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이백서른 일곱번째 - 대구 박물관

세종해피뉴스 2026. 6. 9. 00:38

박물관이라면 있어야 할 초상화를 접한다.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더라도 영의정을 지낸 고위 관료의 복식(쌍학흉배, 삽금대)과 당대의 세밀한 초상화 화법(잔 붓질을 통한 음영 표현)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대구 지역의 인물의 초상화라 한다.

 

[서매수 초상화]

 

서매수 이 분은 본관이 대구이며, 자는 덕이, 호는 당헌으로, 1787년 당진현감 재직 중 56세의 나이로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며, 순조때 초기에 시파(時派)와 벽파(僻派)가 대립하는 가운데 이조판서로서 시파에 치우친 인사로 벽파로부터 크게 반발을 받았으며, 1804년(순조 4) 우의정에 올라 영의정에까지 이르렀으나, 1806년 삼사로부터 논핵을 받아 문외출송( 4대문 밖으로 추방함)당하고, 1813년 판중추부사로 다시 서용된 뒤 곧 일생을 마친 인물이라 한다. 이곳에서 여러 도자기와 불교 용품을 접한다.

 

 [구름봉황무늬 항아리, 용무늬 항아리]

 

봉황과 용이 생동하고 있는 항아리가 전시되어 있다.

 

 [정병]

 

동제 정병과 청자 음각 포유문 정병, 청자 철화 유문 정병이 이웃하고 있다.  눈을 끄는 조형물로 다가선다. 

 

 [보물 제 1410호 보물금동 당간 용두]

 

경북 풍기에서 발견된 보당에 번을 매달 때 줄을 거는 역할과 당간 꼭대기에 올려 장식하였던 장치로,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여의주 뒤로 줄을 거는 도르래가 장착된다고 한다. 용은 눈을 큰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얼굴 주위와 목 뒤에는 갈기가 있으며, 목에는 비늘이 선각되고, 전체적으로 화려하게 도금되어 있다. 사찰에 쓰여진 보당의 형식과 그 위에 올려진 용두장식이 실제로 밝혀진 중요한 자료로, 통일신라 전성기의 금속공예 기술이 잘 발휘된 걸작이라한다. 

 

 [보물 제 325호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장엄구] 

 

칠곡의 송림사는 진흥왕 5년(544) 명관이 중국에서 가져온 사리를 모시기 위해 세운 절이라 한다. 벽돌로 만든 오층전탑(보물)이 있어, 1959년 탑을 수리 해체하면서, 1층 탑신에서는 나무와 돌 그리고 동으로 만든 불상이 각각 2구씩 나왔고,  2층에서는 얇은 금판을 오려 만든 금동제 사리외함과 녹색 유리로 만든 목이 긴 사리병, 옥과 진주가 붙어있는 유리잔들이 채색된 거북 모양의 석함 (현재 송림사에 보관)속에서 나오고, 3층에서는 나무 뚜껑이 덮혀있는 돌 상자 안에서 부식된 종이들이 발견되었으며, 5층 위에 있는 머리 장식부인 복발(엎어놓은 대접모양의 장식) 안에서는 상감청자로 만든 원형 합과 금동으로 만든 원륜 2개가 발견되었다 한다.  이 중 상감청자 원형합은 국화 꽃무늬와 덩굴무늬로 장식한, 고려 12세기후반 상감청자의 전성기 때 작품으로 보며, 이 밖에도 구슬 281개, 은 고리(은환) 15개, 향목 7개와 보리수 열매로 보이는 열매가 1개가 발견되는데, 이렇듯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의 유물들이 하나의 탑 안에서 발견된 점으로, 보수가 여러 차례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의성 관덕리 삼층석탑을 배경으로 탑을 지키는 석사자상이 전시되어 있으며, 화면을 통해 석사장이 탑의 어디에 놓여 있는지 알려주고 있다.

