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여든 번째 - 공주

세종해피뉴스 2022. 6. 3. 23:27

오늘은 공주를 찾아본다. 익산의 여행을 통하여 왕궁터에 관하여 여행을 마치고 나니  웅진백제의 왕궁터에 관한 여행은 어떨가 하여 공주를 찾아본다. 오늘은 왕궁이 있었다는 공산성을 올라본다.

금강을 끼고 언덕에 자리한 공산성은  외곽 성벽을 잘 복원하여 산책길로 잘 정비 되어 있어, 둘레길 모양 한바퀴를 돌아보는 즐거움이 있는 곳이다. 둘레길 걷듣 성을 한바퀴 돌아보는 재미가 있는 곳이다.

가파른 절벽옆으로 난 성벽길은 스릴마저 있다. 한때, 백제는 고구려에 견줄 힘을 갖고 있는 나라로 백제 13대 왕인 근초고왕 때에는 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고 한성을 도읍으로 삼기도 했다. 백제는 바닷길로 중국대륙과 활발히 교류했고, 동남아시아와 인도에 까지 닿았다고 전한다.  고려가 국제적인 교류를 할 수 있었던 토대가 백제시대 때 갖추어 졌다고도 한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백제는 한성에 있던 도성을 빼앗기고, 전투에서 개로왕이 전사하며 개로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주왕(백제22대왕)이 웅진 (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한다. 그 때 왕성으로 사용되었던 곳이 공산성이다. 백제의 웅진시대는 문주왕부터 시작하여 성왕때 부여로 천도하기 까지 5 대왕 63 년 동안의 백제시대를 말한다. 이 산성은 웅진백제시대 도성의 역할을 해냈다. 공산성 내부에는 왕궁터(추정)와 임류각, 연지, 총 네 곳의 문지(금서루, 진남루, 공북루, 영동루)와 백제 왕궁 관련 유적들이 자리하고 있다.

 

[공산성 금서루]

공산성으로 가는 입구인 공산성 금서루는 공산성 4개 성문 가운데 서쪽 문루이다. 성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으로 흔적 조차 찾기 어려웠지만, 1859년 편찬된 공산지의 문현기록과 지형적 여건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현재의 문루는 본래 서문이 있던 자리에서 약간 동쪽에 지은 것이다.

 

[공산성 비석군]

요즘 각 지자체는 그 지방에 산재하여 있는 비석들을 모아 보전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이곳의 비석들도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들로 공주시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송덕비와 제민천교영세비 등 47기가 있다. 대다수는 인물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을 새긴 송덕비인데, 여기에는 "영세불망비. 청간선정비, 거사비, 만세불망비, 유애불망비, 청덕선정비"등의 글이 새겨져 있다. 우의정, 도순찰사, 관찰사, 암행어사, 목사, 판관, 군수, 우영장, 중군 등 주로 충청감영과 공주목 관에 배치되었던 관리의 송덕비가 많다.

 

[깃발과 성벽]

공산성의 볼거리 중의 하나가 성벽에 자리한  깃발이라고 생각한다. 이 깃발은 공산성의 4개 문루별로 다른 깃발이 걸리며, 송산리 6호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재현한 것으로 금서루에 걸려 있는 깃발에는 백호와 함께 황색으로 되어 있는데, 황색은 백제의 나라색이며 우주의 중심이 되는 색으로 생각하였다.

백제의 웅진 시대를 함께한 웅진시대는 무령왕의 시대이다. 무령왕은 귀족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신구 귀족을 고르게 등용하여 세력 균형을 유지하며 왕권을 강화해 나가고, 왕족을 지방관으로 임명해 지방 세력을 왕에게 귀속시켜 통제를 강화하는 정책을 편 왕이다. 금강유역을 개발해  그 곳에 유민들을 정착시켜 조세 기반을마련하고,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수곡성을 공격하는 등, 지속적으로 영토회복을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공주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열왕릉이다. 성왕 대에 이르러 웅진을 떠나 백제의 영토 확장과 성장을 위해 넓은 사비성으로 천도를 결정한다.

