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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一同行 백 여든 아홉번째 - 산청

세종해피뉴스 2025. 4. 1. 23:51

방문이 미루어진 산청을 찾는다. 산청으로 들어서며 커다란 사찰 같은 덕양전을 둘러보고, 산청의 왕산에 있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가락국 제 10대왕 양왕의 능을 찾아본다. 요즘  매장문화재 발굴로 새로이 주목 받고 있는 가야의 문화의 문화 중 오래전 부터 알려진 금관가야의 산물이기도 하다. 

 

[구형왕릉]

 

주차장에서 조금 오르면 잘 정비된 구형왕릉이 자리한다. 가락국 10대 구형왕은 가락국시조 김수로왕의 10대손으로 서기 521년 10대왕에 등국하고, 세동, 무력, 무즉, 세아들과 증손으로 흥무재왕 김유신과 5대외손으로 신라 제 30대 문무대왕을 두었다 하는데, 이는 서기 532년 법흥왕때 전쟁의 피해에서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신라에 선양하고 가락 지품천 방장산 속 태왕산으로 들어와 생활하였다고 한다.

 

[구형왕릉]

 

나라를 내어준 까닭에 '돌무덤'으로 장례를 치루라는 유언에 따라, 피라밋형 석릉으로 서쪽 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산기슭에 설치한 것으로, 불규칙한 암석을 쌓아 일곱단의 층을 이루며 정상부는 타원형이라한다. 앞면전체의 높이가 7.15m로 하단길이는 25m이며, 동쪽 4단 중앙에 가로,세로 40cm,깊이 58cm의 석문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서 왕산으로 향하는 곳에는 류의태 약수터와 산청 왕산사지가 있어, 임도를 따라  차를 몰아본다. 약수터로 향하는 길을 걸어 오르다 보면 왕산사지를 알리는 표지석과 부도가 보인다. 왕산사는 자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잘 알수 없으나, 탄영이라는 스님이 쓴 왕산사기에 의하면 왕산의 능묘를 수호 하였기에 왕사라고 하였는데, 원래는 왕산의 정궁이었다고 한다. 

 

[왕산사지 부토탑]

 

이곳은 반달가슴곰이 출현 지역이라 대처 방법에 관한 현수막이 작게 걸려 있어 숙지하고, 운명은 곰에 맞기기로 하고, 나무가지를 줏어들고 지팡이 삼아 능성이로 오른다.

 

[왕산사지]

 

절터 안에는 4개소의 건물터와, 초석을 비롯 돌담, 축대, 우물, 비를 세웠던 받침돌, 부도등이 남아있으며, 많은 기와조각 및 그릇조각이 있어 사찰의 규모가 컸을 것으로 본다. 안내 팻말 아래는 수정궁터임을 알리는 표식이 자리한다. 임도의 옆길엔 연결 된 고로쇠 채취용 흰 관이 설치된 길을 내려와 산청의 보물을 담고 있는 대원사 로 향하는 길로 접어드는곳, 넘겨다 보이는 마을에 머리를 내민 커다란 탑을 보며 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삼장사 옛터에 자리하는 삼장사지 삼층석탑이다.

 

[산청 삼장사지]

 

삼장사는 절 이름의 유래나 역사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마을안의 밭으로 변한 주변에 건물의 기단을 비롯한 여러 석조물이 남아있어 절터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산청 삼장사지 삼층석탑]

 

삼장사의 옛터에 남아 있는 탑으로, 무너져 흩어져 있던 것을 일부 수습하여 세워 놓았다고 한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쳐주는 2층 기단 위로,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으로, 원래는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기단은 아래위층 모두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기고,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에만 기둥조각을 넣었다. 지붕돌은 4단씩의 받침을, 처마선은 양끝에서 살짝씩만 들려 있다. 5층 석탑으로 추측되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이후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산아래로 찾아들어 맑은 물의 계곡 옆에 자리한 대원사로 들어선다.