 

[보물 제 202호 의성 관덕동 석사자)

 

의성 관덕리 삼층석탑(보물)의 기단 윗면에 배치되어 있던 네 마리의 사자상 가운데 남아있는 사자상 2구이며, 한 쌍은 1940년에 분실되었고, 나머지 한 쌍은 국립경주박물관 소장품이라 한다. 2구 모두 조각수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닳아 있는데, 암사자는 앞발을 곧게 세우고 뒷발은 구부린 자세에, 얼굴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으며 굵은 목에는 구슬목걸이가 남아 있고, 배 밑에 세 마리의 새끼 사자가 있고 그 중 한 마리는 어미젖을 빨고 있는 희귀한 모습이다. 수사자는 암사자와 같은 자세에, 고개는 약간 왼쪽으로 향하고 있어, 암수가 서로 마주보는 배치였던 것으로 추측한다. 조성연대는 의성 관덕리 삼층석탑과 같은 시기인 9세기 초반으로 보고 있다. 불국사 다보탑의 돌사자 장식을 연상시켜, 하나만이 남아 가운데 전시된 불국사나 이곳의 석사자 들의 행방이 밝혀져 온전한 탑으로 복원되었으면 한다. 

 

[보물제 99호 김천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출토 사리장엄구]

 

왼쪽의 2개는 동삼층석탑, 오른쪽 2개는 서삼삼층 석탑의 사리장엄구로, 1916년에 갈항사 터의 동·서 삼층석탑을 경복궁으로 이건하던 중 발견되었다 한다. 갈항사는 통일신라 초 승전법사가 창건했다 전해지며, 동탑의 상층기단 면석에 경덕왕 17년(758) 언적법사와 그의 두 누이가 발원하여 건립하였다 적혀 있어, 사리장엄구도 이 때 봉안된 것으로 생각한다. 사리장엄구는 동탑과 서탑 모두 동제항아리 안에 금동병이 넣어진 상태로 기단 아래 사리공에 안치되어 있었다 한다. 그 중 서탑에서 발견된 동제사리호는 뚜껑의 꼭지와 몸통의 두 귀를 청동 끈으로 연결하여 묶은 사리호로 9세기 이후 뼈항아리로 많이 사용된 연결고리 유개호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한다. 두 탑의 사리병은 나팔형으로  8세기때 동아시아에서 유행했던 병의 형태이며,  이 사리기는 통일신라 감은사 식의 전각형 사리기와 달리 호형의 외함 안에 정병과 유사한 금속제 병을 사리병으로 봉안한 독특한 형식의 사리기라고 한다. 최근 보존처리 중 작은 크기의 금속제 병에서 준제진언(准提眞言) 다라니 1매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보물 제 51호 문경 내화리 삼층석탑 사리장엄]

 

국립경주박물관 소장품이나 현 이곳 전시 중으로,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의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시기의 사리갖춤 3점으로, 유물의 제작 연대는 8~9세기(서기 700~800년대)라 한다. 원래는 이것보다 더 큰 사리장엄구가 석탑 1층 몸돌의 네모난 사리공(한 변 길이 22㎝) 안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모두 약탈되었고, 현재는 이 3점 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사리함이 8cm, 그 안에 들어있던 황금 보살상과 은사리병은 3cm 정도이다. 받침에서 지붕의 상륜까지 8각형을 한 탑형 사리기 형식으로, 금형 사리기의 지붕 뚜껑을 들면 속에 통통한 은사리 병이 놓여있고 그 병 안에 사리알을 직접 담는 형태이며, 공양된 순금 보살은 작은 불상임에도 연꽃 자리와 광배를 모두 갖춘 한 몸으로 신라시대 금세공기술을 느끼게 한다.

 

 [ 대구 동화사 금당 동서 삼층석탑의  소탑]

 

이 소탑들은 1957년에  보물 제 248호 동화사 금당 서탑을 해체 수리시, 탑 속에서 납석재질의 소탑  99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작은 탑을 무수히 만들어 안치하면 큰 공덕을 쌓을 수 있다는 밀교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며, 이소탑은 대구박물관에  보관 및 전시하고 있다.

 

이곳 대구 박물관의 자랑은 구미 선산에서 출토 된, 국보 제 182호 구미 선산 금동불보살상과 국보 제183호, 국보 제184호 금동관음보살입상이다. 3점의 국보 금동불보살상은 지난 1976년 경북 선산군 고아면(현재 구미시 고아읍)에서 공사 작업 중 함께 출토되었으며, 이 지역에서 삼국시대의 기와조각과 토기조각들이 많이 출토되어서 원래 절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나란히 전시된  3개의 국보 보살상

 

