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의 남계서원을 찾아본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 된 9개의 서원 중에 하나인 남계서원은 이제는 진입로 부터 깔금하게 정비되어 있다. 주차장과 주변의 환경이 우리 문화를 방문객에게 보여주기 자랑스럽게 정비되어 있다. 광장같은 길을 따라 홍살문을 지나 풍영루로 향한다.
남계서원은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해 조선 명종 7년(1552)에 짓고, 명종 21년(1566)에 ‘남계’라는 사액을 받았다 한다. 정유재란(1597)으로 불타, 선조 36년(1603)에 나촌으로 옮겨 지었다가, 광해군 4년(1612)에 옛 터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정여창을 모신 서원은 전국적으로 9곳에 이르며, 주된 곳이 남계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 소수서원을 이어 두번째로 지어진 서원이며, 전학후묘의 구조로는 최초인 서원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앞에는 강학을 하는 배움의 강당을, 뒤로는 배향을 하는 사당을 모시는 전학후묘의 구조는 이 후 다른 서원의 표본이 된 듯하다.
강학을 하는 건물을 향교는 모두 명륜당이라 칭하는데, 서원은 명륜당이 아닌 각각의 당호를 가지며, 이곳은 명성당이라 하며, 강당 안에 현판이 자리한다. 명성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거경재(居敬齋), 집의재(集義齋)라 하며, 유림들의 회합 및 학문의 강론 장소 등으로 사용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일반적인 서원은 전면이 5칸인데 이곳과 도산 서원은 전면 4칸인 것이 특징으로, 넓게 트인 맛은 없으나, 학문을 논하기 아담한 자리인 듯 하다.
강당앞에 유생들의 생활 공간인 양정재와 보인재가 있다. 동재(東齋)인 양정재와 서재(西齋)인 보인재에는 각각 연못과 애련헌 · 영매헌이 있다. 축대로 지형을 활용하며, 기거하는 동재 서재와는 구분되어 마치 정자를 연이어 달아 놓은 듯한 모습과 앞에 조성한 연못을 통해, 학문과 동시에 자연을 벗하려는 선비의 기상을 느끼게 한다.
강당 옆의 오래된 건물로 보이는, 나무 판자로만 지어진 장판교는 정면 2칸에 측면 한칸으로, 서원에서 보유하는 책이나 판각등을 보관하는 곳으로, 건물을 지면에서 띠우고, 사면을 모두 터놓을 수 있어 공기의 흐름을 통해 장서와 판각을 보전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고 한다.
다른 서원들과 달리 가파른 언덕위에 사당의 문이 열려 있다. 사우에는 정여창에 숙종 때 더한, 좌우에 정온과 강익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오늘의 방문으로 이 서원이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창건되고, 사액 서원이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라는 배움을 얻는다. 지금은 교육의 기능은 없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 있으며, 『어정오경백편』·『고려사』 등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사당에서 넘어다 보이는 청계서원으로 산책하듯 발길을 옮긴다.
이 위치는 1495년에 김일손이 청계정사를 건립하여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라한다. 김일손은 성균관 기사관으로 『성종실록』을 쓴 학자이나, 「조의제문(弔義帝文)」 수록으로 1498년 무오사화에 화를 당하며, 이에 연루되어 청계정사도 폐사되었다고 한다. 청계정사 중건은 1917년에 시작되어 1921년에 준공되고, 이름을 청계서원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웃한 남계서원과의 배치가 유사한 청계서원엔 커다란 소나무가 있다.
조선 연산군 때 학자인 문민공 김일손(1464∼1498)을 기리기 위한 서원으로 강당에는 애련당이라는 당호가 현판으로 자리한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기와집 형태의 강당이다.
강당 앞으로는 학생들이 거처하던 동재인 구경재와 서재인 역가재가 있다. 경내에는 탁영김선생유허비와 연당이 있다.
이곳도 출입문이 개방되어 있어 마치 방문을 대접받는 느낌을 갖게한다. 연산군 때의 학자 탁영 김일손[1464~1498]을 기리기 위하여 1921년에 건립되고,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향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개평한옥마을은 14세기에 경주김씨와 하동정씨가 먼저 터를 잡아 살았고, 15세기에 풍천노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하며, 마을 대부분은 풍천노씨와 하동정씨가 살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530년 전통의 가양주인 지리산 솔송주가 있으며 이를 맛볼 수 있는 곳이 일두고택 앞집으로, 하동정씨 문중에 대대로 내려온 솔잎으로 담그는 솔잎 술로 1997년 후손들에 의해 복원, 개발되어 판매되고 있다고 한다.

마을 길을 걷다가 발견한 안내 판을 따라 드려다 본 오담고택은 종도리에 기록 된 상량문에 의해 사랑채가 1838년, 안채는 1840년 건립된 것이라 한다. 안채, 사랑채에 모두 전 ·후 툇간을 적용한 점 등 조선 후기 주거 건축의 양식과 가구기법을 볼 수 있는 건물로, 종가에서 분가한 양반계층의 주거형태라는 점으로 문화재 가치를 갖는다고 한다.
오담고택에서 하동정씨 고가로 짐작되어 넘어다 본 정씨고가는 잘 정돈 된 마당에 사람이 기거 하는 듯 하여 실례를 무릅쓰고 담넘어 관람한다. 안채, 사랑채,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넓게 보이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1644년에 건축된 것이라 한다.

마을 중심부분로 골묵길을 따라 찾아 들면 일두 고택 삼문을 볼 수 있다. 이곳은 정여창의 옛집으로, 지금 건물들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것이라한다. 솟을대문 위에는 정려를 게시한 문패가 4개나 걸려 있고, 지정 당시 명칭은 함양정병호가옥이었으나, 일두 정여창(1450-1504)의 생가지에 타계 1세기 후에 후손들이 중건한 가옥인 점을 반영하여, 호 따라 ‘함양 일두 고택’으로 지정명칭을 변경하였다 한다. 일두 정여창은 연산군때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고, 1504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까지 당하지만, 1517년(중종 12)에 복권되어 우의정에 추증되는, 고난을 겪은 인물로 성리학사에서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5현으로 칭송되는 인물이라 한다.

오른쪽이 돌출된 ㄱ자형의 건물로, 한편에 마루를 가진, 높은 대위의 건물에서 잘 지어진 건물의 멋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안채에서 오른쪽 문을 나서면 나오는 건물이 안사랑채라 한다. 이곳은 흙 담벽으로 사랑채와 구분되고, 그 앞 동산의 소나무와 사랑채가 넘어다 보이는 독특한 건물 배치이다. 안사랑채 툇마루에 앉으니, 문득 오늘 여행 중에 알게 된 선인들을 생각해 본다. 후손들에 의해 존경받는 당대의 학자들이 시대상과 권력자를 둘러 싼 권력 투쟁 속에서, 사화로 인한 피해를 당한 내용은 마음을 답답하게 한다. 이를 통해 옛날에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런 일들이 무수이 많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앞으로는 남의 인생에 걸림되는 일 줄이고, 가진 것 줄여 지킬 것 줄이고, 먹을 것 줄여 체중도 줄이고, 욕심을 줄여 걱정도 줄이고, 말을 줄여 실수도 줄이고, 보는것 듣는 것 줄여 근심 걱정 줄이는 생활을 하며, 문화재를 둘러보는 작은 행복을 지키며 지내는 것이 행복이라는 생각으로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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