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쉰여섯번째 - 부여

세종해피뉴스 2021. 12. 29. 01:40

부여로 길을 나선다. 년말의 갑작스런 한파로 인한 찬 기온탓에, 여행지를 실내인 부여의 국립박물관으로 정하고 길을 나선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로 이동 간 그리고 관람간에 느낀 나들이 나온 관광객은 드물다. 기록을 추적하니 2013년 이곳을 방문하고 다시금 오게 된 것 같다. 깔끔해진 느김을 받으며 전시장으로 향한다.

 

 

전시장 입구에서 코로나 방역으로 인한 절차를 마친후 내부로 들어선다. 

 

 

박물관의 중안에 석조가 자리하고 빙둘러 휴식공간을 마련하고 그 뒤편에 전시관이 부채꼴로 퍼져 있다. 전시관은 4개의 관으로 꾸며져 있는데, 제1관은 부여의 선사와 고대문화, 제2관은 사비백제와 금동대향로, 제3관 백제의 불교문화 그리고 또한 공간은 기증 전시실이 있다. 들어설 때의 느김은 짜임새 있고, 밝고 전시물을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어,  아늑하고 세련된 공간과 모양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전의 부여석조는 이렇듯 밖에 노출되어 진열되어 있었다.

 

 

[ 보물 제 194호 부여 석조]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석조는 왕궁에서 연꽃을 심어 그 꽃을 즐겼다는 전설이 있는 백제시대의 유물로, ‘工’자형의 받침대 위에 둥근 꽃망울 형태로 올려져 있다. 받침대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간결한 모양이다. 그 위에 놓인 석조는 입구가 약간 오므라들면서 밖으로 둥글게 원호를 그리며, 바닥은 평평한 듯 하나 완만한 곡선이다. 표면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8개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고,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의 1층 탑 몸돌에 새겨진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했다는 내용과 같은 글을 새기려던 흔적이 보인다. 이 석조에는 연꽃무늬 장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사찰과 관계된 유물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본래 이 석조가 있었던 장소가 백제시대의 왕궁터로 전해지고 있어 당시 왕궁에서 쓰이던 석련지(石蓮池)가 아니었나 짐작된다. 형태가 풍만하면서도 깔끔한 곡선으로 처리된 석조로, 백제인의 간결하고 소박한 미적 감각이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의 박물관에는 회화제품이 많이 없어 앉아서 감상하는 의자가 전시실 내에 거의 없다. 이곳에 앉아서 감상하는 그러한 분위기를 느껴보려,  잠시 앉아서 석조를 감상해본다.  자리를 시계 방향으로 돌며 옮겨보기도 한다. 예전 밖에 덩그라니 놓은 것보다는 훨 가치있어 보이고 오래 볼 수 있어 좋다. 제1관 부여의 선사와 고대문화를 둘러본다. 보물이 눈에 띄지 않아 서둘러 둘러본다.

 

[제1관 부여의 선사와 고대문화]

부여의 선사와 고대문화의 전시실로 송국리식토기 , 서산휴암리유적 출토 민무늬토기와 골아가리토기, 대쪽모양의 동기 , 유리대롱, 홈자귀와 돌도끼 등의 부여주변의 석기시대부터 청동기, 철기문화가 전시되어 있다. 서둘러 제2 전시관으로 향한다.

 

[제 2관]

제2관은 사비시대의  백제 유물과  금동향로가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호저와 백제 창왕명 석조사리감, 부소산성출토 철기류, 연통 모양 토기연가등 다양한 유물이 있으며, 이곳의 전시물인 사택지적비는 특별전시장에 옯겨져 있다.  백제 부여의 사비시대의 다영한 유물을 전시하여 놓은 것이다.