[국보 제 182 호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불상들은 발견되기 70여 년전에 어느 농부에 의하여 부근 대밭골이라는 곳에서 발견되었다가, 몇년 뒤 현재의 장소에 다시 묻었던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왼손과 왼발 일부가 없어지고, 얼굴과 가슴에 약간의 녹이 있으나 도금 상태는 좋은 편이다. 머리는 소라 모양에,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자리하고, 양감 있는 얼굴에 예리한 선으로 눈·코·입을 표현되어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몸에 달라 붙어서 신체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고, 옷자락은 배부분은 평편한 U자형의 주름, 다리 부분은 좌우대칭을 이루면서 발목까지 드리워진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이 앞을 향하도록 하고 있으며 왼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게 하여 역시 손바닥을 보이고 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우전왕식의 착의 법, 뒷면에 작은 틀잡이 구멍이 있는 중공식 주조법 등에서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반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국보 제 183호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1976-1)]

 

보살상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대좌 위에 오른쪽 무릎을 약간 구부린 자세로, 머리에는 꽃장식 관을 썼는데, 관의 정면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눈·코·입의 표현이 분명한 얼굴은 둥근 편으로 전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신체는  날씬한 편으로 옷은 몸에 얇게 밀착되어 있으며, 옷자락은 오른팔에 한 번 걸쳐 무릎 앞에서 둥글게 드리고, 다시 왼팔 위로 걸쳐 그 끝이 대좌 위로 내려뜨려져 있다. 목에는 목걸이를 하고, 어깨의 구슬 장식은 길게 늘어져 X자를 만들고 있다. 불상의 뒷면에도 옷주름과 X자형의 구슬 장식이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오른손은 연꽃 봉오리를 들고 있으며, 왼손은 내려서 물건을 잡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물건은 없어진 상태라고 한다. 대좌는 7각형이며, 아래로 향한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현재 꽃장식 관의 왼쪽 윗부분과 양 손 아래로 내려뜨린 옷자락 및 왼손 손가락 일부가 파손된 상태이며, 광배 또한 없어졌다고 하며. 얼굴과 오른손에 녹이 슬어있으나 도금 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이 보살상은 삼국시대 후기 금동보살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며 7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국보 제 184호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1976-2)]

 
정면을 향해 선 보살상은 머리에 꽃으로 장식된 관을 쓰고 있으며, 관의 가운데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약간 길고 각진 듯한 얼굴에, 어깨는 넓은 편이고, 길고 굵은 목에 구슬 장식의 목걸이가 걸려 있고, 어깨로부터 늘어진 목걸이는 배부분에서 X자를 그리며 교차한다. 또 목걸이 장식의 연결부분마다 또다른 구슬을 걸쳐 나타냈는데, 신라시대 보살상으로는 드물게 많은 장신구를 지니고 있어 주목된다고 한다. 오른손은 내려서 구슬장식을 가볍게 잡고, 왼손은 윗부분이 떨어져 나갔으나 정병과 연꽃가지를 들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광배와 대좌는 없어진 상태인데, 머리 뒤에는 광배 꼭지가 남아 있으며 발 아래에는 대좌에 꽂기 위한 기둥모양의 촉이 높게 달려 있다고 한다. 중국적인 요소가 강한  장신구의 표현이 매우 특이한 이 보살상은 7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함께 전시 된 불상들도 둘러본다.

 

 

 

전시장 한곳에는 여러장의 편지가 벽면에 진열되어 있다.

 

 [ 현풍곽씨 편지]

 

1989년 현풍곽씨 후손들이 12대 조모인 진주 하씨의 무덤을 이장하던 중 하씨의 관 속에서 의복류 81점과 함께 한글 편지 172점이 무더기로 발견하였는데, 곽주가 부인 하씨에게 보낸 편지가 105점으로 가장 많았고, 시집간 딸이 하씨에게 쓴 편지 42점, 하씨가 곽주에게 쓴 편지 6점, 친정어머니가 보내온 편지 등으로, 후손들이 이 유물들을 2006년 국립대구박물관에 기증하여, 특별전 '400년 전 편지로 보는 일상-곽주 부부와 가족 이야기'로 전시되고 있다.  편지의 내용들은, 곽주가 과거 시험을 보러 서울로 가던 중 보낸 편지들에는 아이들과 아내를 걱정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담긴 내용, "아기들 데리고 어찌 계신가. 기별을 몰라 걱정하네." "정녜, 정녈이(두 딸) 절대로 밖에 나가 사내아이들하고 한데서 못 놀게 하소. 외딴 집에 낮이라도 절대로 혼자 계시지 말고 조심조심하여 계시오."과, 부인 하씨가 겪었던 시댁과의 갈등, 어머니로서 느끼는 삶의 애환도 고스란히 느껴지는 내용으로, 곽주가 결혼 초기에 쓴 "자네 팔자가 남의 불평을 들으라고 타고났으니 삼년은 눈을 감고 귀를 재우고 견디소"라고 써있다고 한다. 하지만 하씨가 전처 아들과 계속 갈등을 빚자 "자네에게 많이 서럽게 아니하거든 삼년은 견디고…"라며 달래다가 급기야 아내 뜻을 받아들여 별거를 결정하기에 이르나, 하지만 둘은 떨어져 살면서도 편지로 왕래하며 많은 사연을 주고받았으며, 출산을 앞둔 아내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산기가 시작하거든 즉시 사람을 보내소. 밤중에 와도 즉시 갈 것이니"라고 걱정하는가 하면, 딸아이를 할머니 댁에 데려갈 때 연초록 물든 저고리, 보라색으로 물들인 무명 바지를 해 입히라고 당부하는 세심한 모습도 보인다고 한다.