사비로 천도한 백제는 의자왕에 이르러 새로운 도약을 하는데 그는 왕이 된 후 내적으로 기반을 다진 후 고구려와 화친하고, 당과 친교를 맺는 등 외교관계를 다져나간다.  당이 고구려와 전쟁을 하는 틈을 타 신라를 수십여 차례 공격하여 수십 개의 성을 뺏는 전과를 올린다. 결국 위기에 빠진 신라가 고구려와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비성이 함락되자 의자왕은 공산성으로 피신한다. 의자왕은 공산성에서 마지막 항전을 준비하는 중  자신의 신하였던 예식진의 반란으로 결국 항복을 하게 된다. 서기 660년 7월 19일. 백제의 멸망. 백제의 항복과 더불어 의자왕은 당나라의 포로가 되어 낙양으로 끌려가서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백제의 최후를 겪은 성이다 .

 

[공산성 성벽]

백제 당시에는 웅진성(熊津城)이라고 불리고 고려시대 이후에 공산성이라고 불린다.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리기도 한다. 공주 공산성(公州 公山城)은 사적 제12호로,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에 소재하고 있는 성이다. 해발고도는 110m이다. 삼국시대의 성곽으로, 백제의 문주왕 원년(475) 한성에서 웅진으로 이주한 후 성왕 16년(538년)에 사비로 옮길 때까지 도성이었으며 그 후 신라·고려·조선 시대에도 행정과 군사적 요충지였다. 백제시대 토성 735m, 신라시대 석성 1925m, 총둘레 2660m의 포곡형 산성이다.

산성의 북쪽에는 금강이 흐르고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는 천연의 요새로서 성내부는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성곽은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포곡형으로 원래 백제 시대에는 토성이었으나 조선 시대 대부분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총 8개의 유적지들 중 공주지역에 2곳(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 4곳(관북리 유적 및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나성)이 세계 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했다. 이번 세계 유산 등재는 충청권에서는 최초로 선정 되었다.

 

[백제왕궁터]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인 이곳 공주로 천도면서 왕궁 건축은 가장 시급한 일이다. 나라가 어려운 때여서 왕궁을  크게 지을수 없을것이다. 왕궁터는 그 크기가 그리 크지 않고 많은 사람이 살기 어려웠을 것 같다. 그러나 63년간 백제가 공주를 기반으로 나라를 되살리는 데 성공 했다는 점에서 공주의 백제 왕궁이 갖는 의미가 있다. 

백제 왕궁은 현재 쌍수정 앞의 넓은 마당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1985 년에 발굴조사가 시작되어 그 결과 10 칸, 20 칸 등의 큰 건물터가 발견되고, 백제 양식의 연꽃무늬수막새가 발견되고, 기와도 다량 발견된다. 왕궁을 뜻하는 ‘궁(宮)’자가 새겨진 것도 있었다.가장 눈에 띄는 유적은 건물터 앞에 있는 거대한 연못으로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서 부서진 부분만 보수해 놓았다. 이 연못이 백제의 어느 왕조 때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는 동성왕 때 연못을 파서 진기한 새를 길렀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때의 연못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백제는 왕궁 안에 연못을 만들어 조경을 하였기에 이 연못도 왕궁과 관련이 있을 듯 하다. 이외 우물, 창고등의 흔적, 그리고 기와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 되었다.

 

[공산성 왕궁터]

공산성 백제 왕궁지는 백제가 한성에서 이곳 웅진으로 옯긴 475년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공주 시가지가 한눈에 보이는 높은 지대에 1935년 기마병 훈련장으로 사용되어  훼손 되었고, 1985년 까지는  전국자전거대회를 여는 등 운동장으로 사용 되었다. 1985년, 1986년 에 걸친 발굴 조사로 왕궁터주변을 평평하게 만드는 큰 토목 공사를 한다.

