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에 발을 디딘다. 유난히 눈이 덜 녹은 모습을 보이는 덕유산을 끼고 거창으로 이곳의 보물 입상들을 찾아보러 나선 길이다. 빼재고개를 넘어 굽어진 길을 내려서며 부강면으로 접어들어 농산리 석조여래 입상을 보는 길, 작은 탑이 길옆에서 발길을 잡는다.
탑불이라는 마을로부터 조금 쯤 떨어진 옛 절터에 자리하는데, 절터는 경작지로 변하고, 절의 규모와 내력은 자료가 없어 알수 없다고 한다. 사각형 이중 받침대를 가진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작은 석탑의 커다란 받침돌과 받침돌에 중앙 기둥을 세긴 것이 특이 하며, 받침부분과 몸체의 크기가 차이나는 것에서 오는 앙증함이 느껴진다. 오랜세월을 자리를 지킨 그 자체로도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을 듯 하다.
서간소루의 삼문에는 임운의 효행과 학문을 기려 세운 홍문이 있다.
서간소루는 첨모당 임운 선생이 살던 곳이며, 그 의 아들 서간 임승신 선생이 강학을 하던 장소로, 서간소루는 이 마을의 종가 구실을 하고 있는 임씨 고택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의 건물이어서 기둥이 부식되어 두차례 보수한 유서 깊은 건물이라 하며, 살림채 없이 대문채와 사랑채로만 있어, 본래 임씨 고택과 서간소루가 하나의 주거 영역이 아니었나 추측하게 한다고 한다.
걸음을 옮겨 갈계리 임씨 종가로 향한다.
대문채는 방·대문·헛간으로 구성되었는데 사랑채의 앞에 자리잡고 있다. 임훈의 덕행을 추모하여 나라에서 내린 정려문을 대문에 합문(閤門)해 두었는데, 정려문 윗부분에 이조판서를 추증하였다는 내용의 정려패가 걸려 있으며, 이 정려문의 주춧돌이 거북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효자로 이름이 높았던 갈천 임훈 선생의 집이다. 중종 2년(1507)에 지었으며, 안채, 사랑채, 사당, 장판각, 대문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사랑채는 정면 3칸의 맞배지붕이며, 가운데에 대청마루, 양쪽에는 각각 방 1칸씩 있으며, 방과 대청 전면에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안채 뒷편에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안채는 정면 5칸의 맞배지붕이며, 중앙에 대청마루와 양측에 방 ,그리고 부엌 1칸을 가지고 있다.
갈천 임훈(1500~1584)과 첨모당 임운(1517~1572)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책판 177매가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두 문집은 1665년(현종 6년)에 후손이 편집하여 간행하고, 송시열이 서문을 썼다고 한다.
4권 2책의 <갈천집>에는 선생이 쓴 시와 상소문, 잡문 등 다양한 글이 실려 있고, 3권 2책으로 구성된 <첨모당 문집>에는 시와 문장 등 다양한 글이 실려 있다고 한다. 간행에 쓰인 목판이 이곳 장판각에 보관되어 있다.
고가의 기품에서 벗어나 길을 옮겨 목적지에 당도한다. 이젠 잘 정비 된 길을 오르니, 주변의 변한 보호 장치들이 눈에 든다. 길에서 멀지 않고, 눈에 띄지 않은 장소에 덩그라니 자리한 보물이 조심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관리가 잘 되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유난히 찾는 이 많지 않고, 숲이 깊고 어두운 곳이라 느끼던 곳 인데 오늘 보니 주변의 눈도 녹지 않은 것을 보니 을씨년스러워 진다.
2005년 보물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자연석에 두 발을 새겨 놓은 1매의 대석과, 대석에 세운 돌에 광배를 함께 조성한 불신 등 두 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다소 머리부분이 크며, 부분적으로 손상되어 있다. 통견의 법의는 가슴엔 U자형, 허리 부분 부터 Y자형으로 갈라지며 양 대퇴부에서 대칭적인 문양을 가진, 8세기 이후 상들에서 나타나는 우전왕(優塡王, Udyana王)식 옷주름의 형태라 한다. 두 발은 마모로 왼쪽 발가락 일부만 보이며, 광배는 우측 상단부가 깨어져 나간 배 모양의 형태이나, 문양 표현은 알 수 없다고 한다.
해도 잘 들지 않는 듯한 습한 숲에 자리한 불상이 아직도 녹지 앟은 눈 위에 자리하여 검은색을 두루고 있는 모습을 안타까워 하며, 가까이 다가가 접근금지의 안내소리를 확인하고, 다음의 만남을 기약한다.
