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마흔 여덟번째 - 서천, 군산

세종해피뉴스 2021. 11. 21. 15:56

충남 서천으로 향한다. 서천에 있는 국립생태원을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길을 나선다. 서천을 들어서며 보물 1751호로 등재 되었던 봉서사의 목조 아미타여래 삼존좌상을 먼저 만나러 간다. 서천의 몇 안되는 보물 중의 하나이다. 도착해보니 사찰 입구에 새로이 주차장 부지가 확보 되어 있어 ,이곳에서 봉서사와 건지 산성을 둘러볼 수 있게 되어 있지만 사람의 발길이 뜸하게 느껴진다.

 

건지산성은 건지산의 정상부근을 에워싼 말안장 모양의 내성과 그 서북쪽 경사면을 둘러싼 외성의 2중구조로 되어있는 산성이다.

 

[건지 산성 (국가문화유산포탈 자료)]

산성의 내력을 국가 문화유산 포탈서 항공사진과 설명으로 대신해 본다. 성을 쌓은 시기는 백제 말에서 통일신라 전기로 보고 있다. 비교적 큰 규모의 산성으로, 내성은 흙으로 쌓았고 외성은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하여 쌓았다. 이러한 2중구조의 산성은 특히 백제 말에 나타난 새로운 산성의 형식으로 알려져있다. 또한 산성의 남서쪽 낮은 봉우리에는 2개의 소규모 산성이 있는데, 이는 건지산성에 딸린 부속성으로 방어를 위한 보루로 볼 수 있다. 이 구조 역시 백제식 산성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산성의 북쪽은 험준한 천연의 암벽을 이용하여 성벽을 삼았고, 나머지 부분은 흙으로 쌓았으나 심하게 붕괴된 상태이다. 문터의 흔적은 찾을 수 없으며 성안에 봉서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봉서사 서쪽에 건물터로 보이는 계단 모양의 평지에서 불탄쌀과 백제의 토기조각이 출토되었다.

 이 산성은 금강 하류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이었던 주류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발굴조사를 통하여 삼국시대에 쌓은 성이 아닌 고려시대 산성일지도 모른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봉서사]
[봉서사 대웅전]

극락전에 모셔진 목조 아미타여래 삼존 불상을 접한다. 요즘은 사찰 내의 법당안의 불상의 촬영을 금지하는 표찰을 보게 되는 데, 이곳도 사진 촬영이 금지 되어 있다. 사실은 사진촬영을  마치고 나니 단에 자그마하게 붙어있는 것을 보게 된다. 마치 무언가 잘못을 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뭔가 규칙을 어긴 느낌이다. 사진 촬영금지는 성스러운 모습을 찍어서 일까? 초상권의 침해, 아니면 카메라 불빛에 의한 문화재의 손상, 많은 생각이 순간 든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문화재 요금이나 입장권을 받는 사찰에서 더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본다. 그곳의 보물이 더 가치 있어선가 아님 발길이 많아서 인가? 아마도 사찰 마다의  나름의 규정이겠지만  아무튼 사진 촬영에 관한 문화재 보호 차원의 기준이 있었으면 한다. 관람객이 불편한 마음을 갖지 않고 이해 할 수 있는, 공론화된 규정이 있었으면 한다. 많은 노력과 관심을 찾았는데 제재를 당하였을때의 기분은 그닥 행복 하지 않고, 잘못하면 나쁜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억과 기록이 중요할 수도 있으니, 그에 대한 보상도 생각해 주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목적이 아닌 촬영에만 신경 쓰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 또한 베품의 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보물 서천 봉서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 좌상]

서천 봉서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2012년 2월 보물로 지정된 아미타여래를 본존으로 관음, 대세지보살이 협시하는 아미타삼존 형식이며, 조선 후기의 예 중에서 이른 시기에 해당한다. 삼존상에서 발견된 발원문(發願文)을 통해 1619년이라는 정확한 조성시기와 조성주체, 시주자 등 조성과 관련된 기록이 전하고 있어 이 시기 불상연구에 기준자료를 제공한다.

 

이 불상을 만든 수연(守衍)은 17세기 전반기에서 중반기에 걸쳐 활동한 조각승인데, 그는 1615년 태전(太顚)을 도와 김제 금산사 독성상을 제작하였고, 1622년에는 현진(玄眞)을 도와 서울 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상을 제작하였다. 이후 강화 전등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1623년)과 익산 숭림사 영원전 지장시왕상(1624년), 그리고 예산 수덕사 대웅전 석가여래삼불좌상(1639년)을 수조 각승으로 참여하여 제작하였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며, 그의 초기의 조각적 경향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작품이다. 즉 턱이 짧은 넓적한 얼굴에 도톰하게 자리 잡은 넓적한 코, 여기에 짧은 인중과 두툼한 턱으로 중후하면서도 개성이 넘치는 얼굴, 넓고 두툼한 가슴과 긴 허리에서 오는 중량감 넘치는 형태, 강직한 선 위주로 표현한 도식화된 주름이나 왼쪽 어깨나 무릎 아래로 펼쳐진 독특한 형태의 주름 표현 등에서 그의 조각적 경향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삼존상은 17세기 전반기 추구했던 대중적 평담미와 수연이 추구한 중량감 있는 형태미를 잘 보여주고 있는 불상으로 평가된다.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문헌 서원]

가을의 느낌이 물신나는 인적이 드문 이곳을 나서며 건지 산성입구를 지나, 고려만 충신 이색선생과 가정 이곡선생의 학문의 업적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선조 27년에 세워진 문헌서원으로 행한다. 봉서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문헌서원은  입구부터 잘 정비된 유적지이고 전통의 기와집이 어우러진 숙소가 보이고 뒤편의 멀리 서원이 자리한다. 