 

[국보 제 288 호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 사리감]

이곳 전시관에 전시된 보물 중의 하나인 석조사리감이다. 백제 때 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로, 능산리 절터의 중앙부에 자리한 목탑 자리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출토 당시 이미 사리감이 훼손된 상태로 사리 용기는 없었다. 사리감은 위쪽은 원형, 아래쪽은 판판한 터널형으로 높이 74㎝, 가로·세로 50㎝이다. 감실 내부의 크기는 높이 45㎝ 정도로 파내었으며, 내부에 사리 장치를 놓고 문을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턱이 마련되어 있다. 감실의 좌·우 양 쪽에 각각 중국 남북조 시대의 서체인 예서(隸書)풍의 글자가 10자씩 새겨져 있다. 명문(銘文)에 의하면 성왕(聖王)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昌王)[위덕왕(威德王)]에 의해 567년 만들어 졌으며, 성왕(聖王)의 따님이자 창왕(昌王)의 여자 형제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내용으로 파악된다. 이 사리감은 백제 역사 연구에 새로운 금석문 자료로서 백제와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고, 백제 절터로서는 절의 창건연대가 당시의 유물에 의해 최초로 밝혀진 작품으로서 그 중요성이 크다.

 

[상영사진]

제2관 전시실의 뒤편에 마련된 백제 금동향로는 금빛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이전에 방문시의 모습이 아니라, 특별공간의 중간에 자리하여, 멋진 조명 속에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곳의 천장을 스크린으로 하여 영상이 상영되는데, 다른 분들이 이것을 관람하러 석조 주변에 둥글게 모여 관람하는 사이 , 혼자 만이 공연을 뒤로 하고 입장 한다. 혼자만이 혼잡을 피하여 향로를 볼 수 있는 행운을 얻기 위해 안으로 들어선다. 영상은 놓혔으나 적막함 가운데 홀로 향로를 독점한 것은 큰 행운이다. 빙둘러 전체의 모습을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혼자 관람하는 시간은 나만이 누리는 행복이다.

 

[국보 제 287호 백제금동대향로]

이곳의 향로가 진품이고 중앙박물관은 모조품 이라 한다. 능산리 사지에 오랜세월 땅속에 있었어도, 진흙에 묻혀 산소가 차단되어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한다. 주변에는  기와와 토기 조각 등이 함께 발견되고, 섬유 조각도 발굴된다. 대향로를 감싼 천이 세월이 지나 삭은 것이라고 추정한다.  발굴 결과 대향로가 발굴된 곳이 원래는 사찰 내에 부속된 대장간 자리였다. 1993년 12월 12일 처음 발견된다.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백제의 향로이다. 높이 61.8㎝,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다. 뚜껑 꼭대기에는 별도로 부착된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 특징이라 하겠다. 봉황 앞 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에서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키는 아래의 몸체는 하나하나의 연잎의 표면마다 불사조와 물고기, 사슴, 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받침대는 몸체의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 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중국과 달리 산들이 입체적이며 세부의 동물과 인물상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백제시대의 창의성과 뛰어난 조형성을 바탕으로 당시 도교와 불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 공예기술 및 미술 문화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게 해주는 백제 금속공예 최고의 걸작품이다.

혼자만의 감상이 영상이 끝나며 물밀듯이 들어 오는 관람객으로 멈춘다. 서둘러 제 3관으로 이동해 본다.

제3 전시실에 들어서면 유리상자안에 작은 금동불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의 백제의 불교문화를 모아놓은 것이다. 불상이외 많은 문화재가 전시되어 있다.  

 

[국보 제 293호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 보살입상]

1907년에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의 절터에 묻혀 있던 무쇠솥에서 다른 하나의 관음보살입상과 함께 발견된 보살상으로 높이는 21.1㎝이다. 머리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진 관(冠)을 쓰고 있으며, 크고 둥근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 목에는 가느다란 목걸이를 걸치고 있고, 가슴에 대각선으로 둘러진 옷은 2줄의 선으로 표시되었다. 양 어깨에서부터 늘어진 구슬 장식은 허리 부분에서 자그마한 연꽃조각을 중심으로 X자로 교차되고 있다. 치마는 허리에서 한번 접힌 뒤 발등까지 길게 내려와 있는데 양 다리에서 가는 선으로 주름을 표현하고 있다. 오른손은 엄지 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으로 작은 구슬을 살짝 잡고 있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져 옷자락을 잡고 있다. 보살이 서 있는 대좌(臺座)는 2중의 둥근 받침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형태로 소박한 느낌을 준다. 얼굴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미소와 비례에 맞는 몸의 형태, 부드럽고 생기있는 조각수법을 통해 7세기 초 백제시대의 불상임을 알 수 있다.