금원산의 가섭암지 마애삼존입상을 찾아 볼까 하며 길을 가며, 오르막의 산길을 걱정하다가 부근의 불상을 찾아본다. 이전의 모습과는 다르게 전각에 자리한 불상을 대하니 그 모습이 예전 같지가 않다.
마을 한켠에 자리한 불상이 전각안에 자리하며 주변도 잘 정비되어 이제 대접을 받는 느낌을 갖는다.
위천면 상천리의 기록 없는 강남사 절터에 있는 석조여래입상으로, 광배를 한몸에 지닌 불상이다. 얼굴은 마모가 심하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으며, 오른손은 중생의 두려움을 덜어 준다는 시무외인을 왼손은 중생의 소원을 들어 준다는 여원인을 표현 한 듯 하며, 통일신라시대 만들어 진것으로 추정 된다. 멀지 않은 곳의 가섭암지를 뒤로 하고 길을 돌아나와 거창의 동계종택으로 향한다.
동계 종택의 문간채를 들어서니 'ㄱ'자형의 사랑채가 있는데, 사랑채 안쪽으로 '一'자형의 안채가 자리하며, 안채의 오른쪽에는 뜰아래채가, 왼쪽에는 곳간채가 있다. 안채의 뒷쪽엔 담장을 두르고 3문을 설치한 사당이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정온(1569∼1641)이 태어난 집으로, 후손들이 순조 20년(1820)에 다시 짓고 정온의 신위를 사당에 모신 국가 민속문화 유산이라한다. 사랑채는 꺾인 부분을 누마루로 꾸미고, 눈썹지붕을 설치한 점이 특이하다고 하며, 안채와 사랑채는 북부지방 가옥의 특징인 겹집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기단은 낮고 툇마루를 높게 설치한 남부지방 고유의 특징도 함께 가지고 있다고 한다. ㄱ자의 돌출부분이 마치 정자 같은 분위기를 느끼는 조선 후기 양반주택의 기품을 볼 수 있다.
주인집이 귀거하여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 안채로 드나드는 문간에서 그 모습을 엿본다. 동계 종택을 나서면 인접하여 반구헌이 자리한다.
반구헌은 조선 헌종·철종 년간에 영양현감을 지낸 야옹 정기필(鄭夔弼)선생이 기거하던 주택 이라 한다. 야옹선생은 목민관 재임시 청렴한 인품으로, 관직을 사직하고 재산과 거처없이 고향에 와서, 당시 안의현감의 도움으로 이 반구헌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반구헌이란 이름은 스스로 자신을 뒤돌아보고 반성한다는 의미인 "反求於諸心"에서 유래한 것이라하며, 사랑채의 상량문을 통해 1870년대에 건립 또는 중건된 것으로 추정한다. 사랑채는 팔작기와 지붕에 정면5칸, 측면5칸 규모로 특징은 대청이 중앙에 있지 않고 규모가 1칸인 반면에 방이 3칸이라는 점이다. 또한 측면 1칸에 난간을 두룬 누마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중앙에 부뚜막이 자리한다. 아궁이를 설치하여 방 2개를 한곳에서 난방하도록 평면을 구성한 구조는 민도리집이라 한다.
건물의 측면의 대청이 독특한 느낌을 준다.
사랑채에 덩그러니 자리한 장독들은 다소 뜬금없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최근 복원된 건물이라 한다. 사랑채 건물에 장독이 자리한 이유가 되는 것인지...
뒷편에 대숲이 자리하는 복원된 안채의 측면에 난간을 만든 모습도 특이하게 느껴진다.
어디쯤 인가 이 댁의 음식에 사용 될 장을 담은 독이 자리하는 장독대가 있을 듯한 뒷편, 높낮이가 다른 툇마루가 자리하는 데 무엇으로 쓰였을지 궁금증을 갖게 한다. 거창의 여러 불상을 둘러 보려 길을 나섰으나 뜻하지 않게 한옥 투어를 하게 된다. 저마다의 사연과 특색을 갖고 있는 건물들을 대하다 보니, 삶 속에서 보여진 나름의 독특한 개성의 가옥구조를 비교 감상하는 기회를 갖는다. 아마도 그 곳에 생활하던 분들의 아이디어가 반영되었으리라 생각하며, 건물마다의 다양한 특징의 장단점을 비교해 본다. 내가 한옥을 지어 산다면 어떤 모습이 좋을 까 공상도 하며, 덕유산 겨울 막바지 풍경을 벗삼아 춥지 않은 날씨에 나선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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