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마흔 여섯번째 - 강화

세종해피뉴스 2021. 11. 4. 23:39

강화에 갈 기회를 얻었다. 강서구에서 일을 마친 후, 강화로 가도 될까 하는 걱정을 하며 길을 접어든다. 몇주 전 행주대교 까지 와서 강화로 들어가는 길이 너무 막혀 길을 포기하고 연천으로 향했던 일이 기억난다. 오늘은 전등사의 그 유명한 은행나무의 노랗게 물든 모습과, 보물을 다시 한번 찾아보고, 그간 변한 모습은 어떠한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번에는 전에 찾아 보지 못한 정수사 도 방문 하려 한다. 강화로 건너가는 초지대교는 오후 2시경인데도 입구에서부터 차가 몰려 서서이 움직이고 있었다. 걱정 속에 삼랑성과 종해루가 있는 남문 입구에 도달한다. 이곳은 많은 관람객이 적지 않게 함께 하고 주차장은 추경을 즐기러 온 인파로 차가 만차이다. 절 입구로 가을 단풍을 즐기며 입장 한다. 전등사 남문로는 성벽이 단풍과 어울리어 한폭의 수채화를 만들고 있다. 단물이 물드는길을 거닐면 은행나무를 볼 수 있다.

 

[전등사 은행나무]

전등사의 은행나무와 그에 얽힌 전설은 암나무가 수나무로 바뀐 신비로운 일이다. 억불 숭유 정책이 한참이던 조선 후기에 불교 탄압의 구실로 많은 양의 은행을 공출해 갔다. 전등사의 은행나무 만으로는 공출량을 채울 수 없어, 결국 산 아랫마을까지 돌아다니며 은행을 주워 모아야 했다. 이에 백련사에 주석하던 추송대선사를 초청해 나무에 은행이 안 열리도록 수나무가 되게 해 달라는 축원의 삼일기도를 통해 은행이 열리지 않는 수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스님의 기록에는 700년이라고 한다. 20m 넘는 높이, 5m가 넘는 고목이다. 고찰이 풍기는 은은함과 함께 신비로운 전설 구절에 가을 단풍을 든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다.

 

[입구 사진]

은행나무를 지나 전등사로 들어선다. 주변의 단풍이 곱게 물들어 길을 재촉 하기가 힘들다.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하지만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조선 선조 38년(1605)과 광해군 6년(1614)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그 이듬해 다시 짓기 시작하여 광해군 13년(1621)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대웅전 보물]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광해군 13년(1621)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모서리 사진]

네 모서리기둥 윗부분에는 사람 모습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것은 공사를 맡았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모의 모습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오는데, 재물을 잃은 목수가 주모의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발가벗은 모습을 조각하여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3곳의 처마 밑에서는 두손으로 처마를 받치며 벌을 받고 있는 모양새인데 비해, 한 귀퉁이의 것은 한 손으로만 처마를 받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벌을 받으면서도 꾀를 부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우리 선조들의 재치와 익살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의 능숙한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고,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전등사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 보물]

대웅전에 모셔진 강화 전등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17세기 전반에 전북, 충남 등지에서 활동하던 수연(守衍)이 수화승으로 참여하여 1623년에 조성한 불상으로 수연이 수화승(首畵0僧)으로 조성한 작품들 가운데 지금까지 알려진 두 번째 불상이다. 삼불의 구성은 석가불을 본존으로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좌우에 협시하는 형식으로서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삼세불의 도상을 보이고 있다. 불상들의 세부를 보면, 본존 석가불상은 단엄한 자세에 자비한 상호(相好)를 보이며, 좌우의 아미타불상과 약사 불상은 이목구비의 표현이나 비례 면에서 본존상 보다는 다소 조형감이 떨어지는 편이다. 본존상은 상호(相好)의 표현이 근엄하고 전체적인 신체비례 면에서도 안정감이 느껴져 시기적으로 앞서는 같은 수연 작의 서천 봉서사 목조 아미타여래삼존좌상(1619년)에 비해 조각적으로 세련된 감각을 보여준다.

 

삼세불상의 얼굴은 각각 독특한 상호를 보이고 옷주름 표현기법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아마도 전등사 삼세불상 조성에 참여한 조각승들 가운데 수화승 수연과 함께 서천 봉서사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1619년, 보물 제1751호) 조성에 참여했던 성옥(性玉)의 조각적 개성이 표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세 번째 화원으로 참여한 영철(靈哲)은 이후 옥구 보천사 목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1634년, 익산 숭림사 봉안)과 남원 풍국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1639년, 예산 수덕사 봉안)의 조성에 수연을 따라 참여했으며 성옥에 비해 연배가 아래인 조각승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등사 대웅보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조성원문을 통하여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조각적으로 우수하며, 조각승들과 나타난 발원시주자들의 명단이 잘 전하여 불상(佛像), 면금(面金), 체목금, 체목, 오금(烏金), 좌대(座臺), 보단(甫團), 채안(彩安), 복장(腹藏) 등 세부적인 시주 항목이 기록된 점 등에서 조선시대 불교조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약사전, 보물]

