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쉰다섯번째 - 논산

세종해피뉴스 2021. 12. 29. 01:53

논산으로 접어든다. 얼마전 안동의 병산 서원을 방문한것을 계기로 충청의 서원의 특징을 찾아 나서본다. 서원은 국내에 각 지역 마다 존재하지만, 그래도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보존된 47개의 서원 그중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9개의 서원이 오래된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서원은 향촌에 근거한 사림이 성리학의 이념을 가지고 설립한 사립교육기관으로 선현에 대한 제사부터 학문연구와 후학을 교육하던 곳이다. 향교는 고려. 조선 시대 각지방에 설립된 관립교육기관이다. 그리고 서당은 사림이 마을 단위로 설립한 사립학교로 향교나 서원 이전에 익혀야할 기초학문을 익히는 곳이다. 47 개의서원과 몇몇 향교를 찾아보는 것도 나름의 하나의 버킷리스트 이었으며 그간 여러 고을을 방문시 찾아보고는 있고 이미 9개의 문화유산 등재된 서원을 방문하여 보았으나, 이번의 여행에 다시 찯아보기로 하고 방문하여 보고저 한다. 

 

[논산 노강서원]

노강 서원 을 찾아 본다. 이번 방문길의 노강서원은 보수 중이다.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노강서원은 보물인 강당의 보수로 건물이 지어져 내부를 볼 수가 없다. 이전 큰 기대없이 방문하였다 보고 놀랐던 강당이 변모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단장을 하나보다. 아쉬움으로 공사현장을 둘러보고 바로 길을 나선다. 공사에 방해가 되지 않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서 이다.  정면의 홍살문과 강당 양쪽에 자리한 건물만 보고 자리를 비운다. 고사 현장의 모습과 몇해전 다녀간 흔적을 담은 사진으로 대신해본다.

 

 

노강서원은 동북쪽 노성의 호암산 자락이 길게 뻗어 이룬 나지막한 구릉을 등지고 자리 잡은 마을 뒤에 남서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마을 전방으로는 개천이 그 앞으로는 넓은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는 야거형(野居形)입지이다. 초입에 서 있는 홍살문을 지나 솟을 외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이  자리하고,  좌·우측에 동·서재가 마주보고  강학공간을 이루고 있다. 강당 뒤편  내삼문과 사당이 제향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내삼문도 일반적인 1동으로 하지 않고 3동으로 하여 예적 질서에 따라 신과 사람의 출입동선을 확연하게 구분한다. 노강서원은 1675년에 건립한 이후 한 차례도 이건하지 않고 대원군 때 훼철되지 않은 기호유학의 대표적 서원으로 들판에 입지하여 예적질서 체계를 부여한 전학후묘 형식으로 기호지역의 배치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강당은 충남지역에서 대표적으로 큰 규모이며, 이에 적절한 모양새의 기단과 초석이 화려함과 검박함으로 융합된 1출목 3익공의 공포 형식이 돋보인다. 맞배지붕에 덧붙은 ‘영’은 아주 귀한 시설로 풍우로부터 훼손을 방지하고 어색하게 높은 건물의 외관을 시각적으로 안정되게 할 뿐 아니라 팔작지붕의 곡선미를 조심스럽게 더해서 검소함을 잃지 않게 한 뛰어난 기법을 엿보게 한다. 청방간의 맹장지 4분합 굽널띠살 들문은 17세기 초 건물에서 주로 찾아 볼 수 있는 창호로 옛스러움을 더해주고 있다.