더운 날 그늘을 찾아 성벽이 아닌 산책길로 언덕에 오르니 광활한 터를 다 둘러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성벽을 한바퀴 돌아볼때 지나며 본 모습보다는 잘 정비 되어 있으나. 왕궁터라 생각하고 내려다 보니 좁고 높은 성안의 궁에서  한성에서 옮겨와 한숨을 돌리고  오래지 않아 도읍을  왜 사비로 옮겼는지 이해가 갈 듯 하다.

 

[공산성 쌍수정 사적비]
[공산성 쌍수정 사적비]

공산성 쌍수정 사적비는 조선의 16대 왕인 인조가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피하게 된 사실,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간의 행적, 공산성의 모습등이 적혀있다. 이조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 상수정 사적비는 1624년 인조가 공주를 떠난 직후 세우려고 했으나 84년이 지난 1708년 (숙종 34년)에 지금의 비석이 세워 졌다고 한다. 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과 목조 지붕 모습의 머리돌을 갖춘 조선 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을따른다.    

 

[쌍수정]
[쌍수정]

공주 쌍수정은 충청도 관찰사 이수항이 1734년 (영조 10년)에 인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누정이다. 조선 16대 왕인 인조(1623~1649)는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서 6일간 머물렀는데 당시 인조는 두구루의 나무아래에서 난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고 하는데,  난이 진압되고 기뻐하며 자신이 의지한 쌍수에 정3품의 벼슬을 내린다. 이후 공산성이 한때 '쌍수산성'으로 부른다. 
이수향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나무가 있던 자리에 삼가정을 세웠는데 이 건물이 쌍수정이다. 1970년애 해체한 후 다시 세운다.

 

[공산성벽]

총 연장 2,660m의 고대 성곽으로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한다. 475년 백제가 고구려에게 한성이 함락되고 난 후 급하게 도읍지로 삼았던 곳이기 때문에 산세가 험하다. 석성은 대부분 조선시대 때 만들어졌지만 일부는 백제 초축 당시의 성벽도 확인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아예 토성으로 형성된 구간이 있기도 하다. 더군다나 공산성은 복원정비를 70~80년대에 이미 다 완료하였기 때문에 백제가 사용하였던 성벽 부분을 확인하는 것이 쉽지 않다. 원래 백제시대에는 흙과 모래를 쌓아 건축한 판축식 건설로 만든 토성이었다. 일부 성벽을 절개한 조사에서도 그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대부분 성의 남동쪽을 조사했다. 해당 조사에서는 토성이 백제가 웅진을 도읍으로 삼은 당시 사용하였던 성벽이고, 지금의 공산성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개축하면서 축소되어 남았다고 보았다.

 

[공산성]

역사적으로 이곳 공산성에서는 많은 일 들이 있었다. 한성에서 쫓겨 온 백제왕조가 자리 잡고, 의자왕과 태자의 피난처였으며, 결국 백제의 멸망을 가져오고, 또한 백제부흥운동도 벌어진 곳이다. 통일신라 때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은 김헌창이 마지막까지 싸운 곳이며, 고려 때에는 거란침입을 피해 현종이 머무르기도 했고, 조선의 인조는 이괄의 난에 쫓겨 이곳으로 피신했다. 또한 갑오농민전쟁 때는 농민군의 거점으로 쓰여 관군과 큰 전투가 벌어진곳이기도 하다.

 

{성안마을]

2008년부터 성안마을 백제왕궁 부속시설 추정터를 조사해 온 공주대박물관은 인골을 비롯한 1300여년 전 백제 멸망기의 생생한 ‘타임캡슐’을 공개했다. 현장에는 나무틀로 짠 저온 저장시설인 깊이 2.6m의 대형 목제 창고(목곽고)와 저수지터, 정연한 사각 모양의 집터 7곳과 축대, 배수로 등이 드러났다. 유물로는 백제 멸망 당시 나당연합군과의 치열한 격전을 짐작하게 하는 무기류인 명문 새겨진 갑옷과 말갑옷, 칼과 화살촉, 말 잔등의 기꽂이들이 보였다. 중국 남조 양나라의 것으로 추정되는 자(양척)와 망치 등의 목공구, 조개, 굴껍질, 복숭아씨, 박씨 등 목곽고와 집터 등에서 나온 생활유물들도 한가득 선보였다.