대웅보전 서쪽에 있는 아담한 약사전은 중생의 병을 고쳐준다는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 『대웅전약사전개와중수기(大雄殿藥師殿改瓦重修記)』에 조선 고종 13년(1876) 대웅보전과 함께 기와를 바꾸었다는 기록이 보일 뿐 언제 지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고 건축 수법이 대웅보전과 비슷하여 조선 중기 건물로 짐작하고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이며 주위에는 화려한 연꽃무늬와 덩굴무늬를 그려 놓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수법이 특이하여 당시의 건축 수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전등사 철종,보물]

전각을 지어 따로이 보관되어 오는 철종은 일제 시대 말기 금속류의 강제수탈 과정에서 중국에서 건너온 철종으로서 광복 후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하여 전등사로 옮겨 현재까지 보존하고 있다. 형태와 조각수법에서 중국 종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춘 높이 1.64m, 입지름 1m의 종으로 한국의 종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종 꼭대기에는 두마리의 용이 서로 등지고 웅크려서 종의 고리를 이루고 있고, 소리의 울림을 돕는 음통은 없이 천판(天板) 중앙에 구멍을 뚫었다. 몸통 위 부분에는 8괘를 돌려가며 배치하고, 종의 몸체 중간을 가로지른 3줄의 띠로 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8개의 정사각형 곽을 돌렸다. 이 정사각형 곽에는 명문을 새겼는데, 명문을 통해 이 종이 중국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라는 것과 북송 철종 4년, 곧 고려 숙종 2년(1097)에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철로 만든 종이지만 종소리가 청아하며 중국 북송 시대에 만들어진 명문을 지니고 있어 중국 종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문화재이다.

 

[전등사 목조 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보물1786호 2012년 지정)

강화 전등사 명부전에는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은 조성원문을 통하여 숭정(崇禎) 9년(1636)이라는 뚜렷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이 조각승 수연(守衍)에 의해 조성된 지 13년이 지난 뒤에 역시 수연이 수화승이 되어 제작한 상들이다. 지장보살상과 그 좌우에 무독귀왕, 도명존자, 시왕(十王)와 귀왕, 판관, 사자상, 동자상, 인왕상 등 명부전의 권속이 많다 보니 조각승도 12명이나 참여하여 수연의 지휘 아래 제작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상들의 조성을 위한 시주에 수많은 신도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아 당시 전등사 일대의 대대적인 불사(佛事)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장보살상은 방형의 얼굴에 엄중하면서도 자비로운 상호(相好)를 보이며 양 어깨에 걸쳐진 대의 옷자락은 유연한 주름을 이루며 하체로 연결된다. 양손으로는 지물을 들지 않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설법인을 결하고 있는데, 전체적인 비례와 조형감이 우수하다. 지장보살상과 매우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 도명존자상은 얼굴표현에서 사실성이 돋보이며, 장삼위에 가사를 입은 착의형식이 단정하다. 수연 조각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지장보살상과 도명존자 외에도 시왕상과 기타 권속의 여러 상에서 보이는 인간적이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는 수연 조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조각기법상의 우수성, 조각가와 조성연대에 대한 분명한 기록, 원래부터 전등사 명부전 봉안을 위해 조성된 상이라는 여러 점에서 볼 때 그 가치가 큰 상들이다.

근래 보기 드문 적지않은 관람객으로 서둘러 보물 여행을 마치고 길을 나서서 화도면 사기리 정수사로 향한다. 이곳의 주차장 에서는 첨성단으로 오르는 입구가 있다. 정수사는 신라 선덕여왕 8년(639) 회정선사가 세웠고 조선시대 세종 8년(1426)에 함허대사가 다시 지었는데, 건물 서쪽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이름을 정수사라 고쳤다고 한다.

 

[정수사 법당, 보물]

이 법당은 석가모니불상을 모신 대웅보전으로, 1957년 보수공사 때 숙종 15년(1689)에 수리하면서 적은 기록을 찾아냈다. 기록에 따르면 세종 5년(1423)에 새로 고쳐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4칸이지만 원래는 툇마루가 없이 앞면과 옆면이 3칸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고, 지붕 무게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앞뒷면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앞면 퇴칸이 후대에 다시 설치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앞쪽 창호의 가운데 문은 꽃병에 꽃을 꽂은 듯 화려한 조각을 새겨 뛰어난 솜씨를 엿보게 한다.

 

[함허대사 부도]

사찰의 뒷산에 있는 함허대사 부도를 찾아본다. 조선 초 고승 함허 기화(涵虛 己和, 1376~1433) 스님의 사리탑입니다. 정수사 요사 뒤 언덕에 있습니다. 모습이 우리가 여느 보물로 지정된 사리탑들에 비해 화려한 장식이 없이 다소 평범하면서도, 탑의 외형을 갖춘 것이 특징인 것은 고립된 강화도에서 사찰을 일으키고 그 당시 고승인 것이 이유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부도의 구성은 기단 위에 탑신이 놓이고 그 위에 옥개석을 얹어 정상에 상륜을 장식하고 그 기본형은 팔각 원당형을 따르면서 사각의 단순한 변형을 가미 하였다.

기단부는 상, 하대로 형성 되었으며 각 면에는 아무런 조식도 없다. 부재는 화강암이며 전체 높이는 164cm이다. 주변의 관리가 잘 되어 있다. 계속 잘 보전 되어 보물로도 승격되길 기원해 본다.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돌아가는 길은 어둠이 깔린 익숙하지 않은 길이다. 고즈녁한 사찰의 보물과 멋진 단풍을 보았다는 기쁨으로 이겨내며 집으로 돌아간다.

 

如一 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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