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 아흔 아홉번째 - 순천 2

세종해피뉴스 2025. 6. 24. 19:50

넓다란 사찰을 둘러보고 다소 지친 몸으로 돌아 나오며 성보박물관으로 들어선다. 이곳 송광사와 관련 된 소장품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기쁨에 입구를 지나 들어서니 커다란 궤가 눈에 들어온다.  이 곳에 보관되어 있는 괘불탱이 사진으로 알 수 있게 전시되어 있다.

 

 

[송광사 괘불탱]

 

‘송광사지’ 등 기록에 1677년 홍철 스님 증명으로 그린 괘불이 있었다 하나 1951년 전쟁으로 소실된 후 10년 뒤인 1961년 여름 다시 괘불을 제작하여  성보박물관이 개관되며 이곳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내부로 들어서면 종 들과 사찰에서 사용하던 각종 집기와 스님들의 용품 그리고 많은 사찰 관련 유물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특히 송광사에서 사용하던 가마가 특이하게 보인다. 전시된 유물 중 보물을 중심으로 관심을 가져본다.

 

[보물 제 176호 순천 송광사 금동요령]

 

높이 20.6㎝, 지름 6.6㎝의 청동제로 도금의 흔적이 있으며,  4각형이고 각 면이 팽창되어 둥근 형태를 하고, 긴 손잡이가 있으며 보수 흔적과  손잡이 윗부분도 손상이 있다고 한다.

몸체  각 면엔 굵은 돌출선을 돌리고, 그 테두리 안에 용 한 마리와 구름무늬를 세기는데, 각면의 무늬는 하나의 틀에서 찍어낸 듯 하다고 한다.

 

[국보 제 314호 순천 송광사 화엄경변상도]
 
보물에서 2009년 국보로 지정, 『화엄경』의 7처9회(七處九會)의 설법내용을 그린 변상도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린 그림으로,  법회장면이  대칭을 이루며 펼쳐지고 있다.  내력을 적은 기록에 의하면, 조선 영조 46년(1770)에 화련을 비롯한 12명의 승려화가들이 무등산 안심사에서 조성하여 송광사로 옮겼다고 한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화엄경변상도 중 조성시기가 가장 빠른 작품이라 한다. 
 

이곳에는 국사전에 관한 전시관에는 나라의 큰 스님 16분의 진영을 모시고 덕을 기리는 곳이 국사전이라는 설명과 모셔진 16분의 진영이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고  3분의 진영이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

 

[국사전 16 스님 진영]

 

1780년에 조성된 송광사를 중심으로 활약한 보조국사 지눌과 15인의 고승 진영으로,  쾌윤(快玧)이 수화사가 되어 제작하였다 한다.

 

[2대 진각국사, 1대 보조국사, 14대 정혜국사]

 

1995년 국사전 후면에 흙벽을 뚫고 침입한 도난으로, 16점의 진영은 1세, 2세, 14세의 3점을 남기고 모두 도난당하며 아직도 행방을 몰라 현재는 3점이 소장되어 있다.

 

[보물 제 1043호 순천 송광사 십육조사진영]

 

1990.09.20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 송광사를 중심으로 고려 후기에 활약한 16명의 고승들의 초상화로, 원래 16폭이 지정되나 현재 송광사에 3점만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보조국사의 초상화는 가로 77.4㎝, 세로 134.8㎝로 16점 모두 규모나 제작수법이 동일한 것으로 같은 화가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진영 아래 그간 접하지 못한 보물을 대한다.

 

[보물 제 175호 순천 송광사 경패]

경패는 불경을 넣은 나무상자에 경전의 이름을 적어 사용하던 것으로, 송광사의 경패는 총 43개로 상아패 10점과 목제패 33점이라 한다. 표면에 액(額)을 만들어 불경의 명칭과 번호를, 가장자리에는 덩굴무늬, 학무늬 등 문양으로 장식하고, 뒷면에는 방형의 구획 안에 보살, 나한, 신장상 등을 돋음새김 되어 있다고 한다. 상의 위쪽에는 장막,격자창을, 아래에는 연화대좌, 난간 등을 조각하고,  방형 구획 아래에는 정(貞), 주(周), 진(晉), 하(何) 등의 함호(函號)가 연꽃, 집 등의 모양 안에, 측면에는 둥근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 되며, 이 경패는 송광사 제6세 원감국사가 1278년 강화도 선원사에 있던 거란본재장경을 송광사로 이윤할때 함께 온 것이라 한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  송광사 금강저]
 
