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서른두번째 - 임실, 남원

세종해피뉴스 2021. 7. 30. 18:35

날이 많이 덥다. 오늘은 금요일에 길을 나선다. 이번의 여행 일정은 남원의 광한루로 정한다. 평일이고  코로나로 인하여 방문자가 적을 것 같아 정해 본 장소이다. 금요일의 오후는 관람객보다 조용함을 즐기는 소수의 인원만이 산책을 즐기고 있는 복잡하지 않은 환경일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더운 날씨의 국도를 차장 밖의 짙은 녹음의 여름 풍경을 즐기며 차를 달린다. 여러 경로 가 있으나 중간에 임실 지나는 경로로 가다 보니, 이곳 임실의 유일한 보물인  진구 사지 석등이 생각난다.  

코로나로 인하여 식당의 출입도 만만치 않아 임실역 앞 에서 피자 치즈를 한판 구입하여, 점심으로 하기로 하고 줄인 시간에 진구사 지를 찾아보기로 한다. 용암리의 진구사지 주변은 이전보다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진구사지

진구사지는 임실군 용암리 북창마을에 있으며, 이전에는 마을 이름을 붙여 사찰의 이름을 부르다가 1992 년에서 2001 년까지의 학술 발굴 결과 진구사 (珍丘寺 )라는 명문 기와가 발견되어 진구사지로 명칭이 변경된다. 진구사는『삼국유사』에 전하는 고구려  보장 (寶藏 ) 스님의  제자인  적멸 (寂滅 )과  의융 (義融 )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절터에는 석등 이외에 석조여래좌상, 탑지, 건물지, 석축 등이 남아 있는데, 석조여래좌상은 양식적으로 석등과 비슷한 9 세기 중후반 제작으로 추정된다.

 

진구사지 석등

이 석등의 지금 위치는 원위치가 아닌 옮겨 세워진 것으로  밝혀졌으며, 발굴조사 시 이 석등의 기단부를 조사한 결과 현위치가 원래 위치가 아님이 밝혀져, 북편의 중심사역에서 옮겨온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 (火舍石 )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높은 받침을 두고 그 위로는 지붕 돌과 상륜부를 올렸다. 
아래 받침돌 옆면에는 안상 (眼象 )을 크게 새기고, 위에는 커다란 연화문과 구름문을 장식하여 신성한 느낌을 주고 있다. 가운데 기둥은 장고 모양으로 기교 있게 마련하였다. 윗 받침돌은 연꽃을 화려하게 표현하여 장엄함이 연출되도록 했고, 그 위에 있는 화사석 (火舍石 )은 각 면에 창을 내어 부처의 진리를 상징하는 불빛이 멀리 퍼져 나가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큼직한 꽃을 장식하여 멋스러움과 돌을 다루는 석공의 뛰어난 솜씨를 엿보게 한다. 상륜부는 일부만 남아있는데, 팔각형의 큼직한 노반석과 그 위에 다른 부재를 받쳤던 별도의 부재가 놓여 있다.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구례 화엄사 석등이나 남원 실상사 석등처럼 우리나라에서 손꼽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웅장하면서도 비례가 잘 어울려 안정된 모습이다. 당시 진구사의 위상을 엿보게 하는 걸작이다.

 

 

좌대 중 하나는 아래, 가운데, 윗받침이 모두 8각을 이룬다. 아래 받침의 각 면에는 무뉘를 두었는데 자세한 모습을 알 수 없을 만큼 희미하다. 가운데 받침에는 안상(眼象)을 얕게 새긴 후 그 안에 합장한 좌상을 조각하였다.

 

다른 하나도 전체적으로 8각의 형태이나 각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8각의 다운데 받침은 4면에만 사각형으로 창의 형태를 움푹하게 표현하였고 반원형의 윗 받침에는 솟은 연꽃무뉘를 새겼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인 남원의 광한루원으로 향한다. 너른 주차장에 차가 몇 대 보이지 않는다, 원 내로 들어서니 오후의 따가운 햇살이 내려 쏘여 경치는 음영이 더욱 짙게 나타나 마음을 들썩이게 한다.

 

광한루원

이곳은 신선의 세계관과 천상의 우주관을 표현한 우리나라 제일의 누원이다. 원래 이곳은 조선 세종 원년(1419)에 황희가 광통루라는 누각응 짓고 산수를 즐기던 곳이었다.