이처럼 노강서원 강당은 기호지역 유교건축의 귀중한 양식적 특징과 지역성 그리고 17세기 말 서원건축의 시대적 양상을 잘 살펴 볼 수 있는 건축물이다.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논산 노강서원은 숙종 1년(1675년), 조선 중기의 문신인 팔송 윤황(八松 尹煌, 1571~1639)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 교육을 위하여 세운 서원이다. 숙종 8년(1682년)에 사액(賜額)을 받았고, 윤황을 비롯한 윤문거(尹文擧, 1606~1672), 윤선거(尹宣擧, 1610~1669), 윤증(尹拯. 1629~1711) 등 충청도 지역 소론계의 대표적인 인물들을 배향(配享, 신주를 모심)하고 있다.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창건 이후 현재까지 340여 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 온 유서 깊은 서원이며 특히, 노강서원 강당은 17세기 말 이 지역 유교건축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201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노강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도로 외삼문, 강당, 사당을 서원의 중심축에,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대칭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어 서원건축의 규범을 잘 보여주는 중부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보물 제 1746호 논산 노강서원 강당 ]

강당은 전퇴를 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충남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서원 중에서 대표적으로 큰 규모이다. 평면은 가운데 큰 대청을 두고 그 양측에 온돌방을 놓았는데, 대청인 3칸의 주칸은 등간격이고, 온돌방인 양퇴칸의 주간은 대청 주간보다 좀 더 크게 잡았다. 건물의 정면 모두에는 4분합 굽널띠살 들문을 달고, 대청과 양측 온돌방 사이에는 건물 앞쪽으로는 2분합 맹장지 들문이 나있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의 맹장지 들문 형식은 소수(중건 : 1602년)·도동(이건 : 1605년)서원의 강당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오래된 모습이다. 구조양식은 장대석 바른층쌓기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약간의 배흘림이 들어간 원주를 세웠다. 기둥의 키가 비교적 높아서 축부와 옥개부가 비례적으로 약간 어색하지만 강학공간의 중심 건물로서의 위용을 갖추기 위함으로 여겨진다. 덧지붕 부분은 방형 초석위에 네모 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1출목 3익공식으로 짜서 얹었는데, 1·2익공은 앙서형으로 외단을 사절하고, 그 위에 각각 연봉과 연화를 새김하였으며, 3익공은 운공형으로 위에 당초로 초각했다. 보머리도 아래의 운공처럼 초각되어 있다. 출목 첨차는 양단을 비스듬하게 자르고 하단을 연화두로 장식한 고풍스러운 모양새다. 주간의 화반은 정면에는 초각하여 화려하게 하고, 배면은 장식 없이 방형 판재로 간략하게 하여 실용성을 높였다. 대청 상부 가구는 5량가로 자연스러우면서 장대한 대량이 위용을 더하고 있다. 옥개부는 겹처마 맞배지붕인데, 박공의 풍판 아래에 가례서에서 ‘영(榮)’으로 언급하고 있는 짧은 덧지붕이 눈썹처럼 달려 있다. 이런 덧지붕은 인근 돈암서원의 응도당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독특한 시설로 빼 놓을 수 없는 특징 중 하나이다.

 

 

잘 복원될 강당을 머릿속에 그리며 차를 돌려 돈암서원으로 향한다. 이곳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고,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라 잘 정비 되어 있지만, 다만 이곳 큰갈옆에 주차장이 자리하고 있어 바로 서원입구로 속도를 줄이고 진입하는 다소 가탈스러운 곳이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서원을 향해 잘 정비된 길을 따라 조금 걸으면 서원의  건물이 보인다.

 

[ 세계문화유산 돈암서원]

이 돈암서원은 김장생(1548∼1631) 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인조 12년(1634)에 건립한 서원이다.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사상과 학문을 이은 예학의 대가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을 쏟은 인물이다.

원래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가 경회당을 세워 학문연구에 힘쓰고, 이후 김장생이 양성당을 세워 후진양성을 하였다. 후세에 이 경회당과 양성당을 중심으로 서원을 세우고 김장생을 추모하여 후학에 힘썼다. 현종 원년(1660)에 왕이 돈암이라는 현판을 내려주어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추가로 모시었다. 이 서원에는 『황강실기』, 『사계유교』, 『상례비요』 등의 서적들이 보존되어 오고 있으며, 사우(祠宇), 응도당, 장판각 등의 건물들과 하마비, 송덕비가 남아 있다. 이 서원은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후에도 남아 보존된 47개의 서원 중의 하나로,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던 전통있는 곳이다.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으로 소수서원(영주), 남계서원(함양), 옥산서원(경주), 도산서원(안동), 필암서원(장성), 도동서원(달성), 병산서원(안동), 무성서원(정읍), 등과 함께 등재된다 (2019. 7. 6.) 