불교 의식의 도구로, 저(杵)는 인도의 고대 무기로 제석천이 아수라와 싸울 때, 코끼리를 타고 금강저를 무기로 삼아 아수라의 무기를 쳐부순다고 한 신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묵중하고 엄숙한 기분이 감돌아 온갖 잡념과 방해물을 굴복시켜, 부처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양끝이 3개의 가지가 있는 화살촉모양으로, 손잡이에는 손바닥이 닿는 부분은 볼록하고, 끝은 4잎의 연꽃무늬를 양각한 모습이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 고봉국사주자원불]

 

송광사의 16번째 국사인 고봉화상이 소지했던 원불(願佛)로 , 양편 문 내벽에 문짝이 있고, 내부벽에 불·보살 등을 양각으로 조각하고 있다. 중앙 주존불은 대일여래불로  금강권인을 하고 있으며,  왼쪽에 노사나불과 오른쪽에 석가여래가 각각 협시불로 배치되고, 아래에는 두 제자와 보살상이  앉아 있는 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불감에서 주목되고 있는 것은 문비상인데, 일반적으로 문비에는 인왕상이 배치되는 것이 통례이나 이들 문에는 오른쪽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과 왼쪽에 보관(寶冠)을 쓴 관음보살이 배치되었다고 한다.

 

큰절이나 박물관에서 느끼는 벅참이라는 감정이 이곳에서도 발동된다. 그리고 귀해서 아니면 보존을 위해 공개 되지 않은 문화재들에 관한 아쉬움도 뒤 따른다. 오늘 방문에 만나지 못한 유물들을 아쉬운 마음으로 자료로 알아 본다.

 

 

[국보 제 42호 순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

 

정확한 기록은 아니나 보조국사 지눌이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가져온 것이라 알려져 있다. 불감은  3부분이며, 가운데의 방을 중심으로 양쪽에 작은 방이 문짝처럼 달려 있다. 문을 닫으면 윗부분이 둥근 팔각기둥 모양이 되는데, 전체 높이는 13㎝이고, 문을 열었을 때 너비 17㎝가 되는 작은 크기이다. 가운데 큰 방에는 본존불이, 오른쪽 방에는 보현보살이 코끼리가 새겨진 대좌 위에 앉아 있고, 왼쪽 방에는 문수보살이 연꽃가지를 들고 서 있다. 인도의 영향을 받은 듯 이국적인 면이 보이며, 불감의 양식이나 구조에서는 중국 당나라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국보 제 43호 혜심 고신제서]

 
고려 고종 3년(1216)에 조계산 송광사 제2세 진각국사 혜심에게 대선사의 호를 내릴 것을 제가(制可)한 것으로,  능형화문의 무늬가 있는 홍, 황, 백색 등의 비단 7장을 이어서 만든 두루마리에 묵서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3.6m, 세로 33㎝이다.
 
[국보  순천 송광사 영산회상도 및 팔상도]
 
보물 제1368호에서 2024년 5월에 국보로 승격 지정된다. 송광사 영산전에 봉안하기 위한 불화로 영산회상도 1폭과 팔상도 8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산회상도 화기에 ‘후불도(後佛圖)’ 대신 ‘팔상회(八相繪)’라는 용어를 사용,영산회상도가 팔상도의 주불화로 일괄 제작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월인석보(月印釋譜)』의 변상도를 차용한 팔상도가 제작되다가, 후기에 접어들면서 『석씨원류응화사적』이 유통되면서 이로 구성된 새로운 형식의 팔상도가 유행하였는데, 이를 대표하는 작품이라 한다. 화기의 기록으로 1725년(조선 영조 1)이라는 제작 연대와 의겸(義謙) 등 제작 화승을 명확히 알 수 있다고 한다.

 

[보물 제 204호 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삼현원찬과문]
 
 
묘법연화경을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묘법연화경은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보문품은 법화경의 한 부분이다. 조선 세조 7년(1461)에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판을 새겨 찍어낸 것으로, 고려 대각국사 의천이 만든 교장(敎藏)을 원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다른 책과는 달리 내용을 도표식으로 요약하여 정리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인데, 책 끝에는 고려 숙종 4년(1099)에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세조 7년(1461)에 간행된『송광사금강반야경소개현초』(보물)와 새긴 솜씨, 종이질 등이 같아 세조 때 다시 펴낸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보물 제 205호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 권13~14]
 
 
1963.01.21불경은 크게 경(經), 율(律), 론(論)의 삼장(三藏)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중 ‘론(論)’이란 부처님의 설법을 조직적으로 설명한 것을 가리킨다. 부처님의 열반에 관해 설명한 것으로, 여기에 안혜(安慧)가 해설을 붙이고 현장(玄장)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을 아비달마잡집론이라 한다. 이 책은 아비달마잡집론에 신라의 현범(玄範)이 다시 해설을 붙인 것으로, 전체 16권 중 권13과 권14를 각기 1책으로 묶은 것이다. 책의 끝에 고려 선종 10년(1093)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 원래 교장(敎藏)의 하나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보물 제 206호  묘법연화경찬술 권1~2]

