귀를 막는 동물상으로 호랑이와 함께 석물에서 볼 수가 있다. 이곳은  1981년 상주시의 보수 공사로 지금에 이른다고 한다.

 

[ 문인석과 장명등]

 머리에 삿갓형의 개석과 4각 구조의 화사석 그리고 단순히 긴 긴 간주석의 날씬한 몸매의 장명등이 독특한 모습이고, 그리고 잘 자듬어지지 않은 자연미가 넘치는 문인상의 생김새가 여느 왕릉의 것 보다는 작고 날씬 하다는 느낌이다.  만든 시기에 대한 견해가 없어도 릉이 생길 때 만들어 진 것은 아닐 듯 하다. 사별왕릉을 통해 사별국을 다 알 수 없으나 역사속에 존재한 국가임을 인정하리라.

 

왕릉에서 내려다 보이는 탑이 보물 상주 화달리 삼층석탑이다. 촉촉히 내리는 비 속에 나를 기다리며 서있는 탑을 찾아 보아 준다. 탑의 뒷편에 사벌왕릉의 봉분이 보이고 전각과 왕릉의 건립에 대한 사적비가 보인다.  

 

[보물 제 117호 상주 화달리 삼층석탑]
[보물 제 117호 상주 화달리 삼층석탑]

 이 삼층석탑은 1단의 기단 위에 3층으로 몸돌을 쌓아 올린 것으로, 꼭대기 돌을 제외한 몸돌과 기단이 남아있다.  9세기 무렵의 통일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여긴다. 이 시기는 보통 기단을 2단으로 하는데, 이 삼층석탑은 기단이 1단인 것이 특징이다. 각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하나의 돌이며, 몸돌에는 기둥 문양이 있으며, 지붕돌의 처마가 위로 올려져 균형감을 느끼게 한다. 3층 지붕 돌 위에 쇠기둥(찰주)을 꼽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고 한다. 탑의 기단위에 머리  없는 석조 여래상이 있는데, 이는 탑과는 무관하나 이 주변이 절터 이었음을 알려주는 듯 하다. 누구에 의해 언제 올려져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머리 없는 석상에 큰 의미가 없다면 머리를 올리거나 치웠으면 한다.

 

 주변은 상산 박씨 문중의 재실이 옛스러움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곳 재실은 숭의문, 영사전, 숭의각, 영사각 등으로 구성 된 큰 규모의 재실이다. 비와 닫힌 문을 보며 다른 문화재를 찾아 옮긴다.

 

[숭의각]
[영사전]

2008년 보물로 지정된 상주 양진당으로 이동한다. 정면과 측면을 관람하고 내부로 들어간다.

 

[보물 제 1568호 양진당 외부의 정면 입구]

상주 양진당은 임진왜란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검간 조정이 1626년 지은 것으로 1807년(순조 7)에 중수한 사실이 있으며,  전체적으로 정면 9칸, 측면 7칸 규모의 ‘ㅁ’자형 평면을 한 고상식 건물이다., 

오른쪽은 방에 벽이 없이 마루만 놓은 모양이 마치 정자의 마루나, 사랑채에 연결된 누각을 떠올리게 하니, 이곳은 집안에 사람을 들이지 않고도 만나과 담소를 나누며 쉴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만들어져 있어 'ㅁ' 자 모양의 폐쇄건물에 숨통을 틔운 것 같이  여유롭고 동네 친화적이란  느낌을 준다. 

 

[양진당 외부의 측면]

왼쪽의 툇마루에도 문을 달아 열린 생각을 가진 주인이라는 생각과 여러 모양의 창호가 나름의 가지런한 모습에 정감이 가며, 외부와의 소통에 많은 신경을 쓴듯 한 느낌이다. 마치 닿힌 성곽 같으면서도 어느 곳으로도 통행이 자유로운 모습 같다. 

 

[내부의 정면]

전면에 세운 6개 기둥은 통나무를 사용하였는데, 하층 부분에는 사각형으로, 상부는 원형으로 다듬었다.  지붕은 정침의 툇마루 상부만 겹처마로 하고 나머지는 홑처마로 하였는데, 겹처마의 서까래가 일반적인 원형이 아닌 네모지게 다듬어 부연과 같은 모습이다.                                                                                        본채 의 3칸 온돌방 전면과 3칸 대청 배면에 나있는 창호는 모두 중간설주가 있는 영쌍창이다.  고상식 주거로 건물 바닥을 지면에서 1미터 이상 높게 마련하여, 보기 드문 구들을 설치 한 조선시대 주거유형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이다.

 

[내부의 측면]

측면에는 마루로 오르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옆면에 구들이 있는 방과 외부로 트인 공간이 있다.

 

[내부에서 문을 바라본 것]

문과 같이 일자로 이루어진 건물은 아마도 창고인 광으로 쓰인 공간과 지금은 일상 용품이 있는 곳은 아마도 외양간으로 쓰였을 것 같은 공간이 있다.