 

[보물 제 1569 호 논산 돈암서원 응도당]

선현께 제사지내고 학문을 이어받고자 설립한 조선시대 사립교육기관으로 인조 12년(1634)에 세웠다. 김장생(1548∼1631)을 중심으로 김집, 송준길, 송시열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없어지지 않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응도당은 학문을 갈고 닦던 강당으로 서원 옛 터에 남아있던 것을 1971년 지금 있는 곳으로 옮겼다. 건물을 옮길 때 기와에 적힌 기록을 발견하면서 오래된 건물임을 알게되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이다. 조선 중기 이후 서원 성격 중 강당으로는 보기 드물게 큰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옛 양식을 잘 따르고 있는 건물로 강당 건축 연구에 좋은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돈암서원 유경사 꽃담]

선현께 제사지내고 학문을 이어받고자 설립한 조선시대 사립교육기관으로 인조 12년(1634)에 세웠다. 김장생(1548∼1631)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처음 세웠으나, 훗날 제사를 지내는 유경사에 김집, 송준길, 송시열의 위패를 추가 배향하였다. 현종 1년(1660) 임금에게 ‘돈암’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으며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없어지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돈암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많은 인물을 배출한 유서 깊은 곳으로 해마다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꽃담은 이곳이 특별한 공간임을 나타내는 전통 담장이다. 글귀는 [지부해암] 대지가 만물을 짊어지고 바다는 만터천을 포용한다, [박문약례] 지식은 넓히고 향동은 예의에 맞게하라, [서일화풍] 상서로운 햇살과 온화한 바람이 뜻으로 논어 대학 등에 나오는 글귀로 담장 하나에도 명문으로 장식의 효과와 그뜻을 새김이 놀랍다.

 

조용한 서원내부를 천천히 여기저기 걸어보고, 응도당 너른 마루에  앉아서 앞마당을 내려다본다. 흐르는 새월속에 이 마당을 밝고 다녔을 사람들, 겹치지 않고 나름 그 시간 속에 존재했을 사람들을 이 강당은 다 내려다 보았고, 각자의 뜻을 세우고 강당 마루에서 서책과 씨름했을 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선비들을 품어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내가 이곳에 앉아본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반문해본다.  잠시 머문 이곳에 나는 같이 했음을 기억하고저 사진을 남긴다. 영속한 시간 속에 그래도  잠시 머물다간 흔적을 남긴건 선대가 갖지 못한 나만의 존재 확인, 그리고 이를 글로 남길 수 있다는 것은 그저 사진만 찍고 혼자 방문을 증명 하는 이들 보다는 그래도 확실한 나의 방문의 흔적을 남기는 혜택이 아닌가 생각하며 의미없이  웃어본다.  

 

사찰이 비치는 저수지
부도군
 [논산 쌍계사]

서원 두곳을 방문하고 산사를 찾아본다. 쌍계사라는 이름의 유명한 사찰이 여러군데 있지만 논산의 쌍계사 또한 모물로 지정된 대웅전 과 삼불좌상을 가지고 있는 고찰이다. 깊은 산세는 아니나 사찰을 품기에는 충분한 산세에 입구에는 아담한 저수지가 있고, 사찰까지의 도보여행도 그리 힘들지 않은 곳이다. 저수지를 내려다보는 길옆에는 많은 곳에 사리탑이 자리하고, 길을 따라 가면 이층 누각 건물이 보인다. 이곳을 지나 오르면 너른 마당 한편에 연리지 나무가 그 웅장한 모습을 보이고, 정면으로 오래됨을 짐작하게 하는 대웅전 건물이 보인다.