 

 

교장(敎藏)을 원본으로 다시 찍은 것 가운데 하나로,『법화경』에 대한 당나라 혜정(慧淨)의 주석서 10권 가운데 권 제1, 2를 하나의 책으로 묶은 것으로,  나무에 새겨서 닥종이에 찍었으며, 크기는 세로 36㎝, 가로 35㎝이다. 각 권의 끝에 있는 간행기록을 통해, 고려 헌종 1년(1095)에 남궁예가 글을 써서 처음 간행한 것을,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刊經都監:세조 7년(1461)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서 다시 새겨 찍은 것 가운데 일부가 전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보물 제 207호 금강반야경소개현초 권4~5]
 
 
금강반야경은 줄여서 ‘금강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조계종의 근본 경전이다. 이 책은 금강경에 대해 공철(公哲)이 쉽게 풀이한 것을 나중에 지온(志온)이 보충한 것으로 ‘개현초(開玄褻)’에 관한 7권 중 권4-6이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져 전해진 것이라 한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크기는 세로 36㎝, 가로 35㎝이다. 고려 대각국사 의천이 중국, 요, 일본 등에서 구해온 불경을 토대로 만든 교장(敎藏)을 보고 조선 세조 7년(1461)에 간경도감<刊經都監:세조 7년(1461)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서 다시 새겨 펴낸 것이라 한다.

 

[보물 제 572호 순천 송광사 고려고문서]
 
 
고려시대의 절에 관한 자료로, 수선사의 창건 연혁과 관련 된 형지기 1점, 수선사에 소속되어 있는 노비를 기록한 노비문서 1점으로 총 2점이다. 고려시대에 묵으로 쓴 글씨가 남아있는 것은 매우 희귀한 예로, 오늘날까지 원래 모습대로 보존된 것으로 고려시대 문서의 양식과 필법 등을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 한다.

 

[보물 제 1376호  순천 송광사 티베트문 법지]
 
 
티베트문 법지로, 송광사 16국사 중 제6세인 원감국사가 당시 충렬왕의 명을 받고 원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원나라 세조인 쿠빌라이로부터 받아온 것이라 전해진다.  크고 작은 6장의 조각으로, 황토색계의 밝은 황갈색이며 종이의 두께·색깔·필체 등으로 보아 본래는 1매의 문서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온전한 상태는 아니나 내용상으로 보면 ① 문서의 소지자에 대한 신분과 신분보장 ② 신분을 보장해줄 자들에 대한 명시와 협조요청 ③ 문서 발급자의 증명부분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한다.  고려시대 원나라와의 활발했던 불교교류사 파악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보물 순천 송광사 소조 사천왕상 복장유물]
 
 
순천 송광사 소조사천왕상의 전체적인 해체보수 과정에서 불복장 유물을 수습하였는데 그 결과 복장전적 12종 14책, 인본다라니 428장, 후령통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교장(敎藏)의 성격을 밝히는 새로운 자료로서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송광사 사천왕상에서 발견된 교장 중수본은 무려 10종에 달하고 있어, 현재까지 알려진 종수와 동일한 수량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보물 제 1661호 순천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전적]
 
 
목조관음보살좌상에 복장되어 있던 복장유물 중 중요 불교경전 8점으로 2009년 개금불사도중 발견되었다 한다.
 

이번 방문에 보지 못한 응진전에 눈여겨 볼 만한 보물 들을 지나침을 아쉬워 하며, 다시금 방문해야 하는 핑계거리로 삼는다. [보물 송광사 응진당 석가모니 후불탱·십육나한탱] 과 [보물 순천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소조16나한상] 그리고 천연 기념물인 [천자암 쌍향수(곱향나무)]와 산재된 유형문화유산을 위하여 다시금 이곳 순천을 찾아보려 한다. 물론 이곳에는 많은 보물을 가진 선운사가 자리함도 잊지 않고, 이러한 많은 보물을 가진 곳은 한번의 방문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스쳐 지나가는 보물 관람객에서 조금은 벗어난 자세로 유물의 가치를 알아 보려하는 탐구자로의 자세로 여행을 하다 보니 한번에 많은 것을 접하는 것은 왠지 가슴을 답답하게도 한다. 이곳 순천의 선운사도 그래서 예전 처럼 발을 선뜻 들여 놓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순천을 벗어난다.

 

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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