이곳에는 충청감영이 있기도 했다. 임진 왜란을 통해 공산성은 전라도를 통해 들어오는 왜적을 막을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란 점이 부각되어 1603년 충청관찰사 유근에 의해 공주에 충청감영이 자리하게 된다.  이전에는 감영의 관찰사가 각 고울을 직접 돌아다니며 순찰하다가 유근 관찰사가 임명되어 공산성에 감영건물을 지으면서 머물러 다스리는 곳이 된다. 하나 공산성안은 좁고 길이 험해 안밖으로 들락거리기를 되풀이 하다가 1706년 봉황산 아래 지금의 공주사대부고 자리에 번듯한 감영건물을 지어 200여년가 유지된다. 

 

[공산성]

앞에 보이는 공산정이 있는 언덕으로 오른다 성벽길과 산책길이 같이 한다 한낮의 뙤얕볕이 무섭게 내려쪼인다. 이곳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성을 방어하거나, 이곳서 전쟁을 하던 병사들의 체력적 힘듬을 느껴본다. 이곳을 오르다 보면 대교와 공주시내를 볼 수 있다.

 

[배다리 모습]
[금강 철교]

금강철교는 공주가 발전하면서 금강을 건너는 나룻배로는 물자나 사람의 이동이 감당이 되지 않아 나무로 된 다리를 놓지만  홍수에 떠내려갔다. 그래서 만든 것이 배다리 인데 배다리는 나룻배 20~30척을 있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만든 다리로 폭 3m 길이 150m의 규모였지만 큰 홍수와 오랜 세월을 견디기 힘들었다. 1932년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가는 대가로 금강철교를 공주에 만들게 된다. 금강철교는 충청남도청과 바꾼 것이 된다.

 

[공산정]

공산정은 공산성 서북쪽 정상에 위치한다. 공주를 지날 때 산위의 공산정을 보며 원경을 즐겼는데 오늘은 그곳에 올라 본다. 공주시에서 보이는 공산성의 오른쪽 언덕에 자리한  높이 보이는 누정이다.

기이한 암석 덩어리를 옆에 끼고 축대로 높이 쌓여진 곳에 자리한다. 

 

[공산정]

공산정에서 볼 수 있는 금강의 낙조와 야경은 빼어난 아름다움을 펼치고 있어 그야말로 환상적인 곳이라 할 수 있다.

공산정은 유신대, 전망대 등으로 불려오다 2009년 공주시민들의 공모를 통해 공산정이라 지어졌다고 한다.

 

 

이누정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이곳의 안내문에서도 알 수가 없다. 이 누정이 만들어진 시기를 알아보려 자료를 찾아본다. 공산정 입구 안내판에 살펴보면 공산정이라는 이름을 갖기 전, 이곳은 유신대(維新臺) 또는 전망대 등으로 불려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몇몇 공산성 문화재 수리보고서나 단행 도서에는 유신각(維新閣)이라고도 표기된다. 유신대·유신각이라는 이름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유신(維新)’이라는 두 글자를 통해 우리는 그 유래를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유신각은 故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 선포를 한 1972년 10월에서 대통령이 사망한 1979년 10월 사이에  초헌법시대인 ‘유신시대(維新時代)’와 관련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97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 선포를 하였고, 1974학년도 공주 사범대학 졸업앨범에는 유신각의 모습이 보였으니, 유신각의 건립에 대한 합리적인 시간은 1973년이 되지 않을까. 출처 : 금강뉴스(http://www.kknews.co.kr) (작성자: 공주대학교 공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고순영)

 

 