 

[내부의 측면과 정면]

다른 옆면도 창고 같은 공간과, 그리고 계단 뒤의 숨은 공간은  부엌이 있는 공간으로, 지금은 각종 기계를 적재하고 있으나,  부뚜막 위에 놓인 쇄솥에 녹이 슬어 남아있어 이곳에 부엌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하루를 머물며 이 가옥을 활용한 삶을 경험 해보고 싶어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길을 나선다.

 

이제 집으로 향하는 길을 지나다가 의암고택의 안내판을 보고 운곡마을로 길을 접어든다. '아침에 마을 골짜기에 안개가 자욱하다'하여 운곡 으로 부르게 되며, 풍양조씨의 전통적인 세거지이며 일명' 갈가실이라 친절하개 마을 입구에 안내판이 세워져  마을을 알리고 있다. 이곳에는 의암고택과 청간정 이 외 여러 고가들과 재실이 자리하며, 수령 500년이 넘는 고목들과 공동우물, 동제당등이 자리한다고 알려 준다. 

 

[천연기념물 구상화강암]

마을 입구 길가의 안내판 옆에 전시된 상주 운평리의 구상화강암은 이곳 계곡 바닥에서 발견되었고, 보존을 위해 상주시청에서 전시 보관하다 이 곳으로 다시 옮겨온 것이다. 구상화강암은 원과 같은 공모양이 있는 화강암으로,  화산이 폭발시 마그마가 굳을 때 핵을 중심으로 주변의 다른 광물이 원모양으로 굳어진 것이라 한다. 거북돌로도 불리는데 세계적으로 100여곳에서만 발견되는 희귀성으로 생성의 연구자료로 주요하여 천연 기념물 제 69호 로 보호 받고 있다. 먼저 의암고택을 찾아 본다. 

 

[의암고택 출입문]

운곡(雲谷) 마을에 위치한 의암고택(依巖古宅)은 모임당 연안이씨가 지은 건물이다. 의암은 조범구선생의 호로서, 의암고택이라는 당호는 후대인이 의암 조범구 선생의 덕망을 기리기 위해 붙인 건물명칭이다. 이 집으로 드나드는 대문 앞에 있는 탕건 모양의 큰 바위를 '탕건석'이라 하는데, 관습적으로 사람들이 이 탕건석을 '의암'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사랑채]

의암고택은 조선 후기에 지은 건물로서, 정침(안채)과 사랑채, 안사랑채, 고방채, 대문간채, 사당, 뒤주채, 장독대 등 조선 시대 사대부 주택의 구성 요소를 고루 갖춘 집이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153호 '상주의암고택'으로 지정 되어 있다고 한다. 집안을 둘러보는 중 안채는 생활과 부분 보수가 있는 듯 하여 세밀히 살피지 못하고 잠시 둘러 보는 것으로 서둘러 길을 나선다.

 

[의암고택 사랑채]

 나오는 길 그래도 의암고택의 정면 전체 모습을 보기 위해 담넘어로 넘겨다 본다. 의암고택을 나서 마을 안 길을 냇가를 따라 오르면, 오래된 은행나무와 눈길을 잡는 정자인 청간정에 당도 한다. 

 

[청간정]

상주 청간정은 풍양조씨 검간종종파 자손들과 영남의 유학자들이 모여 국내외 정세를 의논하고 시를 지으며 지내던 정자로, 앞에 시내가 흐르는 언덕에 앞면 3칸 옆면 1.5칸의  정자로 앞을 높게 툇마루를 설치하고 정자로 시냇물을 바라볼 수 있게 한, 가곡공 조예가 1650년 무렵 건축 한 것으로 1870년 5개파 자손들이 힘을 모아 수리했다고 한다.

 

[청간정]

청간이란 이름은 '자연의 소리인 계곡의 물소리를 듣는 것과 동시에 마음 깊숙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뜻이라 한다. 온돌방 2칸과 마루가 일직선상이며, 지붕은 대들보와 종보에 서까래를 받치는 나무인 도리가 5줄로 걸리는 오랑가 형식이다.

 

[우물터]

마을을 거닐며 둘러 보는데 중간 중간 허름해져 가는 빈집이 눈에 띈다. 살기 좋았던 마을이 점점 사람이 줄어 들어 삭막하게 바귀는 변화를 볼 수 있다. 예전에는 꽤나 북적거렸을 법 한 마을의 큰 공동 우물을  보니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생활 속에 가꾸어지는 것이  박물관을 지어 보존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고, 이 모든 것은 사람과 그들의 관심임을 또 한번 오늘 느끼게 된다. 빗속에 이곳 저곳을 돌며 여러가지를 보면서 보낸 즐거운 시간과  얻어지는 많은 생각에 감사하며 계속되는 비를 맞으며 잠을 위한 귀가를 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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