 

[보물 제 408 호 논산 쌍계사 대웅전]

쌍계사는 언제 세웠는지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현재 남아있는 유적으로 미루어 보면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15년(1739)에 세운 비가 남아있어 그 당시 절을 고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절의 중심 법당이라 할 수 있는 대웅전은 건축 형식으로 보면 조선 후기 건물로 1972년 보수공사가 있었고 1973년에 단청을 다시 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정면의 문은 앞면 5칸을 모두 같은 간격으로 2짝씩 달아 문살에 화려한 꽃새김을 하고 있다. 꽃무늬는 연꽃, 모란을 비롯해 6가지 무늬로 새겨 색을 칠하였는데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 솜씨를 엿보게 한다.

건물 안쪽은 우물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몄으며,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신 불단 위쪽으로 불상마다 지붕 모형의 닫집을 만들어 엄숙한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다.

예술 가치가 높은 문살 조각을 볼 수 있고 조선 후기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어 잘 보존해야 할 문화재이다.

 

삼존불의  후불탱화
삼존불이 모셔졌던 모습 (2020년)
[보물 제 1851호 논산 쌍계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2020년

오늘은 개금 불사로 인하여 자리를 옮겨 삼존불상은 볼 수 없어 이전의 사진으로 대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내게는 온전한 후불탱화를 보는 행운이 따랐다

논산 쌍계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조선후기 17세기 초에 활약했던 조각승 元悟비구가 만력 33년(1605)에 수조각승을 맡아 信玄, 淸虛, 神釰, 希春이라는 네 명의 보조조각승과 함께 제작한 상이다. 당시는 임진왜란 중에 피해가 컸던 여러 사찰들의 중창이 곳곳에서 일어나던 시기였으므로 이 때 쌍계사도 2층의 불전을 세우고 그 안에 석가, 아미타, 약사로 구성된 삼불상을 봉안했던 듯하다. 삼불상의 어깨가 넓고 허리가 긴 장대한 체구는 고려후기에서 조선전기로 이어진 불교조각의 전통을 잇고 있으며, 살이 많은 풍만한 얼굴과 부푼 눈두덩, 오뚝한 콧날, 넓은 인중,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 미소 띤 자비로운 표정은 위봉사 북암 보살입상(현재 익산 관음사와 혜봉원에 각각 1구씩 봉안)의 사실적인 얼굴과 거의 흡사하여 원오의 독특한 작풍을 드러낸다. 논산 쌍계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1605년이라는 제작시기가 분명하고 조각승 원오의 대작이다.

오늘은 가는 곳마다 보수 공사가 한창이다. 많은 문화재를 돌아가며 보수 하는 것을 접하며 너무 새롭지만 않으면 생각해본다. 단장된 새것보다 고풍으로 세월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아 보여서 이다.

 

지방마다 문화재로 지정된 것을 가지고 있는 숫자가 일정하지 않고 그 분포도 사실은 예전에 문화의 중심지였던 곳에 집중되어 있다고 본다. 그러한 조건에 보면 공주, 부여, 논산은 백제 문화를 많이 담고 있는 곳이라 많은 것들을 품고있다. 아직 어느 야산 아래에 우리의 못다 찾은 유적이나 유물이 산재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아니면 사람에 의해 창조 조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논산도 둘러보면 아직 보지 못한 것도 많고 소개 못한 것도 많다. 늘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한다. 다음에 올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도 여행의 여유로움이 아닐까 한다. 오며 가며 지나는 길에 옥정호를 지척으로 보며 간다. 멀리 보이는 옥정호 다리를 보면서 지나가는 길, 코로나로 입장을 꺼려하던 우리에게 쟁반에 음식을 차려주어, 배달음식이 아닌 차려진 밥상을 차에서 먹을 수 있게 배려해 주신 어탕집을 지나며 감사의 미소를 날리고 귀가한다.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참조]

 

如一유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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