 

[위패를모신 사우]
[진수당]

가정 이곡(1298∼1351)과 목은 이색(1328∼1396)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곡은 고려 후기 학자로서 이색의 아버지이다.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았고, 문명을 떨쳤다. 이색은 고려 후기 문신이며 학자이다. 원·명교체기에 친명정책을 지지하였고,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권근, 김종직, 변계량 등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문헌서원은 선조 27년(1594)에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그 뒤 광해군 2년(1610)에 한산고촌으로 옮겨 다시 세웠다. 이듬해에 나라에서 문헌이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고 인재 이종학·음애 이자·배옥헌 이개 등을 추가로 모시게 되었다. 고종 8년(1871)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

그 후에도 처음 문헌서원이 있던 곳에 단(壇)을 만들고 분향해 오다가 1969년 지금 있는 자리에 다시 짓고 문양공 이종덕 한 분을 더하여 여섯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사원 철폐로 인해 새로이 지어져서 이지만 사각형의 연못에 자리한 정자가 가을의 썰렁함 에서도 볕속에서 따뜻하게 자리하고, 여러채의 건물이 조화를 이루고,  목은 이색의 영정을 볼 수있는 영당 , 장판각이 있으며, 왼쪽편에  잘 보전된 가꾸어진 목은 묘역등을 둘러보며, 이색의 충정심을 기려보는 시간을 가져 본다. 

목은의 전신상을 뒤로하며 생채원으로 향한다. 

 

국립 생태원이다. 주차 후 이곳에서  휠체어를 빌려 입장을 시도 하였으나, 정문에서부터 생태원까지 15분을 의 걸어야 한다고 하니 휠체어를 밀고 가기 먼거리라 생각되고, 셔틀 버스는 운행되나 모친이 타기도 힘들고 하여 망설이게 되고, 내부의 관람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어 관람을 포기하게 된다. 막무가내식으로 여향을 떠나는 내가 이따금 당하는 난처한 상황이다. 미리 공부보다는 부딪히는 스타일이다. 지금 다니는 길도 여러번 지나친 길이고 , 다음을 기약하고 다시 찾는 덕분이다. 고맙게 입구에서 주차장 까지와 같이와서 휠체어를 인도 하는 수고를 자처하며  웃음으로 대해주는 직원의 도움으로 이곳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잊게 해준다. 이름 삼자 알아 기억해본다. 이진영 직원의 몸에 밴듯한 친절과 격려속에 다음을 기약하고 물러나오게 된다. 그로 인해 웬지 모를 행복감이 드는 서천 여행 이다. 기억에 좋은 일은 많은 사함이 공유하였으면 한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이곳 수문장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관람할 수 있게 웃음으로 대해 주시길 바라며 아울러 많은 사람이 방문하길 바라본다.

 

 

길을 나서면서 가까운 신성리 갈대밭에 들려본다. 주차장에서 판매하는 가게에서 권하는 맛배기 군밤하나와 몇톨인가의 땅콩의 고소함을 입안에 느기며, 넓게 조성된 갈대밭을 바라본다. 갈대밭 사이를 걸어보는 여유로움을 맛보지 못한채, 마음은 국립생태원을 못보아 남게된 시간을 보낼 장소로 고민한다. 사실 이곳 서천에서 이제  더이상 정보가 없어,  올라가며 보려 했던 서천의 다른 보물인 서천 성북리 오층석탑을 가기엔 조금은 시간이 남아 군산으로 길을 접어든다. 금강을 동북대교를 건너 군산시로 접어들어 월명산 동국사를 찾아나선다.

 

[동국사]

이곳의 군산 동국사 소조석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이 보물로 2011년 지정되어 있어 이를 보러 간다

 

일본 조동종(曹洞宗) 승려 우치다[內田佛觀]가 1909년 8월 군산의 외국인 거주지 1조 통에 세운 금강선사[금강사]에서 동국사는 출발한다. 당시 금강사는 '포교소'였다. 우치다는 1913년 군산 지역 대농장주 구마모토[熊本利平]와 미야자키[宮岐佳太郞] 등 29명의 신도에게 시주를 받아 지금의 자리에 대웅전과 요사를 신축하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미군정에 몰수됐다가 1947년 불하받아 사찰 기능을 재개하였다. 1955년에는 '불교 전북 종무원'에서 인수하여, 김남곡[1913~1983]이 이제부터는 ‘우리나라[海東國] 절이다’는 뜻으로 '동국사'로 등기를 내고, 1970년 대한 불교 조계종 제24교구 선운사에 등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등록 문화재 제64호인 대웅전은 건축 자재를 일본에서 가져와 지었으며, 우리나라의 전통 사찰과 달리 승려들의 거처인 요사와 복도로 연결된 것이 특징이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정방형 단층 팔작 지붕 홑처마 형식의 대웅전은 일본 에도 시대 건축 양식으로 외관이 무척 단조롭다. 지붕 물매는 75도의 급경사를 이루고, 건물 외벽에 창문이 많으며, 용마루는 일직선으로 한옥과 대조를 이룬다.