1444년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광통루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을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국속의 광한청허부라 칭한 후 광한루라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1461년 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보수하고, 요천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하늘나라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었다.

 

오작교

호수에는 지상의 낙원을 상징하는 연꽃을 심고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에 가로막혀 만나지 못하다가 칠월칠석날 단 한번 만난다는 사랑의 다리 ‘오작교’를 연못 위에 설치하였다. 이 돌다리는 4개의 무지개 모양의 구멍이 있어 양쪽의 물이 통하게 되어 있으며 한국 정원의 가장 대표적인 다리이다.

 

영주각

1582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은 광한루를 크게 고쳐 짓고 은하수 연못 가운데에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삼신산을 상징하는 봉래, 방장, 영주섬을 만들어 봉래섬에는 백일홍, 방장섬에는 대나무를 심고, 영주섬에는 ‘영주각’이란 정자를 세웠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왜구들의 방화로 모두 불타버렸다. 

 

완월정
방장정

현재의 광한루는 1639년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하였다. 1794년에는 영주각이 복원되고 1964년에 방장섬에 방장정이 세워졌다. 이 광한루원은 소설 「춘향전」에서 이도령과 춘향이 인연을 맺은 장소로도 유명하여 1920년대에 경내에 춘향사를 건립하고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의 영정을 모셔 놓았다.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오절에는 춘향제가 열린다.

 

영주각

문을 들어서며 먼저 마주한 녹음이 짙은 소나무, 그리고 뒤에 보이는 배롱나무와 조화를 이루는 정자는 영주각 이다. 이곳의 모든 것이 나의 눈을 현혹하고 있다. 이곳에 고유 의상을 입고 주변을 배회하는 젊은이들이 운치를 더하게 한다.

 

광한루

방장정을 가는 길에서는 연못 너머로 보이는 광한루를 보게 된다. 광한루의 모습을 담기 위해 가까이 가본다.

 

광한루 측면

광한루는 건물이 보는 위치에 따라 정말 다양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樓)란 사방을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자연과 어우러져 쉴 수 있도록 경치 좋은 곳에 지은 건물을 말한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이름난 황희정승이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처음엔 광통루(廣通樓)라 불렀다고 한다. 광한루(廣寒樓)라는 이름은 세종 16년(1434) 정인지가 고쳐 세운 뒤 바꾼 이름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인조 16년(1638) 다시 지은 것으로 부속건물은 정조 때 세운 것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누마루 주변에는 난간을 둘렀고 기둥 사이에는 4면 모두 문을 달아 놓았는데, 여름에는 사방이 트이게끔 안쪽으로 걸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또한 누의 동쪽에 있는 앞면 2칸·옆면 1칸의 부속건물은 주위로 툇마루와 난간을 둘렀고 안쪽은 온돌방으로 만들어 놓았다. 뒷면 가운데 칸에 있는 계단은 조선 후기에 만든 것이다.

 

광한루와 오작교

춘향전의 무대로도 널리 알려진 곳으로 넓은 인공 정원이 주변 경치를 한층 돋우고 있어 한국 누정의 대표가 되는 문화재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광한루의 오작교와 광한루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자리를 찾아 광한루 주변의 연못을 삥 둘러본다.

연못 안에 자리한 잉어는 무척이나 큰데 30여 년 전 와본 곳이 전경 중 그때도 커다란 잉어를 보고 연못의 물이 마지막으로 흘러 나가는 배수구가 궁금하여 한참이나 그곳을 보았던 기억을 가지고 물 빠지는 곳을 확인해 본다.

더운 날로 인하여 한 문화공간인 춘향전 테마 장소를 뒤로 하고 광한루의 구경을 마친다. 귀가 길은 좀 더 인삼으로 대표되는 금산을 경유하는 길을 택한다.

 

섬바위

용담댐을 지나며 섬바위를 잠시 들려본다.

평일이라 물놀이하려는 인파는 없어도 군에서 물놀이 지도하는 분이 상근 하는데 주말에는 많은 사람들이  물놀이를 즐기리라 생각해본다. 오늘은 더위로 인해 가벼운 여행을 택한 것인데 잘 정리된 멋진 연못을 가지고 잉어가 뛰어놀고 각각의 정자가 주변과 어우러진 광한루원을 편안하고 조용히 관람할 수 있었다는 행복감으로 귀가한다.

 

如一 유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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