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 마흔 한번째 - 울주

세종해피뉴스 2023. 11. 13. 22:30

- 망해사지 , 청송사지

 

울산에는 보물지정이 시작된 1963년 보물로 지정되어 온 이 여럿 있다. 이러한 것들 대부분이 사지에 있는 보물이다. 둘러본 곳 외에 방문하는 곳은 망해사지와 청송사지인데,  아마도 울산이 왜의 침입이 많아서 일까 ? 사지로 남아 있는 곳이 많고, 다른 유물이 없이 유독 석조물인 탑과 승탑 등이 남아 과거의 사찰이 존재를 알리고 있다. 많은 문화재가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 하며 울주 망해사지 승탑을 찾아본다.

 

[망해사]

 

[망해사지]

 

 차는 사지 아래 망해사 사찰 입구까지 오를수 있어, 차를 대고 사찰 입구 옆의 길을 따라 절 뒤편으로 돌아가면 망해사지에 도착한다. 승탑이라 사찰내가 아닌 뒤편에 두다 보니, 사찰을 통하지 않고도 볼 수 있는데, 시간에 쫓겨 사찰을 못들르고 사지로 바로 올라가게 된다. 두개의 승탑이  웅장한 모습으로 자리하며, 주변에 종모양 부도와 석물들이 자리한다. 망해사는 처용설화와 관련된 절로 신라 헌강왕 때 세워졌다고 하며, 이 곳에서 아득히 처용암이 있는 바다가 보인다고 한다.

 

 

[보물 제 173 호 울주 망해사지 승탑]

 

 울주 망해사지 승탑은 울주군 청량읍 망해사지에 있는 남북 시대 신라의 승탑 2기로 동서로 자리하며 동쪽의 부도는 쓰러져 있던 것을 다시 세운 것으로, 상륜은 없어졌으며 팔각원당의 통일 신라시대 후기 작품으로 추정한다. 탑신을 받치는 기단은 3개의 받침돌이며 아래 받침돌은 8각이다. 그 위에는 연곷무늬 조각을  가운데 받침돌은 8각 단위에 낮은 3단의 층이 받치고 있다. 윗 받침돌은 16잎의 2중 연꽃잎이, 탑신은 각면마다 창과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고, 4면에는 문짝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처마와 추녀가 수평으로 넓으며 귀퉁이엔 풍경을 달던 구멍이 있다. 

 

아래 사찰을 둘러보지 못하고 서들러 청송사지로 향한다. 한군데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청송 마을에 당도한다. 찾아가는 청송사지는 삼국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 하는데, 이곳 청송마을 전체가 청송사 경내라고 전해지며,  탑에 머지 않은 곳에 작은 청송사가 자리한다. 원래 매우 큰 사찰이라 신동국여지 승람에 수록되어 있으나 1810년 무렵 폐사한 것으로 본다.

 

[청송사]
[보물 제 382호 울주 청송사지 삼층석탑]

 

남암산 아래에 있는 청송사 절터에 있는 삼층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것으로, 기단은 각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기고, 마감돌 위에 다른 돌로 2단의 모난 괴임돌을 끼워서 각각 윗돌을 받치도록 하였다.  1층 몸돌이 길고 크며, 2층 몸돌은 급격히 줄어들은 모양으로 체감률이 조금은 맞지 않는 느낌이다. 각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이 있으며, 두터운 추녀로 인해 치켜올림이 약하며 처마는 수평으로 길이가 짧다.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을 받치는 노반만 남아 있다.  지방에 분포된 신라 석탑으로,여겨진다. 1962년 해체, 수리할 당시 위층 기단에서 동제사리함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 청동여래입상 1구를 비롯하여 유리구슬 16점, 수정으로 만든 곱은옥 1점, 관옥 1점 등 30여 점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탑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이 사지와 관계된 부도탑들을 찾아본다. 탑에서 돌아나오며 오른쪽 산기슭으로 향하면 부도 탑이 자리한다. 

 

[청송사지 부도탑]
[청송사지 부도탑]

 

 청송사의 터에 자리한 부도탑들이며, 주변에 부도 파변이 산재하고 있어, 이 일대가 일명 ‘부도골’로 불리기도 하였다. 모두 3기이며, 조선시대의 돌종 모양 부도이다. 왼쪽의 부도는 높이 3m로 지대석, 기단석, 연꽃 좌대, 탑신이 차례로 짜여져 있다. 기단석은 남북 면에는 인왕상을, 동서 면에는 연꽃무늬를 돋을새김 하였다. 탑신의 밑 부분에는 산스크리트 글자가, 윗부분에는 연꽃 봉우리가 새겨져 있다. 가운데 부도는 높이 2.2m로 기단석 4면에 연꽃무늬를 돋을새김 하였다. 탑신에는 ‘서응당 진흡대사(瑞應堂 愼洽大師)’라는 글자가, 아래에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오른 쪽의 부도는 받침석이 없이 부도만 놓여져 있다.

 

울주의 이번 여행은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돌다 보니 새로운 것에 대한 것을 깊이  알 수 없었으며, 사지에 남아 있는 것 들이라 깊이 관심을 못받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은 여행이다. 하지만 산재한 많은 사지와 박물관을 통하여 문화재를 접한 것에 흡족하며, 오랜 역사 속에 우리의 문화재로 자리한 것이 석탑과 부조가 대부분일 수 밖에 없는 것이 다소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 나마 역사성을 가지고 남아있는 이러한 것들을 잘 돌보야 할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눈에 맞게 보전하는 것과 원래의 모습으로의 보존하는 것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겠으나, 어떠한 형태이든 남기는 것이 중요 하다고 생각한다. 해가 저물어 가는 석탑이 보이는 마을을 나서며 그래도 탑과 부도는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에 대한 과거 일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관련기사] 如一同行 백 마흔 한번째 - 울주 > 뉴스 | 세종해피뉴스 (xn--vg1b03zi5a71m9wruj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