긴내용을 관람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당시의 사회상에서의 인간의 갈등을 헤아려 보려해 본다. 

섬유산업이 발달했던 곳이라 우리의 복식에 관한 관심이 많아서, 별도로 복식에 관한 전시장도 별도 마련되어 있다.

 

 

 

 

 

 

 

 

의복의 변천사를 전시물을 통하여 느끼며 문화재 감을 눈여겨 본다.

 

 [오조룡보] 

 

왕의 곤룡포에 들어가는 자수보로 가슴과 등, 어깨에 달았다고 한다. 용의 발톱개수를 달리하여 왕은 오조룡, 왕세자는 사조룡, 왕세손은 삼조룡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청연군주 직금 당의 ]

 

조선 18세기 중반~19세기 전반의 의상으로, 사도세자의 맏딸이자 정조의 누이인 청연군주(淸衍郡主)의  당의라 한다. 부군 김기성과의 합장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지석을 비롯해 약 200여 점의 저고리, 치마 등 조선 시대 복식과 부장품이 출토된 것 중 하나라고 한다. 각당의 두 벌을 한꺼번에 끼워넣고 일부분만 함께 박아 연결한 4겹 당의로,  양어깨부터 소매, 앞섶은 직금으로 무늬를 넣었으며, 겉옷에는 수壽, 복福의 글자와 석류, 꽃무늬, 보배무늬가 있으며, 안감은 무늬없는 단직물로 만들었다고 한다.

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탑울 찾아본다.

 

 

[보물  제 357호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

 

원래 경상북도 칠곡군 정도사터의 5층 석탑으로, 1924년에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가, 1994년에 국립대구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기단은 2단으로, 아래층 기단은 각 면에 안상을 3구씩 조각하고, 위층 기단은 각 면 중앙에 기둥 모양을 새기고, 각 기단의 맨윗돌은 약간의 경사를 이루며, 윗돌 윗면에 1단의 괴임을 두고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들이 각각 한 돌이며, 1층 몸돌의 정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이 새겨져 있고, 2층 이상은 그 크기가 급격히 줄어 들어 있다. 지붕돌은 좁고 두꺼우며, 네 귀퉁이가 위로 들린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나타내고, 지붕돌 받침은 4단에, 추녀에 낙수홈이 새겨져있다. 5층 지붕돌은 없어지고 몸돌 위에 머리장식받침인 노반만 남아있다. 위층 기단에 탑 이름이 새겨져 있고, 끝에 ‘태평십일년’ 의 연호 (고려 현종 22년(1031))및 연대가 있다고 한다. 또 옮길 당시에 탑내에서 녹유사리병·동합 2개 등의 사리장치가 발견되며, 함께 발견된 기록문서에는 탑의 인연·시납, 공사의 사실 등을 기재하고, 글 문투에 이두식이 많이 사용되고 있어 이두 연구에도 좋은 자료라고 한다.

 

다양한 국보 보물 등 대구 지역에서 출토된 귀한 문화제와 주변의 문화를 알 수 있게 하는 많은 전시물로 흥분되고,  또한 전시된 편지와 복장을 통하여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 벅찬 하루라 생각한다. 요즈음 지역의 국립박물관의 새로운 전시물들이 많은 관람객을 유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곳에도 많은 관람객이 모이기를 기원하며 집으로 길을 잡는다.

 

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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