한마음으로 세운 제민 천교 공주를 가로지르는 제민천은 여름 폭우에 범람하고 다리가 떠내려가는 일이 자주있었는데, 1817년 (순조 17)에도 많은 비로 제민천이 범람하여 다리가 떠내려 갔다고 한다. 이때 공사에 들어가는 3천여금이 소요되는 사업을  충청수영과 공주관아에서 비축해둔 군량미, 그리고 고을 사람들이 모은 기부금으로 제민천교을 다시 만들게 된다. 지금은 공산성 서문 앞으로 옯겨진 제민 천교 영세비에 이 사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공산성이 아무래도 왕궁이 있었다고 하기에는 추정 왕궁지의 규모가 굉장히 작다. 물론 백제가 힘들던 시절의 임시수도인 만큼 규모가 작을 개연성은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백제만한 규모의 나라의 궁성이 있었다기엔 너무 좁아보인 것이다. 이 때문에 공산성의 왕궁지가 진짜인가 아닌가 하는 논의도 굉장히 많았으나 이렇다할 대안이 마땅치 않은 현실이다.

 

[만하루와 연지]

1754년 (영조30)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연지는 가까이 있는 금강의 물을 가두어 성안의 물을 확보 하기 위한 시설이다. 연못이 무너지지 않도록 돌로 층층계단 형식으로 쌓았고 연못에 접근하기 쉽게 계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모습이 9층탑을 꺼꾸로 세운듯한 모습이다.  이 연지는 백제시대부터 계속하여 이용되어 왔음을 시사하고 있고 특히 암문을 통해 연지에 닿을 수 있는 완전한 유적을 발굴한 것은 산성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 것이라 하겠다.

공주 공산성 만하루(挽河樓)는 조선 후기에 세워진 누각이다. 일반적으로 누각은 문루이자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많이 이용되었다. 하지만 만하루는 풍광도 즐기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공산성 동쪽 누대에 해당하는 군사적 기능이 우선시되었던 누정이다. 금강을 내려다보는 만하루는 바로 뒤에 연지와 함께 홍수로 매몰되어 1984년 복원된 건물이다. 누각이지만 1층 기둥이 짧아 단층 건물같이 보인다. 

 

추정 왕궁지에 대해서도 왕궁이 맞다라는 견해와 임류각지가 왕궁이 있던 곳이라는 견해, 왕궁이 공산성 내부에 없을 수도 있다는 견해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공산성 내부라는 견해는 삼국사기에 "임류각의 동쪽에 궁궐이 있다"라는 기록에 기반하여 무왕 30년 사비도성 중수를 위해 임시로 웅진에 머물렀다는 기록을 통해서 궁궐은 공산성에 있다고 추정하였다. 더군다나 공산성 아래의 공주시내를 관통하는 하천인 제민천이 삼국사기에 범람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당연히 공주 시내에서도 높은 곳인 공산성 내부에 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였다. 추정왕궁지를 왕궁으로 본다면 왕궁으로써 갖추어야할 제반 시설이 입지할 공간 자체가 부족한 문제를 비롯하여 임류각보다도 작은 크기의 추정 왕궁지의 건물지들의 문제 등이 산적해 있으므로 지금의 공산성 내 추정왕궁지를 웅진기의 궁성으로 보지 않아도 된다는 반론을 제기하였다한다. 추정왕궁지가 정말로 왕궁이냐는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입지가 여러모로 안습한 공산성을 둘러싼 여러 정황들은 백제가 475년 고구려 남하로 일어난 위기를 극복해야 했던 상황을 대변한다.

공주의 여행을 통하여 옛 백제의 도성 한 곳을 알아보게 된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많은 사실이 밝혀지고 정리되어, 온전한 역사를 만나길 기대한다. 오늘은 햇볕이 따갑고 날이 더워 쉽게 지쳐옴을 느낀다. 길나서며 수없이 지나며 본 공산성의 숨은 사연이 백제에 있어서는 그리 아름답고 화려하지 만은 않았던 곳이라 생각하니 마음도 다소 지치게 된다. 나라의 흥망성쇠, 그리고 인생의 굴곡은 왜 마음대로 피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며 귀가한다.

 

如一 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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