 

[대원사]

 

548년(진흥왕 9)에 연기가 창건하여 ‘평원사(平原寺)’라 하였다고 전하지만 역사적 신빙성은 없다고 한다. 대원사에 관한 기록은 조선 후기부터 나오고, 1685년(숙종 11)에 운권(雲捲)이 옛터에 절을 짓고 ‘대원암(大源庵)’이라 하였다고 한다. 예전 대원암은 지리산 삼장사의 산내 큰 절에 딸린 작은 절일 것으로 추정하고 , 여수 순천사건 때부터 한국전쟁 까지 전쟁터가 되어, 소실된 뒤 8년 동안 폐허가 되었으나, 1955년에 승려 법일(法一)이 다시 낡은 건물을 헐거나 고쳐서 다시 지어 중창하였다고 한다.

  

[ 대웅전]
[대웅전 삼존불과 후불탱화]
[응양각과 원통보전]

 

 사찰을 둘러보며 이곳 대원사가 보유한 문화재를 찾아본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산청 대원사 신중도]

 

대원사의 신중탱화로, 인도의 재래적인 토속들을 그림으로 나타낸 신중을 그린 불교 그림이다. 신중은 불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수용된 불법 수호의 선신(善神)들로, 이처럼 별도로 그림을 그려 신앙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고 한다. 가로 124㎝, 세로 145㎝ 크기의 이 그림은 부처님의 정법을 지키는 금강신장을 비롯한 무리들을 표현한, 조선 정조 18년(1794)에 그린 18세기 불교그림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고 한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산청 대원사 반자]
금고 또는 금구라고도 하며 절에서 대중을 불러 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리는데 사용한 도구인데, 바깥지름 62㎝, 안지름 37㎝, 너비 15㎝로, 둘레 가장자리 일부분이 결실되었으나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표면에 문양 없이 세 개의 돌출된 동심원이 있고,  속은 비어 있는 통식에 옆면에도 세 개의 돌출된 선이 둘려져 있다. 고리로 매달 수 있게 되어 있다. 안쪽 면의 글로 조선 숙종 27년(1701)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는 가치 있는 자료라고 한다.
 

 사찰의 다소 은밀한 곳에서 윗부분만 모습을 들어내고 있어, 존재를 알고 관심으로 둘러보지 않으면 슆게 보지 못하는 비구니 스님이 수행하는 건물앞에 자리하고 있다.

 

[보물 산청 대원사 다층석탑]

 

경내의 오른쪽 끝의 사리전 앞에 서 있는 이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8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으로,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일부만 남아있다. 탑신의 각 지붕돌은 처마가 두꺼우며 네 귀퉁이에서 약간 들려있으며, 8층 지붕돌에는 고즈넉한 경내를 깨울 듯한 풍경이 달려 있다. 자장율사가 처음 세웠던 탑이 임진왜란 때 파괴되자 조선 정조 8년(1784)에 다시 세워 놓은 것으로, 드물게 남아있는 조선 전기의 석탑이라 한다. 좁으며 길지만 체감비율이 나름 안정감을 준다.

 

[ 가층석탑 기단]

 

기단의 위층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기는 대신 인물상을 두었고, 4면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명칭산청 대원사 목조보살좌상 및 복장유물분류유물 / 불교조각 / 목조 / 보살상수량/면적불상1구,복장유물5건지정(등록)일2020.05.21소재지경상남도 산청군]

 

천수 천안 관음보살을 후불벽화로 연꽃위에 정좌하신 목조보살좌상은 관음보살상이다. 가늘고 긴 눈, 뭉툭하면서도 큼직한 코, 미소가 있는 얇은 입술에, 다리 사이에 대칭을 이루는 넓은 옷주름과 옷자락이 대좌를 덮는 상현좌의 형식, 다리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가늘고 끝이 뾰족한 옷자락 등이 특징으로. 조각승 색난의 양식을 따른 불상이라고 한다. 불상 내부에 복장유물로 발원문, 다라니 경 등이 있으며 발원문을 통해 조각승 초변이 1700년에 지리산 무위암에 봉안하기 위해 조성하였다고 한다. 

 

산사에 날이 저물어 오고, 아직은 나무가 잎을 달지 않아서 인지, 많은 사람이 찾지 않는 시기 때문인지, 절 앞 계곡은 물흐르는 소리만 울려 적막하게 느껴진다.  올라온 길을 돌아내려 가며 탑을 지키는 인물상이 누구일까 생각해본다. 동그랗게 뜬눈으로 탑을 지키는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돌아가는 길은 늘 그러하듯 뿌듯함이  피곤을 이기게 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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