 

[보물 제 330 호 부여 군수리 금동보살보살 입상]

부여 군수리 금동보살입상(扶餘 軍守里 金銅菩薩立像)은 1936년 충청남도 부여 군수리 백제 절터를 조사할 때 발견된 금동보살이다. 머리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관(冠)을 쓰고 있고, 얼굴 좌우로 두꺼운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얼굴은 둥글고 원만하며, 깊이 있는 내면의 웃음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백제인의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다. 신체는 두꺼운 옷에 싸여 있으나 비교적 양감이 있고 당당한 모습이다. 배에서 X자형으로 교차되는 옷은 발목 부분까지 길게 늘어져 새의 날개깃처럼 양쪽으로 퍼진 모습이며, 발목까지 내려온 또다른 옷자락에는 U자형의 주름이 표현되어있다. 오른손은 네번째 손가락과 새끼 손가락을 구부린 채 위로 향하고 있고 왼손은 손등을 보이면서 아래로 내리고 있다. 이 불상은 옷모양, 손모양 등이 시대적 특징을 나타내주고 있으며, 넓은 얼굴과 풍만한 미소는 백제불상에 즐겨 묘사되는 것으로 백제인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6세기 불상으로 보인다.

 

 

[보물 제 196호 부여 정지원명 석가여래삼존입상]

이 보물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백제 전시실에 출장 중이다 라는 사진 설명과 함께 비어 있어 직접 볼 수가 없다.

하나의 광배에 불상·보살상을 함께 주조한 삼존불(三尊佛)로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광배(光背)의 뒷면에는 정지원이라는 사람이 죽은 아내를 위하여 금으로 불상을 만들어 저승길을 잘 가게 했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있다. 본존불의 얼굴은 갸름하면서 살이 오른 모습으로 눈·코·입의 윤곽이 큼직해서 시원해 보인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U자형의 주름을 지으면서 묵중하게 흘러내렸는데, 양 팔에 걸친 옷자락은 새의 날개깃처럼 양 옆으로 길게 뻗쳐있다. 손은 손바닥이 정면을 향하고 손끝은 아래로 향하고 있다.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의 양쪽 끝에는 합장하고 있는 두 협시보살이 있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본존불과 동일한 수법이며 길게 날리고 있는 옷자락은 광배의 가장자리를 이루고 있다. 왼쪽 협시보살은 얼굴만 남아 있고 신체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머리광배 위에는 연꽃속에 앉아 공양하고 있는 모습의 작은 부처 1구가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조각양식이나 표현 수법이 고구려의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국보)과 같은 계통으로 중국 북위시대에 유행한 불상양식을 수용한 것이다. 금동계미명삼존불(국보)이나 금동신묘명삼존불(국보)과 같은 양식에 속하지만 그보다 조각수법이 약간 떨어지고 무늬가 간략화 되었으며 조형적인 탄력도 많이 감소되었다.

 

[국보 제 327호 부여 왕흥사지 출토사리기]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는 2007년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유물로,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가장 오래된 사리기이다. 부여 왕흥사지(王興寺址)라는 출토지가 분명하고 청동제 사리합에 새겨진 명문에 의해 577년(위덕왕 24)에 제작한 사실을 알 수 있어 절대연대가 확실할 뿐 아니라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의 문헌 기록을 보완 할 수 있는 자료이다.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는 전반적인 형태와 세부 구조물을 주조하고 접착한 기법과 표면을 깎고 다듬는 기법 등에서 수준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어 백제 장인의 숙련된 솜씨를 엿볼 수 있다. 특히 단순하고 단아한 형태와 보주형(寶珠形) 꼭지, 그 주위를 장식한 연꽃문양 등을 통해 525년 조성 무령왕릉 출토 은제탁잔(銀製托盞) 등의 영향을 받아 7세기 전반 미륵사지 사리기에 조형적으로 영향을 끼친 6세기 후반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이외의 많은 불상과 무늬 벽돌 그리고 사리장엄구등 불교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의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찬바람이 볼을 때린다. 오늘 박물관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가지며  별관의 백제인 돌을 다스리다라는 특별전을 관람하러 발걸음을 옮긴다.  입장시 받은 방역점검 확인을 득한 자에 주는,  손묵 인식표를 차면, 특별전 입장 시 통과할 수 있는 편의를 주고 있다. 

 

如一유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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