불상의 봉안처인 동국사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승려들이 운영했던 사찰이다. 대웅전은 비록 내부 공간이 바뀌었지만 일본 에도[江戶] 시대의 건축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사찰이다. 때문에 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상과 복장 유물은 해방 이후 금산사에서 가져온 불상인데 이는 일본의 억압을 벗어난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동국사는 2003년 7월 15일 문화재청에 의해 등록 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었으며, 대웅전에 있는 석가 삼존불은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213호로 지정되어 있다가 2011년 9월 5일에는 이러한 가치를 모두 인정받아 보물 제1718호로 지정되었다. 2011년 보물로 지정 된다.

 

[소조 석가 삼존 불상]

소조 석가여래 삼존 불상은 본래 1650년에 제작되어 금산사 대장전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금산사에서 현재의 동국사로 옮겨지게 되었다. 복장 유물을 통하여 불상의 조성 시기, 조성 주체를 알 수 있어 당시의 불교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석가여래불, 가섭 존자, 아난존자의 구성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희귀하다고 할 수 있다.

 

복장 유물로는 경전류, 후령통[복장에 넣는 통] 등 373점이 확인되었는데, 이를 통해 불상의 조성 시기, 조성 주체 등을 알 수 있다. 불상 조성에는 당대를 대표하는 승려인 호연 태호(浩然 太湖)와 벽암 각성(碧巖 覺性)이 불사를 이끌고, 부드럽고 온화한 조각을 구사한 승려인 응매(應梅)가 조각을 주도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150cm가 넘는 대형상으로는 유일한 아난과 가섭을 협시로 한 석가여래삼존이며, 이 불상 들에서 나온 전적물이나 복장물의 기록에서 이 상이 전라도 지역에서 활약하였던 이름이 알려진 조각승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불상양식이 형식적으로 흐르기 전 단계의 소조불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고 보며 세 불상에서 나온 복장물은 후령통의 제작기법, 내용물, 재질 등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나만의문화유산참조]

 

[종각]1919년 건립된 국내에 현존하는 유일의 일본식 종각으로 범종은 1919년 됴토에서 고교재치량이 제작하고 창건당시의 금강사 내력이 적혀있다.

 

[평화의 소녀상, 종각옆의 불상은 33가지 모습을 조각한 관세음 보살상 33기와 12지 본존불 8기이다]

평화의 소녀상 국내 11번째 이 소녀상은 지난 2012년 9월 자국이 행한 과오에 대한 불교적 참회와 사죄의 뜻을 담아 일본불교 종단인 조동종이 군산 동국사 경내에 세운 참사문비 앞에 세워졌다. 전북 출신의 고광국 작가가 제작한 소녀상은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 당시 17세 전후 여학생 사진 300여장을 검토해 키 158cm의 청동 조각상으로 제작됐으며, 한복 차림에 맨발로 서 있는 앳된 단발머리 소녀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소녀상 주변으로는 77개의 검정 타일을 사용해 대한해협을 상징하는 사각 연못을 제작해 소녀상의 얼굴이 비치도록 설계했다. 출처 : 불교신문

 

시는  군산 평화의소녀상 이전추진위를 구성한 뒤 시민 설문조사 등을 통해 새 이전장소를 확정할 예정이다. 현재 거론되고 있는 예상부지는 △근대역사박물관 일대 △진포해양공원 일대 △3.1운동 기념관 일대 △옛 시청광장 등이다. 이들 지역은 많은 시민과 관광객이 찾고 있는데다, 군산 평화의소녀상을 관리 및 보호하기에도 유리하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2021년 6월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문화재를 찾아서 다니던 내가 본 이 땅의 일본 건물인 절 이라고는 하나, 왜 이절만 존재하는 지,  일제 시대의 군산이 일본인에게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절 만이 존재하지는 않았을터인데  이유는 많은 사찰이 지금은 다른 곳으로 활용되어 이곳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우리가 지워버리고 싶은 일제 시대의 유물도 우리는 나름 문화재로 보존하여야 하나 하는 의문을 가져 본다. 다음 세대에 교훈이 되기 위해 보존을 택하는 것 일까? 그안에 자리한 소조불이 보물이라 우리에게 필요한것인지. 뭔가 아쉬움과 회환으로 사찰을 나선다. 

 

입구에 서있는 안내판에서 머물다 이내 돌아선다. 당시의 일본 거리를 돌아볼 생각이 아직은 들지 않는다.

다음은 군산의 자랑인 보물 2점이 있는 발산리로 향하려 한다.

 

如一 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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